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어공주>가 이룬 새로운 모녀관계 [2]
2004-06-22
사진 : 오계옥
정리 : 박혜명

<인어공주>는 박흥식 감독이 이창동 감독에게 제안을 받아 연출하게 된 영화다. 공모전에 당선된 시놉시스를 보고 이창동 감독이 “이건 너한테 어울린다”며 해보라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그건 이창동 감독이 박흥식 감독의 영화적 취향과 개인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부모처럼 그의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서서 재산을 날렸고 어머니는 강인한 생활력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 몇몇 대사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을 안 만들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 그 예다. 하지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데뷔한 그는 <인어공주>를 거치면서 또 다른 인생계획을 설계했다. 다음달이면 그에겐 정말로 아내가 생긴다. <인어공주>의 첫 시사회가 열린 다음날인 6월10일 그를 만났다.

-시사회 반응을 보니까 여성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좋은 것 같다.

=유복한 집안 딸들은 공감을 잘 못할 것 같고, 좀 못사는 집안 딸들은 공감할 수 있겠지.

-딸이 젊은 시절 어머니를 만난다는 설정이 다소 황당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로 보니까 현실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주인공의 꿈처럼 보였다. 누구나 부모를 보면서 내 부모도 그런 때가 있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는 상상 말이다.

=어제 시사 끝나고 누군가 물어보더라. 판타지로 들어가고 나오는 부분을 왜 명확히 하지 않았느냐고. 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이건 아주 사실적인 판타지가 아니다. SF도 아니고 시간여행도 아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건 딸이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보는 판타지였다. 엄마 아빠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모습을 찾아들어가는. 그렇다면 판타지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했다.

-<인어공주>는 고두심이란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거꾸로 이용하는 영화다. 본래 착한 어머니, 다정한 어머니로 각인된 배우를, 욕 잘하고 함부로 침뱉는 어머니로 바꿔놓았다. 고두심을 캐스팅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도입부 장면인데, 엄마가 목욕탕 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스윽 나온다. 근데 그러면서 팬티 뒤쪽을 이렇게 탁탁 터시더라. 그건 배우 본인이 표현한 디테일이다. 그냥 걸어나가도 되는 건데. 영화를 대하는 느낌이 되게 좋다고 생각했다. 배타고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눈을 슥 감고 있는데, 그 느낌이 이 영화를 지탱해주는 무게감 같았다. 나중에 편집해놓고 보니까 나영이 판타지를 지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부분에서 제일 뭉클했다. 진짜 프로다. 남자 스탭들 다 있는 데서 옷 벗으면서도 나가라고 안 하시더라.

-1인2역이란 설정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전도연이란 배우를 생각하면서 1인2역을 떠올렸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니었다. 이 영화를 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갈등을 심하게 하고 있을 때, 김태용 감독을 불러다가 물어봤다. 내용을 얘기해줬더니, 내용 참 좋다면서 엄마하고 딸을 1인2역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그러더라. 그걸 듣고 생각해보니까, 엄마하고 딸은 닮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내 여동생 사진을 봐도 엄마 젊었을 때랑 거의 똑같다. 1인2역으로 엄마와 딸의 동질감을 더 만들어낼 수 있을 것도 같고, 똑같은 사람을 같이 놓고 본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판타지의 재미도 증폭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태용 감독이 굉장한 아이디어를 준 거다.

-저번 인터뷰 때 전도연이 ‘자기 연기의 종합편 같을 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1인2역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한 걸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봤던 전도연의 모습이 영화 속 여기저기에 다 숨어 있는 것 같더라.

=영화 찍으면서 전도연이 연순을 연기할 때 너무너무 신나했다. 캐릭터를 명확히 알겠다며. 미키 마우스가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새카만 애가 주근깨 붙이고 눈 반짝반짝 빛내면서 다녔다. 작은 디테일 하나를 얘기해주면 그보다 훨씬 많은 디테일을 표현해주고. 근데 나영이는 잘 모르겠다면서 어떤 사람이냐고 계속 물어보기에 그냥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좀 못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1인2역은 정말 힘든 연기다. 앞에 테니스공 하나 놓고 감정 집어넣고 대화의 타이밍 맞추고. 그런데 전도연은 시선까지도 완벽하게 맞췄다. 난 앵글만 맞춰주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랬다. 전도연은 본인에게 맡겨주면 굉장히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라서 그걸 통제하거나 막으면 연기가 막힌다. 흐름만 잘 조성해주면 된다. 전도연은 순발력도 뛰어나고 언어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도 뛰어나다. 감정 표현을 정말 잘한다.

-판타지 장면에 들어 있는 멜로드라마는 <집으로 가는 길>이나 <집으로…>를 연상시킨다.

=<인어공주> 하면서 <일 포스티노> <집으로 가는 길> <내 책상서랍 속의 동화> <그랑 블루> 등 여러 가지 영화들을 연상했고, 그런 영화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하든 그것이 내 영화 속에 녹아들게 되면 새롭게 살려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부정 안 한다.

-시사회 때 재미있었던 장면 중 하나가 박해일이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하니까 여자들이 꺄아 탄식을 하는 거였다. 진국이가 그냥 허름한 우체부가 아니라 백마탄 왕자님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마음도 착하고 뭐든지 다 해줄 것 같고.

=그런 현상은 영화 가편집본 놓고 일반인 40명 정도를 불러서 모니터 시사할 때도 나왔던 반응이다. 박해일은 사람을 설득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 목소리가 굉장히 좋다. 그래서 캐스팅할 때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진국이란 역할이 어떻게 보면 매력도 없고 무난하고 비중도 크지 않지만, 당신이 이 캐릭터를 설득시켜줬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묘하게 <인어공주>는 또 다른 상업적 매력을 갖게 됐다. 백마탄 왕자님을 만나는 것 같은 판타지 말이다.

=나도 상상못했던 거다. 이 영화의 드라마는 그렇게 극적이거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다. 심심한 영화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반응을 보니까 내가 배우의 매력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켜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런 건가 생각도 들고 하더라.

-초반 시나리오에는 현실 부분이 더 강했다고 했는데, 판타지의 비중을 넓힌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을 다루고 있는 게 영화 속의 1장인데, 그 1장의 현실은 참 보기 싫다. 주변에 널려 있는 모습이지만. 나는 정체성은 분명히 하고 싶다. 난 명확하게 상업영화감독이고, 이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내가 작가영화나 예술영화 범주에 속하는 영화로 만들 것도 아니고 그런 재주도 없다. 한계도 느낀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오즈 야스지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같은 감독을 좋아하지만 정작 그런 영화는 내가 못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가 현실만을 다루면 내 능력 갖고는 도저히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대신 나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재미를 알고 표현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안다. 그래서 로맨스가 들어 있는 판타지의 비중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보면 현실이 40%고 판타지가 60%다. 대중이 재미있어 할 부분도 판타지쪽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딱 보면 안다. 판타지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고두심 선배가 나오니까 재밌게 보다가도 금방 지루해한다. 그렇지만 엄마의 캐릭터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지켰다. 시나리오상으로 36신이 있었는데 8신 자르고 나머지는 그대로 갔다. 개인적으로는 1장과 3장이 더 좋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1장과 3장에 많이 들어가 있다. 내가 정진을 해서 좀더 나아지면, 그땐 그렇게 현실만 갖고 말하는 영화를 해봐야지. (웃음) 나도 가짜보단 진짜가 좋다. 판타지는 가짜잖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굉장히 분명한 태도를 갖고 있다.

=잘 아는 친구한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얘기하다보니까 그 친구가 ‘니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다 아카데미 외국어상이네’ 그러더라. 그런 영화들이 인본주의, 휴머니즘, 감상주의 그런 것들이잖나. 그래서 아, 내 정체성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약간 충격을 먹었다.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속성이 그렇다고 하면. (망설이다가) 내가 가끔씩 생각하는 게 뭐냐면, 내가 제도권 안에 있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확실한데, 굉장히 상업적이다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영화를 다들 재밌게 보고 감동적이게 보고 그랬다는 게 상업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자기 주변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공감하길 바라는 거다. 순전히 상업적인 방식으로 감동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은 거다. 내 능력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스타를 기용해서 드라마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 되는 거다. 그렇지만 거기서 끌어내는 감정은 진실한 거다.

인터뷰 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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