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빌> 시리즈로 최고의 경지 이룩한 우마 서먼
“자, 스케줄대로 진행되고 있겠죠? 1월15일까지 당신이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말이죠….” 2001년 겨울, 우마 서먼은 이상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한테 자꾸 이런 식으로 부담주면, 약속을 깨버리는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빵을 굽는 게 아니에요. 아기를 가졌다구요.” <킬 빌>의 프로듀서 로렌스 벤더는 순간, 움찔했다. 우마 서먼이 <킬 빌>의 히로인일 뿐 아니라 아이의 출산을 앞둔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우마 서먼은 하루의 오차도 없이 예정대로 둘째아이를 순산했다. 그리고 정확히 8주 뒤에 부기가 채 빠지지 않은 몸으로, 1년 남짓 자기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타란티노와 원화평에게로 달려갔다.
우마 서먼에 의한, 우마 서먼을 위한 <킬 빌>
알려진 대로 <킬 빌>은 ‘우마 서먼의, 우마 서먼에 의한, 우마 서먼을 위한 영화’다. 10년 전, <펄프 픽션>의 촬영장에서 타란티노는 우마 서먼과 ‘여성복수극’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하다가 <킬 빌>의 캐릭터와 스토리 윤곽을 잡았지만, <재키 브라운>을 먼저 영화화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2000년 한 파티에서 재회한 우마 서먼에게 타란티노는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에 <킬 빌>의 완고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나리오가 222쪽으로 불어나는 바람에 ‘생일선물’을 제때 전달하지 못했던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타란티노는 기다리다 지쳐 아기를 가져버린 우마 서먼의 출산과 산후 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닌 다른 배우를 기용하고, 조셉 폰 스턴버그가 <모로코>에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아닌 다른 배우를 썼다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나. 나는 우마 서먼이 <킬 빌>에 나온다면 얼마나 근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배우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가 옳았다. <킬 빌>을 보면서, 다른 여배우들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근육질의 긴 팔다리를 힘차게 휘두르는 ‘여전사’ 우마 서먼의 액션은 상당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프로 킬러로서 브라이드의 복잡한 내면이 좀더 친절하게 설명되는 2부에 이르러서는 우마 서먼이라는 배우의 ‘깊이’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브라이드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단순한 가학 본능이 아니라 ‘정의와 속죄’의 차원이었다는 사실을, 그 비장미와 결기를, 우마 서먼은 ‘냉정과 열정’을 오가며 능란하게 전달해낸다. “암사자는 새끼를 찾았고, 정글은 평화로워졌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 했는지 따위를 따져물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쯤되면, <킬 빌>의 촬영장에서 우마 서먼이 타란티노에게 자기고백처럼 던졌다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다른 영화를 찍을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왜 당신 영화에 나오면 내가 더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마 서먼처럼 우리도, 그것이 알고 싶다.
타란티노-우마 서먼의 첫번째 조우 <펄프 픽션>열여섯에 데뷔한 우마 서먼의 커리어는 조울증 환자의 바이오 리듬처럼 등락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두번의 정점에는 어김없이 타란티노가 있었다. 본래 우마 서먼은 고독하고 신비로운 여왕 그레타 가르보와 잊을 수 없는 각선미의 여신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계보를 잇는 ‘여신과’의 배우였다. 스웨덴과 독일계 혈통으로서 모델로 활동했던 어머니,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한 아버지, 인도 전설에 전해내려오는 빛과 아름다움의 여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우마 서먼의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웠다. <바론의 대모험>이나 <위험한 관계> 등의 초기작에서 선보인 천상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감독들을 달뜨게 만들었고,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최종분석> <형사 매드독>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그녀의 성적 매력을 전시하려는 영화들에 불려다녔다. 테리 길리엄, 스티븐 프리어즈, 존 부어맨 등의 ‘한 예술’하는 영화에 연달아 출연하다보니, “지적인 남자들의 섹스 심벌”이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그러던 그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요부 캐릭터를 졸업하게 된 것은 타란티노와 <펄프 픽션>을 만나면서부터다. <펄프 픽션>에서 검은 생머리 가발(고다르 초기작의 안나 카리나처럼!)을 쓰고 나타난 우마 서먼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여전히 섹스어필했지만, 분명히 전과 달랐다. 남편의 부재 중에 만난 남편의 부하(존 트래볼타)를 매혹하고 또 그에게 매혹당하지만, 트위스트 춤판과 약물 소동과 썰렁한 농담으로 그를 떠나보내던 그녀의 모습은 묘한 울림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생기있고 입체적인 캐릭터. 그리고 우마 서먼은 난생처음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도 하는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 할리우드 여전사의 계보
시고니 위버에서 안젤리나 졸리까지
<글로리아>의 지나 롤랜드로 시작된 할리우드 여전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초기의 여전사들이 총을 들거나 주먹을 휘두른 이유는 대개 ‘모성’ 때문이었다. <글로리아>의 글로리아는 친구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옛 연인인 마피아 보스에 도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자기 방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도 2편에 이르러선 아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는 삭발한 머리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낯설고 강렬한 임팩트를 전하며, 외모와 분위기에서부터 기존의 여전사와 차별화됐던 인물. 평범한 여성에서, 모성을 겸비한 여전사로, 순교를 택하는 성녀로, 다시 정체성 혼란에 빠진 주변인으로, 매번 캐릭터가 달라졌다.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는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고통받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등 여러 얼굴을 보였고, 총격전과 육탄전에 모두 강한 모습이었다. ‘라라 크로프트’와 ‘미녀 삼총사’로 대표되는 이후의 여전사들은 ‘모성’을 거세한 뒤에, SF와 판타지어드벤처로 무대를 옮겨왔다.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미녀 삼총사>의 세 여인,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다크엔젤>의 제시카 알바가 그들. 하나같이 가죽 소재의 타이트한 의상을 즐겨입고, 섹시함을 과시했다.
그에 비하면 <킬 빌>의 우마 서먼은 아날로그적인 파이터다. 쿵후, 검술, 몸싸움에 모두 능하고, 총보다는 사무라이 검을 즐겨쓰며, 트레이닝복이나 청바지처럼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의상을 입었다. 기존 여전사들에 비해 자비심과 동정심이 부족해 섬뜩해 보이는 순간들도 있지만, 역시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라라 크로프트와 브라이드를 비교하는 이들에 대한 우마 서먼의 일갈. “라라 크로프트의 머릿속엔 섹스 생각이 있다. 브라이드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다른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 수가 없다. 브라이드의 여정은 ‘모험’이라 부를 수 없다. 그만큼 절박하단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