짙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수천대의 군함, 그 바다와 하늘을 호령하는 신비로운 금빛의 용사. 트로이 전쟁의 서막은 이런 모양새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트로이>의 트레일러에서 엿본 몇 장면이다. 이때부터 궁금증에 몸살을 앓는 이들이 생겨났다. 과연 그들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어떻게 한편의 영화로 옮겨냈을까. 10년에 걸친 수만 대군의 싸움 트로이 전쟁은 어떻게 영상화됐을까. 브래드 피트와 올란도 블룸, 에릭 바나는 아이콘이 돼버린 영웅들을 어떻게 체현해냈을까. 이런 의문들을 먼저 풀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4월29일 뉴욕에서 <트로이>가 첫 번째로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봄꽃이 흐드러진 센트럴 파크를 지나 링컨 스퀘어의 한 멀티플렉스에 다다르는 여정은 ‘먼 여행’을 예비하는 짧은 리허설과도 같았다. 국제기자단을 태운 타임머신은 3200년 전 트로이 전쟁의 장대한 스펙터클과 가슴 절절한 그 뒷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흥미롭게도 우릴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 가이드는 그 자신이 이미 여러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섰던 오디세우스(숀 빈)였다.
신의 손길을 뺀 <일리아드>
이야기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가 적국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와 사랑의 도주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호시탐탐 트로이를 노리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은 동생의 여자를 훔쳐간 파리스의 행각을 문제 삼아,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진격한다. 그리스 진영의 전사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는 오직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호전적인 인물. 해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킬레스는 파리스의 사촌 브리세이스(로즈 번)를 포로로 곁에 두게 되면서, 그녀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낀다. 자신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오만한 아킬레스를 못마땅히 여기던 아가멤논은 브리세이스를 희롱하려 들고, 이에 격분한 아킬레스는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아킬레스가 결장한 싸움에서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사촌 페트로클레스는 스스로를 아킬레스로 위장하고 출전했다가, 트로이군의 수장인 헥토르(에릭 바나)의 손에 죽는다. 그리고 아킬레스는 이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에 휘말리고 만다.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사사롭거나 위대한 감정. 사랑과 욕망, 질투와 집착인 것이다.
최강의 전사, 최강의 캐스팅
<특전 U-보트>에서 <퍼펙트 스톰>에 이르기까지 ‘사나이 이야기’를 편애해온 볼프강 페터슨 감독은 <트로이>에서도 다시 한번 ‘형제애’를 부각시켰다. 물론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이 트로이 전쟁을 촉발시키고, 브리세이스에 대한 아킬레스의 사랑이 연쇄적인 복수극을 낳는 것처럼, 모든 문제의 발단은 ‘여자’이고 ‘사랑’이다. 그러나 극 전체를 끌고가는 정서는 사나이들의 우애와 야심이다. 파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원치 않는 싸움에 말려드는 그의 형 헥토르, 아끼던 사촌동생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피를 부르는 아킬레스의 선택이 그런 예들. 심지어 라이벌 관계인 아킬레스와 헥토르 사이에도 <첩혈쌍웅>의 주윤발과 이수현이 연상될 만큼 미묘한 유대감이 흐른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죽거나 죽이거나’ 판가름을 내야 할 운명에 내몰리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연민하게 된다. 페터슨 감독이 이들을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도 이에 동조한다. “형제를 위해 나라를 위해 마지못해 전쟁터에 나가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헥토르의 고결하고 위대한 여정이 마음에 든다. <트로이>에서 인물들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런 형제애다.”
캐릭터별 포스터 비주얼을 따로 제작했을 정도로 <트로이> 배우들의 면면은 빼어나다. 그러니, 이들의 미모와 개성과 역량이 영화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쟁 서사극이라는 장르와 형제애라는 테마뿐이었다면, 여성관객이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겠지만 당대의 꽃미남 스타들로 꾸려진 이런 진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볼프강 페터슨은 여성팬을 위한 서비스에도 꽤나 신경을 썼다. 짧은 가죽 치마를 두른 꽃미남들의 활보만도 아찔한데, 브래드 피트는 몇 차례 누드를 선보이기까지 한다). 이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킬레스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 인간과 신의 경계에 선 강인하고 오만한 전사이지만, ‘사랑’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아킬레스의 복잡한 모순과 변화의 과정을, 브래드 피트는 무리없이 선보인다. 철없는 막내왕자 파리스 역의 올란도 블룸도 잘 어울리지만, 에릭 바나도 ‘비자발적인’ 영웅 헥토르의 아이콘에 잘 들어맞는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일대일’ 대결신은 <트로이>의 명장면 중 하나. 전문 무술팀이 안무한 동작을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가 8개월간 함께 맞춰본 결과라는데, 양국 대표선수의 맞대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또 다른 명장면의 주인공은 프리아모스 역의 피터 오툴이다. 아들을 죽이고 그 시신을 욕보인 아킬레스에게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는 늙은 왕의 부성은, 슬픈 잔영을 남긴다. 감독은 물론, 배우들도 첫손에 꼽은 장면.
시대극 열풍의 첫 포문을 열다
1억8천만달러로 알려진 <트로이> 제작비는 상당 부분 ‘스타 캐스팅’에 쓰였겠지만, 런던과 말타와 멕시코를 오가며 ‘좋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데도 투자됐다. ‘맛보기’로 공개된 클립이 예고했듯, <트로이>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전쟁 ‘스펙터클’이다. 1천대의 군함을 시각화한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 해안 침공신, 트로이의 그리스군 불화살 공격신, 그리고 트로이성의 함락신 등 여러 차례 등장하는 전투신은 맥락에 따라 특징과 규모가 다 다르다. 특히 5만 그리스 군대와 2만5천 트로이 군대가 맞붙는 대규모 전쟁신은 널찍한 멕시코 해안에서 1천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촬영한 뒤 컴퓨터로 재현한 가상 캐릭터를 추가해 완성했다고 하는데, 실사와 가상의 ‘이음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끈하다. 12m와 11t에 이르는 트로이의 목마,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가장 큰 야외 화제신”으로 알려진 트로이성 함락장면도 빠뜨릴 수 없는 볼거리. 트로이 전쟁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3200년 전의 문명을 되살리는 것도 제작진에겐 중요한 과제였을 터. 고대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살다시피했다는 미술팀은 이집트 문명의 배경 위에 미케네 문명의 디테일을 얹는 식으로 컨셉을 잡았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라”는 감독의 주문은 배우들을 향한 것이기도 해서, 당시 민속화에 묘사된 대로, 남자배우들은 근육을, 여자배우들은 살집을 늘려야 했다는 것이, 현지에서 만난 배우들의 전언이다.
최근 몇년 사이 시대극 열풍이 불어닥친 할리우드에서 <트로이>는 가장 먼저 완성돼 공개되는 작품이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등이 줄줄이 스크린을 찾아오겠지만, 하나도 아닌 네댓명의 영웅들을 한꺼번에 소개하는 <트로이>의 야심은 창대하다. 시대극 블록버스터의 첫 주자로서 <트로이>가 어떤 출발을 했는지, 오는 5월21일이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