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46>은 아직도 작업중 [2]
2004-05-18

왕가위에게 필요한 것 하나, 데드라인

이 영화의 모티브로 인해 (특히 판타지로 전환된 개인의 기억이 주제라는 점에서) 왕가위의 예술가적 집착이 전보다 훨씬 강하게 드러나게 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완성 기한에 쫓기는 혼란스러운 작업 과정과 영화 속의 다른 부분들이 왕 감독에 대해서 우리에게 뭔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선 캐스팅에 관한 것이다. 장이모 감독이 자신의 ‘서투른’ 아카데미 외국영화상 수상 시도작(?)인 <영웅>을 만들기 위해 <화양연화>의 두 주인공 양조위와 장만옥을 빌려(?)갔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물론 왕가위 감독은 그 캐스팅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고, 이에 〈2046>을 위해 장쯔이와 공리는 물론이고 덩지에(董潔)에 이르기까지 장이모 감독과 작업했던 모든 여성 스타들을 되빌려오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들 배우 모두로부터 장이모 감독이 이제까지 해낸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훌륭한 연기를 이끌어냈다. 교훈 하나! 왕가위 감독은 경쟁하기를 마다지 않으며, 심술궂게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또한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은 완성되기까지 후반작업에서 반복적으로 위기상황을 거치는 점을 하나의 특징적인 패턴으로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비단 후반작업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왕가위는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더이상 결정을 회피할 수 없는 순간까지 중요한 모든 결정을 미루려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는 촬영 기간 중 거의 일상적으로 촬영을 중단한 채 어디론가 숨어들어가 촬영한 부분에 대해서 재검토하며 그 함의를 심사숙고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을 떠올려내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매번 그토록 오래 촬영을 하며 많은 제작비를 소진하는 이유이다. 필자는 1999년의 어느 봄날 왕가위 감독이 두편의 영화를 연이어 제작할 계획이라고 일러주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단 두명의 배우를 데리고 석달 정도면 완성할 작은 영화이고, 연이어 찍을 작품은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대거 동원될 대예산의 SF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전자인 <화양연화>는 홍콩에서의 촬영과 타이에서의 재촬영을 통해 15개월 만에 완성되었고, 후자인 〈2046>은 제작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다.

교훈 둘! 왕가위 감독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자신을 강제하는 데드라인의 압박이 필요한 사람이다. 비록 그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홍콩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왕 감독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지어가는 건축가처럼 촬영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문서로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처럼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로케이션에서 벌어진 기대하진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이라든지 배우나 촬영감독 등에 의해서 제시된 탁월한 아이디어라든지 하는 열려 있는 변화 가능성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자신이 텅 빈 컴퓨터 스크린을 마주 앉아 세상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해도 최고의 작품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왕 감독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왕가위 감독은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어내도록 줄기차게 기다리며 그를 압박하는 스탭과 배우가(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반부 작업자와 영화제 주최자들까지) 필요한 것인 셈이다. 그게 바로 왕가위인 것이다.

왕가위에게 필요한 것 둘, 충성심 증후군의 희생자들

왕가위는 또한 그가 마음대로 조합해낼 수 있는 충실한 작업의 반려자들을 필요로 하는 감독이다. 홍콩의 제톤 필름 사무실에는(이 영화사는 대만과 상하이에도 각각 ‘지사’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왕 감독의 작품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정상적인 삶의 전체를 희생할 수 있는 스탭들로 가득하다. 중화권 최고의 프로덕션디자이너이자 편집기사인 장숙평의 경우를 살펴보자(그는 왕 감독과 마찬가지로 상하이 출신으로 홍콩에서 자랐다). 그는 왕가위의 형제 아닌 형제이자 그의 모든 예술적 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다. 왕가위 감독의 지칠 줄 모르는 오른팔 재키 팡(彭綺華)의 경우 한때 왕 감독의 라인 프로듀서로 일했으나 지금은 제톤 필름의 매니지먼트 사업을 총괄하면서 회사가 재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끔 수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왕 감독의 새로운 라인프로듀서 앨리스 찬은 왕 감독이 ‘던져주는’ 모든 촬영과 후반작업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해법을 제시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도 그들만큼이나 헌신적인 어시스턴트들이 왕 감독의 희망 사항과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24시간 준비 태세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필자는 이들이 왕가위 감독의 우유부단함이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비상식적인 변경을 결정하는 습관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이들이 감독에 대해서 신뢰를 저버리거나 당면한 위기 상황에 대해서 필요한 해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필자 스스로도 이러한 ‘충성심 증후군’의 희생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한 주간의 전주영화제 기간 동안 매일 한 시간 이상을 보고 싶은 영화의 상영 시간까지 놓쳐가면서 자막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교훈 셋! 왕가위는 파스빈더나 앤디 워홀과 비슷하게 일종의 ‘흡혈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려 섞인 주술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다. 면밀히 살펴보면 왕 감독과 그의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스탭들과 배우들 사이에는 일종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마저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각 개인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90년대의 대부분을 함께 작업하면서 왕가위 감독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에게 일상적으로 “이것 봐, 도일. 이게 정말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최고야?”라며 면박을 주곤했다. 마치 도일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듯한 의미의 이 비아냥은 언제나 도일이 새로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더 나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도록 채찍질했다. 이 과정이 크리스토퍼 도일이 재능있는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촬영감독이 된 경위와 왜 도일의 최고의 작품들은 언제나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인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부연하자면 왕가위 감독 이외에 크리스토퍼 도일을 이같이 절묘하게 배분된 애정과 모욕감의 뒤섞인 배려를 통해 제대로 다루었던 유일한 경우는 타이 영화감독 펜엑 라타나루앙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펜엑 감독의 작품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Last Life in the Universe)이 <해피 투게더> 이후 도일의 최고의 작품인 이유일 것이다.

<화양연화>의 덫은 계속된다

지난 4월 제톤 필름의 작업실에서 예비 편집된 장면들을 살펴보면서 필자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분량들이 나의 검토를 위해 넘어올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왕가위를 슬쩍 떠보았다. 얼마나 많은 자막작업상의 문제들이 남아 있는가를 추측해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본 한 장면 중에서 마치 <화양연화>에서 초우모완이 그랬던 것처럼 미스 바이는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떠나간다. 나는 물었다. “이 영화 속에서 나중에 쟤가 다시 돌아오는 거야? 그럼 쟤가 나오는 장면이 나중에 더 있겠네?” 왕가위의 대답은 “그건 다음 영화에서!”였다. 맙소사, 우리는 4년에 한회씩 나오는 연속극의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물론 그는 농담을 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다시 부연하건대, 왕가위와 함께라면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다….

글 토니 레인즈/ 영화평론가·번역 권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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