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 데드>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그는 코언 형제가 각본을 쓴 <크라임 웨이브>를 연출했다. 한 남자가 왜 전기의자에 앉게 됐는지 추적하는 이 영화는 샘 레이미가 좋아하는 폐쇄적인 공간과 빠른 이동, 슬랩스틱 코미디를 모두 가진 영화였지만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코언 형제는 이후 냉소적이면서도 진지한 영화로 돌아서 샘 레이미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샘 레이미는 규모와 유머가 점점 커진 <이블 데드> 2편과 3편을 찍고, 만화책 스타일을 영화로 되살린 <다크맨>을 찍으면서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샘 레이미는 자신의 영화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샘 레이미는 자기 영화를 보면서도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길 수 있지?” 혹은 “정말 멍청한 주인공이라니까”라고 말하곤 한다. <이블 데드2>에서 칼에 찔려 죽은 줄 알았던 여주인공이 자꾸만 다시 일어나서 주문을 끝까지 외우고서야 죽는 장면은 그걸 만든 감독 자신의 비웃음마저 살 만하다. 그러나 <이블 데드> 시리즈는 순식간에 끝이 보이는 영화다. 상영시간이 워낙 짧기도 하지만,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미련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샘 레이미는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은, 그저 보기만 하는 행위의 쾌감을 아는 감독이다. 좀비가 된 주인공 애쉬를 180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블 데드2>의 기묘한 앵글은 곧바로 뚝 떨어져 내리면서 그 논리나 의미를 물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벽에서 피가 쏟아져나오는 잔혹한 장면 또한 그 영화 속에 존재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래도 몇초 동안만은 신기하고 재미있다. 조금 지루한 서부극 <퀵 앤 데드>가 어쩔 수 없는 샘 레이미의 영화인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샘 레이미는 샤론 스톤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라는 스타를 기용했으면서도 황무지를 덮치는 것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카메라에 더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샘 레이미는 친구인 코언 형제가 <밀러스 크로싱> <바톤 핑크>로 거장 대접을 받는 동안 조금씩 몰락해갔다. <다크맨>은 원작이 없는데도 마치 만화책에서 오려내 생명을 준 것 같은 영화였지만, 소수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가장 주류영화에 가까웠던 <퀵 앤 데드>는 야유하는 이들에게 확성기를 쥐어주는 역할만을 했다. 샘 레이미는 그즈음 절대 그의 영화라고 보이지 않는 <심플플랜>을 연출해 재기의 단서를 잡았다. <심플플랜>은 돈가방을 둘러싸고 돋아나는 탐욕과 찬바람 부는 눈밭이 코언 형제의 영화 <파고>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묻힌 영화였다. 그러나 <심플플랜>은 “<파고>보다 마음 따뜻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살던 형제가 추락한 비행기에서 돈가방을 발견하는 <심플플랜>은 마이크 니콜스와 벤 스틸러, 존 부어맨을 거쳐 샘 레이미에게까지 왔다. 샘 레이미는 지나치게 손을 탄 이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가장 흥미로운 위치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위치에 두고” 영화를 찍었다. 그도 좋은 시나리오만 있다면 정교하고 신랄하며 단단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심플플랜>이 없었다면, 지금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감독 샘 레이미도 없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삶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여행 <스파이더 맨> 샘 레이미는 애초 <스파이더 맨>의 감독 후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는 제작사인 콜럼비아 사무실로 찾아가 1시간30분을 설득해서 감독 자리를 따낼 수 있었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샘 레이미만큼 <스파이더 맨>을 잘 만들 수 있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그는 도시의 타잔처럼, 혹은 천막을 벗어난 곡예사처럼, 거미줄에 몸을 매단 스파이더 맨과 함께 허공에서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쇠막대기에 카메라를 매단 초라한 장비로도, 샘 레이미는 작은 오두막과 장애물 많은 숲속을 민첩하게 해치고 <이블 데드> 1편과 2편을 찍었던 것이다. 게다가 샘 레이미는 누구보다 <스파이더 맨> 원작을 좋아했다. <추억의 타마크와>에 잠깐 출연했던 그는 그 영화에서 밤새 스파이더 맨 그림을 그리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 맨은 나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잘한다고 믿었다. 나의 하루는 완벽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불신과 의심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스파이더 맨도 문득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그처럼 캐릭터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성장영화로 만들고 있다. “나는 스파이더 맨의 시작과 중간, 끝이 궁금하다.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삶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여행이다.” 스트레스가 심한 나머지 빌딩에서 추락하기까지 하는 스파이더 맨은 샘 레이미가 만들게 될 3편에서 두개의 자아와 화해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샘 레이미도 그 답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몸을 굽히고 고집을 꺾으면서도 그 자신을 잃지 않았던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 맨에게도 비슷한 미래를 줄 수 있을 듯하다.
샘 레이미의 친구들 - 서로의 실패작에 기여한 사이죠
샘 레이미는 함께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친구들 중에서 브루스 캠벨에겐 “잘생겼다”는 이유로 배우를 맡겼다. <이블 데드>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성공작이 거의 없고, 샘 레이미의 메이저 진출 영화 <퀵 앤 데드> 카메오 출연 분량은 그나마 편집당하기까지 했다. 코언 형제의 <파고> <허드서커 대리인> 등에서도 카메오로 출연하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 고향 미시간에서 LA로 이사한 그는 샘 레이미가 제작한 TV시리즈 <헤라클레스> <여전사 제나> 등에 출연했고, <헤라클레스>는 에피소드 몇개를 연출하기도 했다.
조엘 코언, 에단 코언, 프랜시스 맥도먼드
조엘 코언은 <이블 데드> 편집조수로 일하면서 샘 레이미를 처음 만났다. 조엘과 에단 코언은 <크라임 웨이브> 시나리오를 썼고, 이 영화는 샘 레이미 초기작 중에서 가장 실패한 영화였다. 마찬가지로 샘 레이미가 시나리오를 쓰고 스탭으로 일한 코언 형제의 <허드서커 대리인> 역시 이들 형제의 최고 실패작 중 하나로 꼽힌다. 샘 레이미는 80년대 중반 조엘과 에단 코언, 조엘의 아내인 프랜시스 맥도먼드, 배우 홀리 헌터 등과 함께 아파트를 공유하기도 했다. 샘 레이미는 <다크맨>을 찍으면서 스튜디오의 반대로 브루스 캠벨을 캐스팅하지는 못했지만, 여주인공으로는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기용했다.
스콧 슈피겔
샘 레이미와 브루스 캠벨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블 데드2>의 작가이고 <황혼에서 새벽까지2>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를 제작자 로렌스 벤더에게 소개해줘 <저수지의 개들>부터 <킬 빌>까지 이어지는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샘 레이미와는 스리 스투지스를 향한 열정을, 브루스 캠벨과는 TV시리즈 <로스트 인 스페이스>를 향한 집착을 공유하고 있다.
로버트 태퍼트
샘 레이미의 ‘창조적 영화집단’ 시절 동료. 졸업한 뒤에 샘 레이미와 브루스 캠벨과 함께 르네상스 픽처스를 차리고 <이블 데드> 제작에 나섰다. <이블 데드> 3부작과 <다크맨> <기프트> 등 <스파이더 맨>을 제외한 샘 레이미의 영화 대부분에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하드 타겟> <여전사 제나> 등 샘 레이미가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와 TV시리즈도 함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