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을 담보한 공허함의 통로 - 대학병원 구름다리
건물과 건물을 잇는, 즉 정신병동으로 향하는 긴 구름다리. 그곳에 창백한 지수가 하오의 햇살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 긴 복도에 침울하게 서 있는 두 남자. 석원이 죽은 아내의 애인에게 휴대폰을 건네고 있다. 이젠 내게 아무 의미없는 물건이라는 말과 함께.
때마침 공명되어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 석원의 아내 희선의 환영이 걸어오고 있다. 희선은 남편인 석원과 애인이었던 두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다 지수를 스쳐 지나 천천히 사라진다. 영화에서 구름다리는 이렇게 처음 소개된다. 심도있는 그 긴 공간을 향해 걸어가는 영화 속의 인물들.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는, 마취과 의사인 석원 아내 희선의 발자국 소리, 힘없이 동료의사인 윤수를 찾아가는 석원의 발소리, 텅 빈 공간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지수의 공허한 하이힐 소리….이 영화에서의 발소리는 아주 중요한 사운드 컨셉으로 자리잡고 있다. ‘얼굴없는 미녀’의 모든 인물들은 끊임없이 소실점을 향해 걸어들어가고, 혹은 그 소실점에서 걸어와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 페이드인되면서 복도를 걸어오는 민석. 영화에서 구름다리는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는 통로처럼, 구름다리는 각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고독에 갇힌 그 남자의 자리 - 석원의 현재 공간, 클리닉
인간은 왜 외로워하는가?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독이라는 그 거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진정한 사랑, 우정, 이러한 것들로 외로움이라는 갈증이 해갈될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은 진정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 난 어느 순간부터 고독이라는 놈과 친해지기로 했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할 것이므로. 석원은 고층 건물들로 빽빽이 들어선 24층 펜트하우스에서 침대에 홀로 누워마스터베이션하는 고독한 모습의 석원은 세상과 고립된 외딴 섬처럼 혼자 살아간다.
그를 찾는 환자들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는 유리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피아노 계단소리를 들을 때 석원은 비로소 외부와 소통한다. 상처받은 고독한 영혼들이 석원 앞에 앉아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석원 역시 그 환자들과 다름없는 고독한 영혼일 따름이다. 석원의 고독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클리닉 내부 중정에 앙상한 나무들을 배치했고, 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유리계단 올라오는 사람들을 석원이 볼 수 있게 했다. 가끔 그가 클리닉 테라스로 나와 담배를 피울 때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허공 위에 떠 있는 셈이다.
석원은 고독이라는 감옥에 갇힌 캐릭터로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그를 찾아오는 지수가 그의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하고 그녀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건너는 석원의 심정을 그려보고 싶었다.
알 수 없는 그 여자의 텅 빈 여백- 지수의 현재 공간, 서재
느린 시간, 확실치 않는 계절, 바다는 조용하다, 요트 위의 한 남자, 해변에 선 채 스카프처럼 흔들리는 여자를 본다. 여자, 남자의 반듯한 미소가 마음에 든다.그런데 그 남자의 이름은? 그 여자의 이름은? 그래 생각나겠지, 조금만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보자.
영화 도입부 지수가 서재에 틀어박혀 쓰고 있는 의문형 소설의 일부다. 이렇듯 지수는 과거의 희미한 기억에 매달려 그 과거를 생각해내려고 미친 듯이 글을 쓴다. 그때 지수 서재의 책들, 와인 잔과 투병한 유리병들, 지수의 액세서리, 조그마한 인형들이 방 안 가득 떠오른다. 그때 남편인 민석이 노크를 하고 나타나자 모든 사물들이 지수에게 떨어져 피범벅이 된 지수, 짐승처럼 비명을 지른다.
석원을 만나기 전 지수의 공간은 지수의 불분명한 의식처럼 분열적이다. 남편인 민석의 내레이션으로 보여지는 지수의 외부 세계도 공간이 빠르게 바뀌면서 어디가 어딘지 불분명하다. 1년 뒤 지수가 석원을 다시 만나고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지수 집의 외관이 보여지고 침실, 거실, 그리고 그녀가 걷고 있는 거리, 건물 내부의 공간들이 구체화되며 나타난다.
하지만 지수가 위치한 그 모든 공간들은 텅 비어 있다. 그녀가 내딛는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만 메아리로 들려올 뿐.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울려퍼지는 하이힐 소리. 지수의 도심의 밤과 낮, 그녀가 타고 있는 차 안에서조차도 거리는 텅 비어 있다. 그녀가 시선을 주는 사진들마저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끝없이 밀려오는 공허함, 자아를 상실한 한 여자의 심리를 그렇게 난 표현하고 싶다.
무의식에 조각된 사랑과 실연의 장소 - 지수의 회상 공간
지수씨, 지수씨는 지금 천천히 기억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지수씨는 가장 아픈 기억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수씨는 천천히 그 문을 열고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주 천천히…. 석원의 그 주술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최면으로 빠져들어가는 지수. 그리고 보여지는 지수의 그 은밀한 과거의 공간들. 이 영화는 극도로 대사를 자제하고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난 촬영감독인 김우형씨에게 이 영화에 핸드헬드는 없다고 처음부터 말했다. 난 핸드헬드로 흐르는 이미지보다 견고하고 단단한 이미지들을 원했다. 출렁이는 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스키장의 백색의 세계. 숲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까지 잡고 싶었다. 최면 상태의 지수의 공간들은 지극히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그 넓고 청아한 공간에서 지수는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지고 또한 갑작스런 실연을 당한 뒤 처절하게 그 자연 속에서 흐느낀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회상 부분인 떠나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삶을 포기하고 끝없이 담배와 술을 마시는 회상에서 또 회상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들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가 고정된 채 원신 원컷으로 강렬하게 찍히길 바랐다. 무드로 밀고가는 이 영화의 형식 속에서 영화가 끝난 뒤 정말 분위기만 남는 그런 영화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편의 화보집을 보는 것처럼 이 영화의 영상들이 강렬하게 관객에게 각인되며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고독이 확고하게 전달되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