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파이더 맨2> 감독 샘 레이미의 짧고 복잡한 영화인생 [1]
2004-07-20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샘 레이미는 제임스 카메론과 데이비드 핀처, 팀 버튼, 크리스 콜럼버스를 물리치고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감독이 됐다. 저예산 공포영화 <이블 데드>로 난데없이 나타났던 샘 레이미는 또 한번 느닷없는 영화를 보여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파이더 맨> <스파이더 맨2>는 장난스럽지만 유치하지 않고, 잡다하지만 산만하지 않고, 스펙터클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영화로 완성되어 여름을 정복했다. 일곱살에 영화에 매혹되어 열세살에 카메라를 잡았고 스무살에 첫 번째 장편영화를 만들어 스물두살에 유명해진 감독. 샘 레이미의 성공과 변화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히치콕을 사모해 험한 영화현장에서도 재킷과 타이를 착용한다는 이상한 감독의, 짧고 복잡한 영화인생.

편집자

샘 레이미는 한 사람이 만든 영화치고는 굴곡이 심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거칠고 분방한 공포영화 <이블 데드>로 1980년대를 시작했던 그는 90년대 중반 <심플플랜>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 <기프트> 등을 만들면서 들짐승 같았던 자신의 카메라를 길들였다. 샘 레이미는 “나는 나이를 먹었고 성숙했고 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내 관심은 스토리와 캐릭터와 삶에 있다. 나는 여전히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흥미를 느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잊고 있던 젊은 시절 자신을 마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샘 레이미에게는 <스파이더 맨2>가 그런 향수어린 대면이 아니었을까. <롤링스톤>은 그 영화를 두고 “<다크맨> <이블 데드> 3부작의 장난스러운 감독이 돌아왔다”고 썼다.

어찌보면 <스파이더 맨2>는 샘 레이미가 과거로부터 돌아온 영화가 아니라 과거를 끌어온 영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블 데드>의 주연이기도 한 그의 오랜 친구 브루스 캠벨은 “샘 레이미는 자신만의 비주얼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었다. 그의 카메라는 항상 달리거나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러나 <심플플랜>은 스토리가 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샘 레이미는 자기 자신 대신 영화 자체를 스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낯설어 보이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샘 레이미는 곡예하는 것 같은 카메라와 스스로를 통제하는 치밀한 드라마를 모두 경험한 감독으로 성장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만화 <스파이더 맨>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샘 레이미는 이제 캐릭터를 향한 이해와 애정을 더해 로맨스와 유머와 자유로운 비상과 옛 공포영화의 그림자가 뒤섞인 <스파이더 맨2>를 내놓았다.

카메라에 끌린 일곱살, 카메라에 몰두한 열세살

z샘 레이미는 일곱살 생일파티에서 처음 카메라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날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찍어두었던 할로윈 파티 필름을 순서를 바꾸어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어린 샘 레이미는 카메라가 분명하게 일어났던 현실을 마음대로 뒤바꿀 수 있다는 데 경이를 느꼈고, 이건 “신의 세계에 다가서는”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믿게 됐다. 그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샘 레이미가 그뒤 삼십년 가까이 드라마를 구성하는 일보다는 카메라와 조명과 직접 만든 소품들을 실험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슈퍼 8mm 카메라를 손에 넣은 열세살 무렵부터, 샘 레이미는 동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남북전쟁이나 노조지도자 지미 호파 납치사건 같은 스펙터클을 만드는 데 몰두했다. 중학교에서 그를 만난 브루스 캠벨은 “샘은 셜록 홈스 같은 옷을 입고 학교 바닥에 앉아 작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조금 다르다는 걸 보자마자 알아차렸다”고 평생 지속될 인연의 시작을 회상했다. 그렇다고 샘 레이미가 컴컴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음침한 소년이었던 것은 아니다. 샘 레이미는 “남들을 온갖 사고에 끌어들이지만, 자기는 절대 벌받지 않는” 영리하고 장난스러운 아이였고, 고향인 미시간 주립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그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웃기는 공포영화 <이블 데드> 시리즈

대학생이 된 샘 레이미는 룸메이트 로버트 태퍼트와 함께 ‘창조적 영화제작 집단’을 만들었다.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해 캠퍼스 내에서 유료상영을 하곤 했던 이 작은 동아리는 보험증서를 털어 마련한 몇천달러를 고스란히 날리는 불운도 겪었지만, 마침내 미친 학생이 교수를 살해하는 공포영화 <해피 밸리 키드>로 2800달러의 수익을 남기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르바이트한 돈과 지역유지들에게 투자받은 자금 35만달러로 만든 <이블 데드>는 샘 레이미를 한동안 공포영화 전문감독으로 못 박았다. 이전까지 샘 레이미는 너무 무서워서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은 두번의 성공으로 돈과 배우와 시나리오가 없는 감독에게는 공포영화가 저승만큼이나 넓은 영토를 열어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좋은 시나리오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운드와 조명으로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공포영화의 멋진 점이다”.

<이블 데드>는 산속 오두막에서 캠핑을 하던 다섯 젊은이가 죽은 자를 깨우는 주문을 외우면서 하나씩 좀비가 돼가는 평범한 이야기다. 그러나 포복하는 것처럼 낮고 재빠르게 흙바닥 위를 훑어가는 카메라나 나뭇가지가 몸을 휘감아 들어올리는 역촬영 기법, 뒷문에서 앞문까지 순식간에 오두막을 꿰뚫는 신속한 촬영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공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이블 데드>는 내가 본 가장 무서운 영화 중 하나”라고 말했고, 그 코멘트는 영화 광고에 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블 데드>는 유머가 있는 영화였다. 샘 레이미는 1960년대 삼인조 코미디 스타였던 스리 스투지스를 좋아했다. 그들의 영화를 보면서 슬랩스틱 감각을 익혀온 그는 노래하고 뛰어다니고 잘린 팔다리도 재활용하는 좀비를 창조했다. <이블 데드>는 웃기는 공포영화였다. 그런 영화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유머는 1987년작 <이블 데드2>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블 데드2> DVD의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샘 레이미는 브루스 캠벨과 시시덕거린다. “여자가 눈알을 삼키는 저 장면은 정말 스리 스투지스 영화 같지 않아? 뉴올리언스에서 시사회를 하는데 남자 둘이 저 부분에서 뛰어나가는 거야. 너무 웃겨서. 나중에 보니까 문간에서 계속 웃고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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