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어공주>가 이룬 새로운 모녀관계 [1]
2004-06-22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내 어머니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판타지는 어떤 것일까? <반지의 제왕>처럼 엄청난 스펙터클? <피터팬>처럼 아름답고 슬픈 동화?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같은 마술적인 세계? 물론 이런 얘기는 마음의 풍요를 일구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지만, 당신의 일상까지 파고들긴 어려울 것이다. 6월30일 개봉하는 영화 <인어공주>는 당신이 매일 접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다. 오랫동안 남자들의 이야기만 봐야 했던 여성관객에겐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는 점이 매력적일 것이고, 그냥 볼 만한 영화를 찾는 이들에겐 전도연, 박해일, 고두심, 세 배우의 연기가 흥미로울 것이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걸작은 아니지만 <인어공주>는 대중영화가 갖춰야 할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다. 진화하는 대중영화적 상상력의 현주소인 <인어공주>를 미리 뜯어본다.

“내 어머니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에 부제를 단다면 이런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영화 <인어공주>는 어머니의 젊은 날과 만나는 영화다. 어머니가 처음 아버지를 만나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던 그때, 그것은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시간에 속한다. 당연히 내가 그들의 사랑을 목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적 상상력은 그런 불가능에서 비롯된다. <백 투 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인어공주>는 과거와 현재의 기묘한 만남을 성립시킨다. 가출한 병든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의 고향에 당도하자 그곳에 20살 적 어머니와 23살 적 아버지가 있다. 어머니는 우체부인 아버지를 짝사랑하는 해녀였고 그들은 동화 같은 사랑을 나눈다. 현실에선 세월에 씻겨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여행, 잠시 동안이지만 <인어공주>의 여정에는 마음에 찌든 때를 벗겨내는 상쾌함이 있다.

어머니의 과거를 통해 삶을 긍정하게 되는 딸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인어공주>는 장이모의 <집으로 가는 길>과 흡사한 면이 있다(박흥식 감독은 <집으로 가는 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어머니는 새로 부임한 젊은 교사를 짝사랑하는 순박한 시골처녀였다. <인어공주>에서 젊은 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뒤쫓는 장면은 <집으로 가는 길>과 거의 똑같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화자가 아들이냐 딸이냐는 차이도 있지만 결정적인 대목은 <인어공주>가 그리는 현실이다. 장이모의 영화에서 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집으로 가는 길>은 전적으로 과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그리워하는 영화였다. <인어공주>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 현재와 과거는 동등하다. 과거가 눈부시게 화사할수록 현재는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옹색하다. <인어공주>의 도입부는 상징적이다. 해외여행을 앞둔 딸이 뉴질랜드의 멋진 해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 속 바다가 넘실대고 수면 아래 자맥질하는 해녀들이 보인다. 카메라가 다시 빠지면 대중목욕탕 욕조에서 웬 중년 여인이 얼굴을 내밀고 “퉤” 하며 냅다 침을 뱉는다. 억센 아줌마의 풍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그녀, 남의 몸에서 때를 미는 일로 가족을 부양하는 여자, 현실의 어머니는 그렇다. 수십년간 염치나 교양하고 담을 쌓고 살아온 여인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웅변한다. 누구도 어머니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단돈 400원 때문에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는 아줌마가 내 어머니라도 말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된 건 아버지 탓일까? <인어공주>에서 아버지는 유령 같은 존재다. 빚지고 죽어버린 사람의 장례식장에 들어가 길길이 소리치며 싸우는 것이 어머니의 몫인 반면 아버지는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 인물이다. 안방 구석에 앉아 혼자 TV만 보며 붙박이 가구처럼 지내는 아버지, 빚보증 잘못 서서 전 재산을 날려버린 아버지, 그는 <효자동 이발사>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현대사에 상처받은 인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살아서도 시체처럼 지냈던 늙은 아버지는 죽을 날을 받아놓고 집을 나선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옛날로 돌아가 숨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난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어.” 딸은 화가 치밀어 이렇게 소리친다. 잔소리하고 사고치는 부모만 없다면 하루가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딸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언한다. “난 결코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 <인어공주>에서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살기 싫은 자식 세대의 선택은 이것이다. “학교는 나중에 가도 된다”고, “여행은 나중에 가도 된다”고 그렇게 되뇌며 참고 살았던 결과가 지금처럼 삭막한 현실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교육을 받으러 가기로 한 뉴질랜드는 딸에게 현실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을 것이다.

그런데 딸은 뉴질랜드로 가지 않고 과거로 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애하던 시절, 푸른 바다와 따뜻한 햇살이 넘실대는 곳에 도착한다. <인어공주>의 판타지는 여기부터다. 그들의 사랑은 눈물겹게 순수하고 싱그럽다. 시사회의 관객 반응을 보면 울고 웃는 감정적 소용돌이가 발생하는 것이 이 대목이다. 그러나 다소 과격하게 말한다면 <인어공주>에서 판타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판타지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냐고 물을 때만 의미가 있다. <인어공주>의 판타지는 강퍅하고 메마른 현실이 잉태한 자식이다. 불행의 탯줄을 끊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예쁜 웃음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백일몽이다. 딸은 젊은 시절 부모를 만나지만 아무것도 바꿔놓지 않는다. 심지어 아버지는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낯선 여자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온전히 딸의 머리에서 나온 꿈이라면 납득할 만하다. 어떤 현실도 바꾸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딸의 심리적 여행, <인어공주>는 그렇게 되돌아간 원점에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배운다. 노스탤지어에 빠지거나 가르치려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이 지점이 <인어공주>의 가장 빛나는 성취이다. 여기서 전도연, 박해일, 고두심의 나무랄 데 없는 조화는 단지 기술적인 탁월함에 빚진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잘한 연기냐 아니냐를 논외로 쳐도 적절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들이 적재적소에서 발휘하는 흡인력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대중영화의 흡인력으로 모녀관계를 조망하다

물론 <인어공주>는 만인의 칭찬을 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못난 아버지가 젊은 시절 보여주는 멋진 모습은 여성관객의 욕망을 위해 조작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상상이지만 어머니의 현재와 과거가 일치하는 정도에 비하면 불일치가 심하다는 느낌을 가질 만하다. 이는 <인어공주>를 거꾸로 해석하는 길도 열어놓고 있다. <인어공주>의 매력이 강인한 어머니에 대한 호감보다 신화화된 젊은 날의 아버지 때문이라는 역설 말이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인어공주>는 과거와 현재에서 각기 하나의 단면을 끄집어내 대비시키는 데 상실의 정서를 담기엔 그 그릇이 작아 보인다. 관점에 따라 판타지를 제외한 현실 묘사 부분만 훌륭하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감독의 영화적 야심이 다소 소박한 탓일 것이다.

분명 <인어공주>는 작가의 세계관이 궁금해 안달할 영화는 아니다. 박흥식 감독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인어공주>의 현실장면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만으로 2시간을 채울 자신은 없다. 나한테 그런 능력은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대중영화가 갖춰야 할 미덕을 잊지 않는 감독이다. <인어공주>는 화려하거나 완벽하진 않지만 진심이 전해져 마음을 울리는 영화다. 늦된 아이였던 한국영화는 이제 비로소 딸과 어머니의 대화에 귀기울일 준비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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