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사심이 빚는 비극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결과물에 만족하나.
=사실 지난 일요일에 런던에서 믹싱을 끝냈다. 완성본 전편은 1번밖에 못 봤고, 그래서 객관적으로 돌아볼 여유가 아직은 없다. 19개월의 마라톤이었다. 그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했다. 호머의 <일리아드>는 모든 이야기의 어머니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매우 고전적인 동시에 동시대적이기도 하다. 요즘 신문 헤드라인을 보라. 폭력에 살인에 전쟁까지, 인간의 사심과 광기가 빚는 비극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런 작품을 영화화할 수 있었다는 게 기쁘다. <트로이>는 내 필생의 작품이다. 만족한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최선을 다했다.
-브래드 피트를 선택한 이유는.
=2002년 봄 초고가 나왔을 때 그가 아킬레스 역할에 관심이 많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원래 브래드 피트를 좋아했다. 미모가 돋보이는 전형적인 역할도 했지만, <파이트 클럽> <스내치> <12 몽키즈>처럼 위험부담이 큰 영화에 출연하는 걸 보면서, 대담하고 유능한 배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그가 아킬레스를 맡아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완벽한 매치라고 생각했다. LA의 독일 식당에서 만나 맥주와 음식을 먹으면서(감독은 독일 사람이다), 영화와 역할에 대해 많은 얘길 나눴다. 이미 그때 그는 아킬레스에 빠져 있었다.
-전쟁신의 스펙터클과 고대 도시의 풍광을 재현해냈다.
=아주 길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대규모 전쟁신도 여러 번 있었는데, CG를 동원해 실감나게 표현해냈다. 그간 <일리아드>가 제대로 영화화되지 못한 것은 테크놀로지 없이 트로이 전쟁을 재현하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타의 찌는 무더위, 멕시코에서 만난 허리케인, 애초 로케이션으로 확정했던 모로코를 이라크전 발발로 포기했던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아킬레스와 프리아모스의 조우는 명장면이다.
=내게도 최고의 장면이다. 아킬레스의 텐트가 배경인데, 배우들의 몰입을 돕기 위해 조용한 호텔 룸을 빌려 거기에 세팅을 했다. 브래드 피트와 피터 오툴은 정말 대단했다. 브래드는 촬영이 끝난 뒤에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고, 나도 숙연해졌다. 살인 괴물에 가깝던 아킬레스가 인간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런 액션 대작에서 그처럼 감성적인 장면은 드물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하고 정적이고, 인간의 깊은 감정이 드러나는 장면이 그래서 중요하다. 원래 러닝타임은 20∼25분 정도 더 길었는데, 주로 큰 액션신을 잘라냈다. 액션 스펙터클과 캐릭터의 감정적 측면이 조화롭길 바랐다. 이 둘 사이에 기막힌 조화를 이끌어낸 감독이 데이비드 린이다.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가 사랑한 배우들인 피터 오툴과 줄리 크리스티를 캐스팅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누군가.
=당신들도 판단이 안 서니까, 내게 묻는 거 다 안다. (웃음) 이 영화에선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그보다 복잡한 존재 아닌가. 아킬레스와 헥토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헥토르는 선하고 고결한 인물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 싸운다. 아킬레스는 타고난 전사로,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싸운다. 굳이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킬레스쪽이다. 그처럼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물이 더 끌린다.
-사건사고도 많았고, 힘든 촬영이었다고 알려졌다.
=영화를 찍다보면 별일이 다 있다. 웬만한 열정과 정력이 아니면, 버텨내기가 힘들다.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허리케인이 여러 번 왔고, 브래드 피트도 다리를 다쳐 촬영이 지연되곤 했다. 그 정도는 약과다. 수천명이 투입되고, 90%를 야외에서 찍어야 하는 이런 영화는 결코 쉽지 않다. 이건 보통 영화가 아니라 <트로이>다, 라는 자부심으로 견뎠다. 그리고 난 아직 그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액션이 많은데, 어떻게 연출했나.
=나는 액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방면의 전문가들을 고용했다. 그들이 동선을 짜고 연기한 것을 녹화해뒀다가, 배우들에게 보여주고 따라하게 하는 식이었다. 브래드와 에릭은 8주 정도 매일 연습했다. 그 동작들이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되었을 때 나는 역사 속 영웅들의 결전을 지켜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천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대규모 전쟁신 못지않은 스펙터클을 그 둘이서 연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