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로맨스의 무난한 결말 - 영화 <그놈은 멋있었다>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한예원, 지은성을 떠올린 배우가 있었나요?
귀여니 l 그게 없었어요. 이런 사람들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에 비유하지 않았어요. 지은성은 정말 모르겠고, 다만 예원이는 정다빈씨랑 배두나씨를 생각했어요. <위풍당당 그녀>에서의 배두나요. 정다빈씨는 <논스톱>부터 <옥탑방 고양이>까지….
정성일 l 결과론이긴 하지만, 장편소설의 성격상 영화보다는 텔레비전이 더 원작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귀여니 l <도레미파솔라시도> 드라마 제안이 왔는데 거절했어요. 나머지 세 작품을 다 계약했는데, 하나는 꼭 어린애처럼 내가 쥐고 있고 싶다는 생각도 했구요.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가 영화로 옮겨오면서 사라진 것 중에 가장 아쉬운 건 어느 대목입니까?
귀여니 l 예원의 오빠, 한승표가 학교에 대걸레를 들고 나타나서 악의 무리에 응징을 가하는 장면. 제일 한심했던 오빠가 막판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히든카드로 나타난 장면이 쓰면서도 통쾌했거든요.
정성일 l (좀 어리둥절) 오빠라서 통쾌했던 건가요? 가족의 소중함은 귀여니에게는 아주 특별한 거네요.
귀여니 l 특히 두살 차이 남동생에 대한 애착이 제가 좀 있어요. 중학교 때는 동생과 안 친했거든요. 동생이 밖으로 싸돌아다녀 친해질 계기가 없었고 또 말썽을 부렸어요. 그런데 제천에 둘이 내려가 살면서 누나인 나는 힘들어서 어쩔 줄 모르고 며칠 밥도 굶는데 얘가 오빠처럼 날 감싸주는 거예요. 그때부터 남매애가 생긴 거 같아요. (으쓱!)
정성일 l 이상한 점 하나 더. 한예원(<그놈은 멋있었다>)과 정한경(<늑대의 유혹>)은 인문계 학생인데 남자들은 ‘반드시’ 상고를 다녀요. 이윤세씨가 딴나라 사람이 아니니 학벌 지상주의 한국사회에서 그 의미를 잘 알 텐데, 상고 다니는 남자가 멋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어떤 까닭인가요?
귀여니 l 어쩔 수 없는 것이, 제천에는 상고에 사대천왕이 실제로 있었고 서울과 달리 공부만 하는 애들보다 놀 줄 아는 애들이 인기가 많았어요. <그놈은 멋있었다> 첫 부분은 진짜 있었던 일이거든요. 여고 사이트에 공고 애가 글을 올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예원이처럼 리플을 달았어요. (@@) 프로필에 휴대폰 번호도 써놨어요. 전화가 와서 싸웠거든요. 소설과 다른 건 얘가 사과를 했어요. 그 사건 이틀 뒤에 <그놈은 멋있었다>를 쓰기 시작했어요.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는 소설과 영화의 엔딩이 전혀 다른데요.
귀여니 l (잠시 생각!) 하이틴 로맨스의 무난한 결말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10대의 모습을 끝까지 담고 싶어서 마지막에 은성과 예원의 동거신이 나오는 건 느닷없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하지만 그때는 결혼보다 동거가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좀 친해지면 결혼한 분들에게 만날 물어보거든요. 아직도 사랑하냐구요. 그러면 사랑이 아니라 정 때문에 산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되게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10대 은성이와 예원이 결혼한 모습을 보여줘서 가망성 없는 끝이라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차라리 동거를 선택해서 너무 시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학생 모습에 가깝지도 않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둘이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정성일 l 지금 다시 써도 그 엔딩을 택할 것 같아요?
귀여니 l 지금은 그냥 10대에서 끝을 맺을 거 같아요.
정성일 l 더 이상한 건, 동거하는데 연적 김한성이 와서 자고 가는 엔딩을 선택한 거예요. 말하자면 세명을 공존시키는 방법을 찾았어요. 결혼했으면 못 찾아왔을 거예요. 구태여 김한성을 둘 사이에 끼워넣을 필요가 있었나요?
귀여니 l 아직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놓는 거예요. 아직 한성이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고.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는 비극이군요.
귀여니 l 어떻게 보면 비극인데….
정성일 l 한예원으로서는 행복한 거죠. *^^*
그의 죽음을 슬퍼하라 -영화 <늑대의 유혹>
정성일 l 영화 <늑대의 유혹>의 첫 시작은 신기하게도 <그놈은 멋있었다>와 마찬가지로 (마치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지하도 패싸움으로 시작합니다.
귀여니 l 싸움신이 많다보니까 일대일보다는 여럿이 싸우는 게 멋있어서 그러셨나봐요. *^^*
정성일 l 하지만 정태성이 그렇게 떼거리를 몰고 다니는 유형의 짱은 아니잖아요? 소설은 정태성을 피시방에서 ‘엎드려 자는 아이’로 소개하고 있는데, 영화가 완전히 오해한 것 같았습니다.
귀여니 l 어? 태성이 캐릭터가 많이 바뀌었네, 라는 느낌은 전체적으로 받았어요. 태성의 천진난만한 장난기보다는 가족사의 아픔이 더 크게 묘사됐더라구요.
정성일 l <늑대의 유혹> 캐스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귀여니 l 정한경을 한 이청아씨가 맘에 들었어요. (*^^*) 남자들은 멋있었구요. (흐뭇)
정성일 l 만약 강동원과 조한선이 바꿔 나왔다면?
귀여니 l 허걱!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의 한예원과 지은성이 만나는 건 아주 극적이지만, <늑대의 유혹>에서 정한경과 정태성의 만남은 운명인데도 ‘꿀꿀하게’ 시작하는 건 아주 의외였습니다.
귀여니 l 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는 정태성이 주인공이 아니라 반해원이랑 정한경이었어요. 정태성은 그냥 누나의 비극적인 남동생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 등장을 강조할 필요를 못 느낀 거예요. 그런데 연재하다보니까 태성이 인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라구요(.0_0) 독자와 내가 취향이 엇갈린 거죠. (ㅠ.ㅠ) 그때부터 정태성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죠.
정성일 l 그 터닝 포인트가 어느 지점부터였나요?
귀여니 l 태성이가 점점 불쌍해져 갈 때요. 한경이 동생으로 밝혀지는 지점부터.
정성일 l <늑대의 유혹>을 읽고 있으면 아마 귀여니 자신이 서울을 매우 불편한 곳으로 여기는구나라는 느낌이 있어요.
귀여니 l 좀 촌스러운 이유인데, 사람 많고 시끄럽고 지하철 타면 낑기구요. (ㅠ.ㅠ) 토요일 대학로 나가면 마찬가지로 낑기구요. 그땐 서울 살기 전이라 서울 사람은 깍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경이를 통해 서울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셈이지요.
정성일 l <늑대의 유혹>도 영화에서는 엔딩이 반대입니다. 영화는 정태성의 죽음을 알려주지만 소설은 알려주지 않아요. 그건 한경이가 행복하길 바라서였나요?
귀여니 l 아뇨. 독자를 안타깝게 하려는 장치였어요! “저 바보 태성이 죽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 있냐?” 하도록. 안타깝게 조급하게 독자를 만드는 걸 글쓰는 입장에서 즐긴 거죠.
정성일 l 그걸 가르쳐준 영화에 대해서는?
귀여니 l 감독님 입장에서는 이미 관객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신 듯한데 아쉬움이 남기도 하죠.
귀여니에게 소설은 외로움(^^a)?!
△ <그놈은 멋있었다>
정성일 l <늑대의 유혹>은 <그놈은 멋있었다>에 비하면 이모티콘이 좀 복잡해졌어요. 그러나 <그놈은 멋있었다>만큼 리드미컬하게 느껴지진 않아요. 의식적으로 쓴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두 소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귀여니 l <그놈은 멋있었다>를 쓸 때는 제가 만족하기 위해 글을 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어요. 하지만 <늑대의 유혹>에서는 내가 쓰면 많이 보고 자기들끼리 얘기할 거 라는 걸 알았어요.
정성일 l 귀여니의 삶에서 두 소설 사이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귀여니 l <늑대의 유혹>은 제 삶과 거리가 멀어요. 주변 인물도 내 주변 인물이 아니고, 무엇보다 저를 대변하는 여주인공이 달라요. 난 정한경처럼 어리버리하다기보다 덜렁대거든요.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제가 알고 있는 재미있는 경험을 다 넣었고 귀여니가 이윤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니까 주변에서 “내 얘기가 나오다니” 할까봐 두려워졌어요.
정성일 l <늑대의 유혹>에 와서 훨씬 문장이 길어지고 서술적으로 바뀌었어요. 짧은 문장이 귀여니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귀여니 l 그건 뒤에 알았어요. 당시에는 몰랐던 또 하나는 <그놈은 멋있었다> 같은 소설은 내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쓸 수 있어 개성있는 캐릭터도 또 만들 수 있고 독자도 끌어모을 수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일 큰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건 다시는 나와주지 않았어요.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를 즐겁고 명랑하게 읽을 수 있다면 <늑대의 유혹>은 슬픔에 기대서 쓴 소설 같습니다. 왜 그렇게 완전히 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나요?
귀여니 l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웃긴 걸 쓰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어서 역으로 튼 거예요. 태성이를 죽일 생각은 있었지만 소설 전체를 그렇게 쓸쓸하게 차분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결국엔 여주인공 성격에 따라가는 거 같더라구요. 한경이를 이렇게 설정한 이상 예원이처럼 푼수, 오두방정 떨고 싶어도 너무 안 어울리는 거예요.
정성일 l 정한경을 남자들보다 한살 연상으로 설정한 것은 왜죠?
귀여니 l <그놈은 멋있었다>도 다 동갑이에요. 저보다 오빠인 사람이 싫었어요. 왠지 연하는 삼삼하고 귀여워 보이는데. (*^^*). 오빠라고 하면 너무 자상한 이미지 같았어요. 또 기존에 나온 인터넷 소설들이 오빠나 학교 선후배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다르게 가자는 생각도 있었구요.
정성일 l 한편으로는 남자에 대해서 여자가 정신적으로 혹은 연령적으로 누나 자리에 있는 게 편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귀여니 l 그것도 있죠. 제가 누나 입장이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성일 l 남자에게 보호받기보다는 남자를 돌봐야 한다는 쪽이 훨씬 큰 건 아닌가요?
귀여니 l 예. 저도 몰랐거든요? 남자다운 남자가 좋고 숨는 편이 좋으니까. 그런데 그 남자다운 남자가 아파서 끙끙 앓거나 힘들어하거나 하면 울컥해요. (ㅠ.ㅜ) 애기도 좋아하구.
정성일 l 그럼 귀여니가 어른으로서 소설을 쓰는 것은 주인공이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겠네요?
귀여니 l 자식을 낳아봐야 알 거 같아요. (*^^*)
정성일 l 이윤세씨에게 고등학교란 어떤 시간이었어요?
귀여니 l 수지에 살던 1학년은 매우 즐거웠어요. 남자보다 친구가 내 곁을 잘 지켜주는구나, 라고 처음 느꼈구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재밌는 일도 많았고 선생님들과도 친했는데 제천으로 전학가면서 성격이 어둠침침해졌어요. (ㅠ.ㅠ) 대신 혼자 있다보니 생각도 깊어지고 그나마 어른스러워질 수 있었던 시간인 것 같아요. 만약 3학년까지 수지에서 즐겁게 보냈다면 지금 소설은 당연히 안 썼어요. 어쩌면 진짜 인생에서 제일 의미있었던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 l 귀여니에게 소설은 외로움이네요?
귀여니 l 외로울 때 쓰니까요.
정성일 l 최상의 소설가가 된다면 누가 되고 싶어요?
귀여니 l 말하면 웃으실 것 같아요… (진지하게) 셰익스피어요.
정성일 l 그건 앞으로는 희곡작가가 되고 싶다는 뜻인가요?
귀여니 l 그건 아니에요. 대학교 들어와서 셰익스피어를 읽었는데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중에서 하나 고른다면… <한여름밤의 꿈>.
정성일 l 무자비하게 묻겠습니다. 언제쯤 귀여니가 죽고 이윤세가 글을 쓰기 시작할까요?
귀여니 l 그걸, 약속을 확실히 못 드리겠어요. 그냥 지금으로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뿐이에요. 귀여니가 죽기에는! 몇년 지나고 “아? 귀여니가 누구였지?”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쯤 제 인터넷 소설과 그 이미지를 지워버렸을 때가 오면요.
정성일 l 다음 작품은 언제 시작할 것 같아요?
귀여니 l 쓰려면 내일도 쓸 수 있어요. 그러나 내일 쓰는 글은 만족을 줄 수 없을 거예요. 어떻게 쥐어짜서 노력해 즐겁게 해도 50회 분량도 못 가서 녹초가 될 거예요. 경험을 차츰차츰 충분히 빨아들일 만큼 충분히 빨아들인 다음에 써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