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얼굴없는 미녀> - 영화의 궁금증을 푸는 몇 가지 단서들
2004-08-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닫힌 공간에서 펼쳐지는 로드무비

데뷔작 <로드무비>로 주목을 끌었던 김인식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얼굴없는 미녀>가 8월6일 개봉한다. 영화는 풍부한 색감, 상상적인 공간, 현묘한 인간관계들로 독특한 감성을 지어낸다. 그 감성을 이해하기에 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굴없는 미녀>가 스스로 설정한 영화적 미로에 과연 출구를 마련했는지는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이 막바지 믹싱작업 중에도 틈틈이 정성스럽게 써보내온 세심한 공간 설명이 영화의 결에 동의할 단초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얼굴없는 미녀>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목소리를 동시에 싣는다.

편집자

데뷔작 <로드무비>에서 김인식은 장르 범주 자체를 영화제목 그대로 차용하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장르적 인상을 작품 내의 내용에 지혜롭게 안착시켰다. 게다가 결점으로 보였던 미진한 개연성을 꽉 짜인 이미지 구성으로 타개했고 또 인정받았다. 인물과 풍경의 거리감으로 드러나던 유랑의 감정, 거친 입자와 적절한 속도감으로 대치되던 내면의 복잡다단한 표정들. 영화는 그렇게 길에서 부딪치면서 시작하여, 길에서 화해하면서 끝났다.

두 번째 장편영화 <얼굴없는 미녀>는 그런 점에서 <로드무비>와 대조적인 차이를 보인다. 일단 로케이션 촬영이 극소수일 뿐 아니라, 세트 촬영 역시 대여섯으로 추려낼 수 있을 만큼 의도적으로 제한되고, 인공화된 장소들만을 주무대로 한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지수의 집과 석원의 진료실, 대학병원의 구름다리등은 각각 인물들의 정서적,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듯한 독특한 색감과 프로덕션디자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 CG 작업의 결과가 더해지면 영화의 이미지는 좀더 풍부해질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7월30일로 예정되어 있던 개봉일이 8월6일로 연기된 것도 이런 세세한 부분의 뒷마무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색과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우선 그로테스크한 분열증의 느낌을 살리려는 설계의도가 기술적으로 성공한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뒷장에 이어질 감독 본인의 정성스런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영화를 판단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풍경으로 이어지는 창을 폐쇄해버리는 대신 그 반대구조의 철저한 세트 공간 조명 아래로 들어와, <로드무비>에서의 질문을 연장하여 답을 얻어보겠다는 야심찬 창작의도가 <얼굴없는 미녀>에는 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관계 사이에의 교통’에 대한 것이다. 인물들이 짐을 싸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지도 않지만, <얼굴없는 미녀>는 그 점에서 돌고 도는 심리적 로드무비이다. 도저히 같은 길동무가 될 수 없을 듯한 ‘극과 극’의 두 남자가 툭 터진 광장 어디에서라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정신과 의사와 환자라는 몸의 거리는 가깝지만 처한 상위는 서로 다른(결국에는 그걸 깨는 구조이긴 하지만) 두 극과 극의 관계를 맺고 있는 또 다른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다. 장소 설정은 그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정신과 의사와 환자가 탁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끈질기게 서로의 환상과 기억과 거짓과 진짜 감정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이미지 여행이 시종일관 영화 속에서 펼쳐지게 된다.

‘짝패 구조’의 스토리텔링-모호한 경계선들의 난립

어느 날인가부터 ‘미친 듯이’ 글을 써대는 여자(김혜수)에게서 영화는 시작한다. 이름은 지수. 그녀는 환자다. 병명은 경계선 장애.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 생기는 병. 정신과 의사 석원(김태우)은 그녀의 치료를 맡은 얼마 뒤에 개인적인 사정상 대학병원을 그만둔다. 그로부터 일년 뒤. 개인병원을 차린 석원은 우연히 지수를 다시 만나지만 단숨에 그녀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지수와 석원은 다시 환자와 의사로 만나게 되고, 석원은 점점 더 지수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끝내 최면을 걸어놓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사랑을 나눈다. 지수 역의 김혜수는 분열적인 저음의 목소리와 광란의 고음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고, 김태우는 이성과 욕망 사이의 망설임을 무감한 표정으로 체득해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지수와 석원 둘 사이의 간단한 구조로 전개되지 않는다. 다시 이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다른 인물들을 말해야만 진짜 이야기의 살이 붙는다. 석원의 부인 희선, 그녀의 정부인 파란 머리. 지수의 남편인 민석, 민석의 정부인 혜영. 그리고 지수의 과거 연인 정서까지. 영화는 석원을 중심으로, 한편으론 지수를 중심으로 양편에 매여 있는 유사한 인간관계가 꼬리를 물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김인식은 동일한 제스처를 반복하게 하거나, 반복적인 공간에 다른 인물들을 집어넣어 동선을 만들거나, 이전 장면에 등장했던 대사를 또 다른 인물이 동일하게 내뱉게 하거나, 한 인물의 상태를 다른 인물이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짝패 구조’로 끌어간다(지수가 들려주는 어릴 적 쌍둥이 언니에 대한 살해 기억, 전 남자와의 사이에서 7개월 만에 낳았다고 주장하는 쌍둥이 아이들, 그 아이들이 죽어 화장하고 난 뒤 사왔다는 두 마리의 카나리아 등은 그 짝패 구조에 관한 작은 예에 불과하다).

혹여, 정신분석학을 신봉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피분석자와 분석가(환자와 의사) 사이의 전이와 역전이의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영화로 예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명쾌하지가 않다. 그런 간접 개념에 빠져들면 <얼굴없는 미녀>의 영화적 구조에 대해서 놓치게 된다. 도대체 어느 감독이 자신의 영화가 단지 정신상담이나 치료대상의 환자 수준에 머물기를 바랄 것인가? 그래서 난데없이 끼어드는 것은 최면암시다. 왜 석원은 지수를 치료하기 위해 최면을 걸었던 것일까? 프로이트식 대화치료(talking cure)로는 불가능한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그 슬픈 육체적 사랑이 그 순간에만 가능한 영화적 플롯 구조 때문에 필요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정말 흥미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없는 미녀>는 사전정보 없이 볼 경우 환상과 실재, 원인과 결과를 변별해내기 힘든 모호한 경계선들이 난립하고 있다. 영화는 궁금함의 미끼를 던져놓고 납득할 수 없는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야 진실을 알려주거나, 질문을 하고서도 스스로 답 찾기를 미뤄두고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영화가 선택한 개념 때문에 정당하게 그러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실패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생략과 압축의 효과-독특한 감성과 어지럼증가령, 지수가 경계선 장애를 앓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녀가 과거의 연인이라고 말하는 한정서에 대한 기억은 실재한 것일 수도 있고, 소설 속의 일일 수도 있다. 영화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면 그렇게 모호해할 수 밖에 없다. 또, 지수가 버림받을 거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 건 외도하는 남편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남편과의 추억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의 기억에 목을 매는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보게 될 누구라도 갖게 될 오해. 영화의 절반이 지나서야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더군요.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냥 듣고만 있었죠”라는 말을 석원이 꺼내지 않는다면 그의 성 정체성은 동성애자로 남을 것이다!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석원을 동성애자로 오해하도록 영화는 유도하고 있는 것인가? 석원과 민석의 짝패구조 때문이라고 해도 다른 방편은 없었을까? 그렇게 해서 말하고 싶은 바가 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으며, 왜 영화 스스로 답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순간까지 ‘영화적으로’ 석원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지수에 대한 석원의 관심을 관객이 이해할 수 없도록 방해받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은 물을 것이다. 근데 왜 저 친구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이 질문들은 사소한 시비가 아니다. 대답을 찾자면, 김인식은 설명을 싫어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생략과 압축의 효과를 위해 한신을 다 찍고도 그 안에서의 대사 일부를 뭉텅 잘라내고,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 마주쳐서 명확한 관계지도가 그려지는 것을 꺼리고(시나리오 상에는 파란머리와 석원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초반 설정이 있다), 편집상에서 아예 신의 순서를 상당수 바꾼 듯한 느낌까지 역력하다. 그러나 이럴 때 그 순서와 자리가 제대로 찾아지지 못했을 경우 영화는 분명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지금 <얼굴없는 미녀>가 그렇게 보인다. 데뷔작 <로드무비>에는 인물들간의 일정한 관계지도 준칙들이 있었다. 인물이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에 도착하면 그곳엔 다른 사람들이 있고, 다른 풍경이 있고, 다른 법칙들이 있으므로, 이미 떠나온 곳에서 만났던 그 인물의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이후 갑자기 그/그녀가 등장하지 않거나 사라져도, 거기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도’ 혼선은 없다.

그러나 <얼굴없는 미녀>는 다르다. 극소의 장소에서 새로운 관계들이 시간을 두고 불쑥불쑥 ’밝혀질 때에’(단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따라갈 수 있는 여지들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옮기고 바뀌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것을 묘사하는 주체의 언술이고, 새로운 관계는 매번 그 언술의 기억 속에서 불려오기 때문에 더욱더 영화는 분명한 지도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략과 압축으로 취하려 한 풍부한 감정의 결이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없는 미녀>는 그런 아쉬움을 남긴다. 때문에 매우 독특한 감성의 분위기를 성취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없는 미녀>는 갈등이 그 원인을 찾아 헤매고, 인물들의 관계가 그 제자리를 찾아 헤매고, 신이 순서를 찾아 헤매는 ‘미로 무비’ 또는 그 안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난해한 로드무비가 되었다. 관객에게는 지금 아드리안느의 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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