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46>은 아직도 작업중 [1]
2004-05-18

칸 상영 직전까지 손질 멈추지 않는 왕가위, 그리고 〈2046>을 말한다

<화양연화> 이후 4년 이상을 끌어온 왕가위의 신작 〈2046>이 마침내 5월12일 개막되는 제5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선보인다. 그런데 칸의 라인업이 발표된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그가 〈2046>을 찍고 있다는 것이었다. 〈2046>을 칸에서 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씨네21>은 그의 자막 작업을 해주고 있는 토니 레인즈에게 급히 팩스를 넣었다. 〈2046>에 대해, 그리고 왕가위의 지난했던 작업에 대해 글을 써줄 수 있느냐고. 정작 토니 레인즈는 전주영화제 등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었고 출국을 하루 앞둔 5월5일, <씨네21>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서 왕가위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현재 영국영화연구소(BFI)에서 발간하는 영화 월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 고정필자이자 <씨네21>의 해외특별 기고가이며, 밴쿠버영화제와 런던영화제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다. 편집자

거의 정확히 4년 전, 필자는 <화양연화>의 자막과 보도자료 작업을 돕기 위해 홍콩에 머물고 있었다. <화양연화>는 그해 칸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상영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토요일에 프리미어를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주의 월요일, 다시 말해 예정된 상영의 5일 전, 영화의 마지막 4, 5번 릴의 자막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코즈웨이베이 구역에 위치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사 제톤필름(Jet Tone Films) 사무실로 향하고 있던 필자는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왕 감독이었다. 그는 길가의 작은 커피숍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자마자 “토니, 홍콩에 좀더 있어줘야 할 것 같아”라고 말을 건넸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지난날 하루종일 사운드 믹싱을 한 뒤 밤에 사무실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5번 릴 분량을 재편집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건 곧 5번 릴의 자막작업을 그날 마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토요일로 예정된 칸 상영 일정을 도저히 맞출 수 없을걸”이라고 내가 반문하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두고봐, 문제없을 거야"라고 답했다.

<화양연화>와 〈2046>, 반복되는 마감불감증의 역사

왕가위의 신작〈2046>의 촬영현장. 토니 레인즈는 왕가위가 스탭과 배우들로부터 100% 이상을 뽑아내는 흡혈귀과 감독이라고 말한다.

당시 필자는 이미 예정보다 4일이나 더 홍콩에 머물며 작업을 하고 있었고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에는 이미 짐을 싸서 호텔을 나선 상태였다. 나는 일정상 그날 홍콩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5번 릴의 자막작업을 마칠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누군가가 5번 릴의 자막작업을 대신 마무리지었고, (때문에 다른 글자체와 사이즈로 자막이 입혀진) 5번 릴이 먼저 파리에 도착해 있던 나머지 분량에 더해져서 상영 전날인 금요일이 되어서야 영화의 상영용 프린트가 완성되게 되었다. 다음날 토요일, 영화는 예정대로 칸에서 프리미어를 가졌고 영화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으며 양조위에게 최고 배우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소동의 와중에서 <화양연화>의 후반부 작업에 참여했던 인원들 중 그 누구도 상영 전 마지막 4일 동안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그해 여름 다시 홍콩을 방문했을 때 나머지 분량에 맞춰 5번 릴의 자막을 정돈하기 위해 제톤 필름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물론, 그때까지도 왕 감독은 재편집 작업을 계속 하고 있었고, 때문에 우리는 결국 전체적으로 자막을 완전히 재조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화양연화>의 최종 편집본은 결국 9월의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가졌고, 이후에야 세계 배급을 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오늘날, 결국 역사는 반복되고야 말았다. 왕가위 감독의 신작 〈2046>은 이번에도 칸에서 경쟁부문 상영일의 마지막 날 상영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필자는 지난 4월 제톤 필름의 작업실에서 90분 분량의 1차 편집본을 위한 자막작업을 마쳤는데, 이때까지도 재촬영이 거듭되고 있었고 왕가위 감독과 장숙평(역자: 그는 <화양연화>와 〈2046>의 프로덕션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다)은 영화의 최종적인 이야기구조와 길이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주일 전 전주영화제 참석차 한국에 들른 필자는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5일 현재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데, 한국에 도착한 뒤 매일매일 이메일을 통해 조금씩 추가되고 수정되고 있는 대사 분량을 받아 작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중 대부분은 필자가 지난번 확인했던 분량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 도대체 뭐가 화면 위에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종의 ‘장님’ 상태에서 자막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고충을 겪고 있는 셈이다.

현재 필자가 제톤 필름으로부터 전해 들은 마지막 소식은 칸영화제가 상영용 프린트를 5월14일까지는 제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고, 영화의 최종 후반부 작업은 내일이나 모레쯤 방콕으로 옮겨져 시작될 것이며, 내가 다음주에는 다시 방콕으로 날아가 프린트 수송 이틀 전까지 ‘최종’ 자막작업을 마쳐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사 다음주에 왕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그가 내게 마지막 기한을 넘겨서라도 수정할 부분이 있으므로 15일이나 16일쯤으로 (혹은 그 이후로?) 프린트의 수송을 미루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2046>은 어떤 영화인가

물론 필자는 이상의 이야기가 영화제 마감시한과 이를 맞추기 위해 보낸 불면의 밤들에 대한 그렇고 그런 일화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예술가로서의 왕가위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이 간략한 글에서 바로 왕 감독의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영화 〈2046>은 1967년을 배경으로 <화양연화>에 곧바로 이어지는 속편이다. <화양연화>에서의 이야기 뒤, 주인공 초우모완(양조위)은 홍콩으로 돌아와 다시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가 쓴 칼럼들 중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2046’이라는 제목의 것으로 미래에는 인류가 인조인간인 안드로이드와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는 가상적인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이 가상의 세계에서 전세계는 철도를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가끔씩 기차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계”라고 알려진 ‘2046’이라는 곳으로 떠나간다는 설정이다. 이야기 자체는 매우 미래지향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그 내용은 흥미롭게도 1960년대 홍콩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일상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1967년의 세계에서 주인공 초우모완은 같은 호텔에 세들어 있는 한 여인과 타들어갈 듯 정렬적인 성적 관계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녀는 부자 남편감이나 중년의 호구를 찾아 대륙에서 넘어온 탕녀이지만 뜻밖에 무일푼의 주인공과 심각한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그녀의 이름은 ‘미스 바이’로 장쯔이가 가히 최고라 평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필자의 섣부른 추측은 그녀가 이번 칸에서 최고 여배우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편인 <화양연화>의 이야기 속에서의 너무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주인공 초우모완은 다시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고, 스스로 냉정한 바랑둥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2046년은 1997년 홍콩이 중국의 주권지로 회복된 뒤 50년째 되는 해로 (독자들이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덩샤오핑이 약속한 대로 반환 뒤에도 홍콩을 ‘변화없이’ 남겨두기로 한 50년의 시한의 마지막이 되는 시점이다. 왕가위 감독은 홍콩 같은 곳이 무려 50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의 말대로 ‘변화없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라는 점에 흥미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글 토니 레인즈/ 영화평론가·번역 권재현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