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남극일기> 뉴질랜드 촬영현장 [1]
2004-08-25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올라 제작사에서 나눠준 보도자료를 뒤적이다 임필성 감독이 쓴 감독일지가 거기에 들어 있는 걸 봤다. 현지 로케이션 촬영 준비에 코피 터지도록 바쁜 임 감독을 채근해 얻어낸 글이었다(<씨네21> 458호). 당시 <씨네21>이 통보한 마감 시한에 맞추기 위해 임 감독은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집에 귀가하지도 못하고 제작사인 싸이더스에서 몰래 숨어 자판과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한다. 어쨌든 그가 꼭두새벽에 보내온 글은 절절했다. 거기엔 버릴 수 없는 <남극일기> 시나리오를 들고서 제작사를 전전하며 행군했던 5년이 담겨 있었다. 극적으로 둥지를 찾은 뒤 뉴질랜드 현지 촬영 기회를 얻은 그 일지의 마지막은 흡사 도달불능점에 닿아야만 하는 극중 최도형 대장의 심정과 비슷했다. “이 괴물 같은 영화에 숨을 쉬게 하고 싶었다. 이제 모두의 힘으로 진짜 남극일기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질 수 없다. 괴물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다시 99년의 어느 새벽처럼 심장이 쿵쿵쿵… 뛴다.” 그리고 한달여가 지났다. 진짜 싸움을 벌이고 있을 임필성 감독이 궁금했고, 그와 함께 전투를 치르고 있을 송강호, 유지태를 비롯한 배우와 스탭들이 궁금했다. 과연 그들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 편집자

눈(目) 뜨자 눈(雪)뿐이다. 퀸스타운 중심가의 호텔을 빠져나온 때가 어둑했던 아침 6시. 취재진을 실은 2대의 버스는 설산고봉을 톱니바퀴 모양으로 1시간30분가량 빙둘러 오르더니 해발 1700여m 스노 팜 입구에 이르러서야 멈춰서서 가쁜숨을 몰아쉰다. 밤새 기력을 보충한 태양은 어느새 머리 위에 떠서 따가운 화살을 내리쏘고 있다. 그 위세는 북반구인들에겐 낯섦 이상이다. 과장하면 시신경을 도려낼 것 같은 위협처럼 느껴진다. 8월7일 뉴질랜드에 도착한 뒤, 다음날 하루의 휴식이 주어졌음에도 한국에서 이곳까지 18시간의 이동시간은 아무래도 버거웠던 모양. 취재진의 반은 아직 잠에 빠져 있다. 눈을 저벅 하고 내려밟는 순간, 남은 이들을 깨울 이는 공복의 허기도 아니고, 인솔자의 채근도 아니고, 질투와 시샘으로 반짝이는 설경이 아닐까 싶다. 주위를 온통 새하얗게 뒤덮은 설경은 태양의 도움을 받아 북반구인들의 홍채를 바늘 같은 반사광으로 사정없이 찔러댄다. 맨눈에서 눈물나게 만든다는 그 빛이다.

스키장으로 유명한 이곳 스노 팜은 <남극일기> 제작진이 주요 베이스캠프를 차린 곳이기도 하다. 7월5일 뉴질랜드에 도착한 제작진은 해외 로케이션 분량 45회 중 이곳에서 대부분의 촬영을 소화하고 있다. 푸근한 인상 때문에 “간혹 마오리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는 임지현 제작부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침 식사 대열을 뒤로 하고 셔터부터 눌러대는 취재진이 걱정스러운지 현지 라인프로듀서인 브리짓 버킷에게 “지금 여기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유럽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이 수시로 신형 차종의 눈길 주행 테스트를 하는 곳이라 산업스파이로 오해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스탭들 중에서도 일본 마쓰다사의 차량 테스트 시간인 줄 모르고 이곳을 지나다 우리돈으로 60만원의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한다. 또 하나 골칫거리는 흡연. 담배꽁초가 발견될 경우 벌금은 물론 전 스탭들이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된다며 제작진은 취재진의 손에 재떨이 대용 종이컵을 들려준다. 나가면 역시 모든 게 돈이고, 고생인 것인가.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한 대원들, 배우들, 스탭들

△ 임필성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의 아이디어를 곧잘 받아들인다. 다만 대사의 경우에 배우의 입에 맞지 않더라도 감정이 더 실린다면 그쪽을 밀고 나가는 편이다.

△ 뉴질랜드 현지스탭들 중엔 반바지를 입고 촬영하는 스탭들도 적지 않다.

다시 차량으로 10분 정도 이동하자 평평한 설원이 등장한다. 드디어 촬영현장. 여름에는 방목이 이뤄지는 듯 여기저기 말뚝이 보인다. 그뒤로는 어깨를 포개고 겹친 흰산들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사진으로나 봤을 법한 풍경에 홀려 넋놓고 조심스레 한발한발 다가갈 즈음, “전부 가만히 있어!” 외마디 저음이 터져나온다. 쉰 듯한 송강호의 목소리다. “컷!” 지름 2m가 넘는 강풍기의 요란한 발동이 멈춰선다. “체킹 더 플레이 백!” 모니터를 확인하겠다는 현지 스탭의 복명복창이 터져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막사 안에서 임필성 감독이 나와 송강호에게 간다. “‘그만! 움직이지 마!’가 더 낫지 않아?”라며 묻는 송강호. 남극의 도달불능점에 닿기 위해 나선 대원들이 횡단 도중 다툼을 벌이고 주먹질까지 주고받다 결국 크레바스에 빠질 위험에 처하자 부대장 최도형이 순간적으로 제지하는 이 장면에서 송강호는 허옇게 부르튼 입술을 열고서, ‘그만!’이라고 먼저 내지르는 것이 극한상황에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덧붙인다.

“달리가 좀 뒤틀리는 것 같지?” 송강호와 의견 교환 중인 임필성 감독에게 정정훈 촬영감독이 모니터 결과를 궁금해한다. 뉴질랜드 현지 촬영 스탭들에게 간단한 단어와 수화만으로 레일 점검을 부탁하고나서 그는 수차례 카메라를 앞뒤로 이동해본다. 현지 촬영을 진행한 지 한달여. 통역을 맡은 스탭이 이제는 다들 자신에게 “넌 해고야!”라며 놀려댈 정도로 현지 스탭들과 언어 소통이 원활하다는데 이 광경을 보니 과장은 아니다. “좀더 명령조로 대사를 해달라”는 감독의 주문이 배우의 입에서 토해져나온 다섯 번째 테이크에 OK 사인이 떨어진다. 그제야 뷰파인더에서 눈을 뗀 정정훈 촬영감독은 “배경이 흰눈뿐이라 지루해할 수 있어 카메라 무빙이 많은 편인데 그걸 어떻게 대원들 각각의 감정 전개와 맞물리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한다. 촬영부 스탭을 포함해 30여명의 현지 스탭들 중 상당수가 <반지의 제왕> 등의 영화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이들. “<올드보이>를 촬영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서 스탭들이 정 촬영감독에게 한결 신뢰를 보낸다”는 게 임희철 프로듀서의 귀띔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