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어공주>가 이룬 새로운 모녀관계 [3]
2004-06-22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경대 속에 친정어머니가 사신다”는 말이 있다. 호러 버전이 아니라 홈드라마 버전이다. 늙을수록 토종이 된다고 갈수록 엄마 같은 짓을 하는 자신에 흠칫 놀랄 때가 많다. 모녀관계는 부자관계보다 직접적이다. 친자 확인이라는 말은 있어도 친모 확인이라는 말은 없듯이, 부자관계는 여자를 경유하고 사회적 승인을 요하는 사회적 관계인 데 반해, 모녀관계는 그런 것 없이도 명확한 자연적 관계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부자관계가 오랫동안 ‘사회적/역사적 친부 찾기’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고찰되어온 반면 모녀관계에 대한 고찰은 적었다. 있다 해도 특수 직업군에 해당되는 무녀, 창녀, 궁녀, 해녀 등이 고작이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 해당되는 ‘주부’가 전혀 탈역사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어머니와 딸, 그 애증과 갈등의 관계

<클래식>
<가을햇살>

‘어머니와 딸’은 외부에서 보았을 땐 동질적이지만, 내부를 보면 한없는 애증과 갈등의 관계이다. 그녀들을 동질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적 시각은 영화 <클래식>에 잘 드러나 있다. 예쁜 여자가 사랑을 하여 딸을 낳는다. 딸은 엄마의 젊었을 적 모습과 똑같이 아름답다. 엄마는 어떻게 망가졌는지 절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 상상된다. 그녀들은 한 무더기의 꽃이다. 심지어 대를 이은 사랑을 한다. 그들 사이에는 세대간, 개체간 갈등이 없다. 딸은 엄마의 사랑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관객은 그녀들을 ‘같은 종’으로 이해한다. 마치 세상에는 ‘미녀’라는 꽃식물이 있어서, 개체간 차이는 없고, 그것들이 세대교번을 통하든 말든 여전히 ‘미녀’라는 동질성을 지닌다는 식이다. ‘미녀’는 욕망의 대상이다. 에로적 욕망이든, 멜로적 욕망이든. 엄마든 딸이든 ‘미녀’라는 꽃식물과에 속하면 모두 사랑해주겠다, 아니 ‘세트로 사랑해주겠다’는 남성들의 추파는 실로 대단하다. 오즈 야스지로의 <가을 햇살>(1960)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과부 어머니와 딸을 욕망하는 남자들의 유구한 시선이 나온다. 그녀들 사이는 잠시 교란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좇지 않고 딸을 위해 혼자 남는다. 과연 꽃식물답다.

그러나 ‘동질적이고 아름다운 모녀’는 오이디푸스적 부자갈등에 진력이 난 남자들이 그리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녀들도 끊임없이 투쟁한다. 남근선망으로 남자를 두고 싸운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남자들과는 무관하게 엄마는 딸들에게 넘어서야 할 산, 자칫하면 빠지는 늪이다. 엄마는 딸을 보살핌이라는 권력으로 장악할 뿐 아니라, 딸들에게 자신의 근원이자 미래를 비추고, 그만 안온하게 퍼 질러지기를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 외치는 딸들은 많지만, 막상 딸이 엄마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어머니라는 질곡은, 윤정모 소설 <고삐>에 나오는 것처럼 아예 신체적/현실적 관계인 양공주 엄마와는 절연을 하고, 사회적/관념적 관계인 빨치산 아버지를 자신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선언’ 따위로 극복되지 않는다. ‘절교선언’은 극복의 제스처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극복은 아닌 것이다. 많은 딸들이 <타이타닉>에서처럼 기회를 틈타 엄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피아니스트>에서처럼 ‘욕하면서 같이 늙어가는 모녀’로 징그럽게 포박되거나, <령>에서 암시하듯이 정당한 내 자리를 놓고도 몸주(?)를 자처하는 엄마와 기싸움하기 일쑤이다.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의 사이비 경쾌함은 너무 먼 미래이다.

<마요네즈> vs <향기로운 꽃>, 의존적인 엄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마요네즈><령><엄마는 여자를 좋아해>(왼쪽부터)

애증의 모녀관계를 다룬 영화로 <마요네즈>를 들 수 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존재,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를 그렸다는 점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소설을 영화화하였지만 영화는 주목받지 못했다. 감독은 자서전을 대필해주던 주인공처럼 소설을 영화로 대필하는 데 급급했는지, <마요네즈>는 영화라기보다는 ‘연극 생중계’ 혹은 〈TV, 책을 말하다>의 삽입화면 같다. 영화적 실패는 접어두고 영화가 제기했던 문제를 떠올려보자. 어머니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조르고 징징대는 인물이다. 게다가 자기 현시적이고 연극적이다. 타인에게 의존적이면서 타인을 조정하려드는 어머니를 끔찍하게 여기는 딸 역시 히스테리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엄마의 일관된 히스테리에 딸은 단발적 짜증으로 대응할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딸이 엄마를 미워하는 이유는 병든 아버지를 홀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예쁜 엄마를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러나 엄마가 병든 아빠를 학대하면서 머리에는 마요네즈를 처바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돌연 엄마를 미워하게 된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 ‘성적 매력 가득한 여성성’에 대한 동경이 ‘타인을 보살피는 모성성’과 정면 충돌하는 지점에서 애증의 분열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사랑 받으려고만 하는 엄마를 미워함으로써 극복하고(“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봐 겁나”) 대단한 모성성, 혹은 대안을 추구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병든 에미한테 애 맡기고, 뭣하러(남의 자서전 대필이나 하러) 쏘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딸 역시 자기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영화는 단지 여성성과 모성성의 분열을 보여줄 뿐, 딸이 어떻게 어머니를 극복해야 하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영화 <향기로운 꽃>(Koge, 기노시타 게이스케, 1964)에는 의존적이면서 성적 매력 가득한 엄마와 자립적이면서 타인을 보살피는 모성을 갖춘 딸이 나온다. 상류계급으로 태어났지만 예쁘고 화냥기 있는 엄마 탓에 게이샤로 팔린 어린 딸이 창녀 엄마를 늙도록 봉양하고 씨 다른 동생의 아들을 키우는 이야기이다. 딸은 엄마의 성향을 미워하고 본받지 않고자 하지만 엄마를 내치지는 않는다. 세번이나 결혼하고 여러 자식을 낳아 팽개친 엄마 탓에 딸은 결혼도 못하고 애도 낳아보지 못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부모와 애인의 제사를 챙기고 조카를 품는다. 그녀 역시 성녀가 아니어서 엄마와 끊임없이 갈등하며 애증의 골은 깊고 지난하다. 그녀는 ‘사랑받는 여자’인 엄마와 달리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녀는 자기 노동을 딛고 가난과 지진과 폭격을 이기며 ‘엄마 닮은 딸 되기’의 숙명을 이겨낸다. ‘스칼렛 오하라’처럼 강한 여자가 되어, 약한 엄마를 보듬는 그녀는 진정으로 엄마를 극복한다.

‘노동하는 인간’인 어머니 그리고 딸들

그러면 ‘노동하는 인간’을 어머니로 둔 딸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까? 박완서 소설 <도시의 흉년>(1979)에는 포주 출신으로 동대문 거상이 된 어머니가 나온다. 물질만능주의로 무장한 어머니에 질린 아버지와 쌍둥이 오빠는 판자촌에서 순정적인 사랑을 한다. 쌍둥이 딸은 엄마의 ‘돈의 철학’을 대변하는 언니의 정략결혼에 몸바쳐 ‘기-스’를 내고, 운동권 야학교사를 따라간다. 이 소설은 부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개발독재 시대를 악으로 깡으로 살았던 어머니를 회의하며 ‘다른 삶을 꿈꾸는 딸’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경제권을 쥔 엄마와 바지저고리 아버지, 그리고 쌍둥이 남매의 삶은 TV드라마 <아들과 딸>(1992)에서 선명한 대비로 재현된다. 70년대를 배경으로, 딸은 가르쳐봐야 소용없다며 혹독하게 차별하던 어머니를 떠나 딸은 힘겹게 독립한다. 마마보이로 길러져 부모의 기대를 위해 사는 쌍둥이 남동생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마요네즈>에서와 다르게!), 자기 삶을 글로 쓴다. 그녀는 가족과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용한다. 그녀는 어머니라는 질곡을 극복한 것이다. 90년대 강남을 배경으로 한 TV드라마 <남자는 외로워>(1994)에도 돈을 긁어모으고 집안을 장악한 어머니와 장군이란 명예만 지닌 채 무력하게 떠도는 아버지가 나온다. 자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남자/여자로서의 삶을 모색하지만, 대체로 남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인 반면 여자들은 현명하고 모성적이다. 최근작 <장미의 전쟁>에도 강인한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반복되고 있다.

<인어공주>, 어머니의 로맨스/선택을 수락하는 딸

여기 억척스런 어머니와 무기력한 아버지 사이에서 “차라리 고아가 부럽다. 결혼? 자신없다. 혼자 살고 싶다”고 말하는 딸이 있다. 아버지의 빚 보증으로, 어머니는 쌍욕을 해대며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딸은 대학도 못 갔다. 병든 아버지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찾지 말라고 패악을 떨지만, 딸은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 고향 ‘하리’에 간다. 거기서 그녀는 연애 시절의 엄마 아빠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현재의 자식이 과거로 가서 부모의 만남에 개입하는 <동감> 같은 판타지물이 아니다. 버스개통식 사진에 딸의 모습은 없고, 딸이 보지 못했던 아빠의 모습이 구석에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딸이 ‘하리’에서 그동안 들어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잊다시피한 ‘엄마 아빠의 연애담’을 실사로 재구성해 떠올리는 이야기다. 그녀는 궁상스런 현실 때문에 부정해왔던 그들의 뽀샤시한 로맨스를 적극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인 더 컷>에는 주인공의 아빠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엄마에게 청혼하는 흑백화면이 나온다. 영화 후반부에 같은 장면이 아빠의 스케이트 날이 엄마의 다리를 싹둑 잘라먹는 장면으로 바뀐다. 주인공이 믿어왔던 동화 같은 청혼이 실은 아빠가 엄마의 신세를 싹둑 말아먹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어공주>는 반대이다. 그녀는 로맨스 따위 믿지도 않았다. 결혼이란 진저리나는 무덤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해 연인 앞에서도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로맨스를 상상하면서 그네들의 질박한 사랑의 추억이야말로 팍팍한 현실을 견뎌낸 버팀목이었다고 믿게 된다. 아니 적극적으로 믿고 싶어진다. 그녀는 환상 속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개입하여 그들을 재회시킨다.

<인어공주>는 역사적인 부자간의 화해를 꾀한 영화들보다 직설적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빴다는 건 안다. 그게 우리 삶이었다. 어쩔 수 없는…”이라 변명하는 <하류인생>이나, 아들이 아버지에 “힘겹게 살아오신 것 압니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도요”라 위로하는 <효자동 이발사>보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나의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인어공주>의 화법은 건강하다. 엄마는 자신을 변명하려들지 않고, 딸은 모성을 빌미로 섣불리 위로하려들지 않는다. 과거를 봉인한 채 미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현재와의 접점을 허심탄회하게 열어놓으며 동등하게 배치한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울고 웃었다. 이 모든 말에 우리의 엄마는 ‘질기게’ 오늘도 살아, 오버보이스로 말할 것이다. “싱거운 년, 그럼 웃지 울것냐?” 나의 대답. “(내 인생) 오라이~.”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