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 픽션> 이후, 우마 서먼은 멕 라이언과 줄리아 로버츠를 잇는 로맨틱코미디의 히로인으로 올라설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답긴 하되 친근하거나 따뜻한 느낌이 없는 우마 서먼은 이 방면에서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뷰티풀 걸스>에 출연했을 때는 내털리 포트먼의 그늘에 가려졌고,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에서는 ‘블론드 미인은 멍청하다’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조형된 캐릭터를 연기했다. 의기소침해진 우마 서먼은 이어 블록버스터를 공략하는 ‘악수’를 뒀다.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최악의 영화 후보에 오르내리는 <배트맨 & 로빈> 그리고 <어벤저>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배우도 이렇게 우스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 자체는 가상했지만, 영화의 함량이 그의 용단을 받쳐주지 못했다. 할로윈에나 어울릴 법한 기괴한 분장의 포이즌 아이비(<배트맨 & 로빈>), 다양한 가죽 의상으로 “영화보다 더 초현실적인 것은 우마 서먼의 몸매”라는 칭찬만을 얻어낸 닥터 필(<어벤저>)과 함께, 우마 서먼도 몰락하는 듯싶었다.
완벽한 우성인자를 지닌 ‘맞춤’ 캐릭터로 출연한 <가타카>에서 에단 호크를 만나 가정을 꾸린 뒤, 우마 서먼의 관심은 독립영화와 코스튬드라마로 옮겨갔다. “나는 주력 분야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일찍 시작했고, 그런 만큼 탐험과 개발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일찌감치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서 그것만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어벤저>는 내가 여배우로서 가졌던 초심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배우를 부각시킬 줄 아는 감독들, 그리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따지게 된 것이다. 코미디와 할리우드 대작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우마 서먼의 새로운 선택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그는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출연작들은 대부분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우마 서먼은 타란티노를 만났다.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느 감독과 다르지 않았다. “카메론 디아즈와 우마 서먼은 아름답다. 카메론 디아즈 스타일의 여성은 드물긴 해도 곁에 존재하긴 한다. 나는 그런 미모와 이미지를 가진 소녀들과는 같이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우마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다. 그녀는 여신의 영역에서 가르보와 디트리히의 대를 잇고 있다.” 결정적으로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에게 각별한 감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자기의 ‘여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녀를 데리고 만들고자 한 영화가 매우 기발했기 때문이다. “우마 서먼의 긴 근육질 다리와 금발, 그녀가 선보일 동물적인 쿵후 동작과 사무라이 검술을 떠올리며 <킬 빌>의 시나리오 쓰는 내내 흥분했다.”
<킬 빌> 이전에는 그 누구도 우마 서먼에게서 ‘액션 스타’로서의 자질을 엿보지 못했다. 사실 그런 가능성이란 애초 없었다. 폭력적인 영화는 보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여린 심장을 지닌데다 불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분노나 증오는 억누르는 게 능사라고 배운 우마 서먼이 출연을 결정한 것은 “나를 배우로서 가장 잘 아는 감독”인 타란티노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브라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고된 훈련을 마친 밤마다 우마 서먼은 욕조에 앉아 울었다. “영화에서 나는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았고, 강간도 여러 번 당했고, 수없이 두들겨맞았으며, 사무라이 검에 베이고,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킬 우마’로 지었어야 했다.” 하긴, 그것이 타란티노다운 애정 표현이다. 자기가 여신으로 숭배하던 여배우를 먼지 구덩이에 밀어넣고 피칠갑을 하는 일. <펄프 픽션>에서도 코카인 과용으로 빈사 상태에 빠진 우마 서먼의 가슴에 아드레날린 주사바늘을 내리꽂았던 그가 아닌가.
Q & U, 완성의 경지를 창조하다
<킬 빌>로 인해 우마 서먼은 강해졌다. 우마 서먼은 그 힘의 비결을 ‘모성’에 돌린다. “나는 내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아기를 낳고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랑에도 능력에도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모든 액션을 대역없이 소화한 유일한 액션 히로인이라는 자신감은 한동안 우마 서먼을 든든히 지탱해줄 것이다. <킬 빌>로 인한 변화가 다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촬영 중에 흘러나온 타란티노와의 염문설에 욱해서 바람을 피웠다는 남편 에단 호크와는 얼마 전 남남이 됐다. 그리고 <킬 빌>을 준비하며 타란티노의 권유로 보았던 <첩혈쌍웅>에 반해 오우삼의 SF액션 <페이첵>에 출연하기도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쩌면 우마 서먼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킬 빌> 같은 ‘완성’의 경지를 경험하는 배우는 흔치 않다. <킬 빌>의 말미에 큼지막하게 박힌 엔딩 크레딧 “캐릭터 원안 Q(쿠엔틴 타란티노) & U(우마 서먼)”는 영화사를 바꾼 세기의 만남들을 연상시킨다.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후네 도시로, 조셉 폰 스턴버그와 마를레네 디트리히, 세르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마 서먼이 타란티노를 만난 것은,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만난 것은, 우리가 이들의 만남을 목도했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이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 우마 서먼에 대한 말, 말, 말
비비안 리 혹은 여신 혹은 장난꾸러기 금발 미녀
제임스 아이보리 ·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를 연상시킨다. 사랑과 질투와 집착 같은 복잡한 여성의 감정을 잘 체현할 수 있는 배우다. 그것은 그녀가 할리우드에서 충분히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워드 엔드>에 출연할 당시의 에마 톰슨처럼, 우마 서먼은 나이보다 성숙하고 재능있고 미더운 배우다. (<골든 볼>에 우마 서먼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리처드 기어 · 왜 네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 거니? (어린 우마 서먼이 아버지의 친구인 리처드 기어에게 처음으로 배우의 꿈을 털어놓았을 때 들은 말)
조엘 슈마허 · 그녀는 여신들처럼 영원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면서도, 어리석게 굴 수 있고 웃길 수 있는 캐릭터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었을 때 루마니아 여왕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장난꾸러기 사내애처럼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여배우가 우마 서먼이다. (<배트맨 & 로빈>의 포이즌 아이비가 우마 서먼의 재기로 빛났다고 말하면서)
에단 호크 · 그녀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친절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우마 서먼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쿠엔틴 타란티노 · “이렇게 예쁜 금발 본 적이 있나?”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거지.” “금발치곤 똑똑하다는 얘기였겠지.” “엄마가 세상에서 젤 예뻐.” “넌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야.” (<킬 빌>에서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염두에 두고 쓴 브라이드에 대한 대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