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남극일기> 뉴질랜드 촬영현장 [2]
2004-08-25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맑다가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날씨

오전 10시가 넘자 태양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다. 취재진 중 몇몇은 그때서야 허둥지둥 스탭들에게 선크림을 빌려 바르지만 이미 늦었다. 안면은 고루, 그리고 살짝 익어 꺼끌꺼끌하다. “그래도 지금까지 촬영 중에 오늘이 가장 날씨가 좋은데요.” 통신담당 대원 성훈(윤제문)이 얼음구덩이인 크레바스에 빠지자 그를 구하기 위해 막내 민재(유지태)와 식사담당 근찬(김경익)이 달려가는 장면 세팅을 지시해놓고서 임필성 감독이 뒤늦은 인사를 건넨다. 고양이를 너무 무서워해서 장난으로 고양이 소리만 내도 벌벌 떤다 하고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푼다고 타박받는 그이지만, 촬영장에서만큼은 판단이 빠르고 냉정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5년의 시간을 <남극일기>에 바쳤던 탓일까. “처음인데 신인감독 같지가 않다. 상황이 힘들다 해서 대충 넘어가는 컷이 하나도 없다”는 게 송강호의 말이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정정훈 촬영감독도 “느긋하게 뽑아내는 여유는 아직 없지만 대신 열정으로 스탭과 배우들을 몰아치는 스타일”이라고 더한다.

△ 이같은 날씨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취재진을 떠나보낸 다음날 현장은 돌풍에 휘말렸다고(위). 빨간 썰매는 영국에서 직접 만들어 공수해온 것으로 제작비만 우리돈으로 800만원. 120kg의 짐을 운반할 수 있다는 게 송강호의 설명.

그러나 베테랑이라 해도 여유를 즐길 만큼 만만한 현장이 아니다. 무엇보다 난관은 변덕스런 날씨다. 자국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지를 받았지만, 오죽했으면 제작진이 애초 기상문제 때문에 마오리족이 지내는 고사까지 치르려 했을까. 6시간 단위로 기상예보를 전해받지만 맑다가도 눈보라가 몰아치면 변덕을 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제작진의 하소연이다. 일요일을 제하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강행군하는 제작진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임희철 프로듀서는 “맑을 때, 눈이 올 때, 그리고 화이트 아웃 때, 아예 세 가지 기상 상태에 맞는 촬영 분량을 미리 준비해서 그때그때 진행한다”고 말한다. 이건 할리우드영화를 비롯, 뉴질랜드 촬영을 인솔해온 현지 스탭도 어쩌지 못하는 일. 애초 제작진이 점찍은 마운틴 라이포드 지역 또한 예기치 못한 날씨로 눈이 녹아 풀이 듬성듬성 나 있을 정도로 변했고, “이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자 현지 프로듀서 또한 “나라고 별수 있느냐”며 억울해하며 울었다 한다.

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은 ‘남극’

“야. 눈 세팅 최대한 빨리 하라고 그래.” 임필성 감독의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도 날씨 탓이 크다. 조감독인 이환희씨 또한 “일광 정도가 달라졌다”며 수시로 감독에게 보고하고 애초 정해놓은 장면의 촬영이 가능한지를 꼼꼼히 체크해 아니다 싶으면 갈아끼운다. 악조건이라 해서 건진 것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심하면 바로 옆의 사람조차 분간 못하는 화이트 아웃의 상황에서 어느 날엔가 감독과 제작진은 “이상하고 기괴한 분위기에 이끌려 미친 듯이 촬영을 강행했고”,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 싶어했던 남극의 공포스런 느낌을 얻어냈다”고 뿌듯해한다. 막사 안에서 콘티를 뒤적이던 막내 김민재 역의 유지태를 비롯해 식사 담당 근찬 역의 김경익 등의 배우들도 몸으로 부대껴야 하는 환경에 익숙해진 듯하다. “이 속도보다 15초 정도는 더 빨라야 해.” 슛에 들어가면 리허설 때보다 더 빨리 장비를 풀고서 40kg이나 되는 대형 강풍기가 뿜어대는 눈보라를 뚫고 대원을 구해야 한다는 감독의 미션을 배우들은 몇 차례 시도 끝에 군더더기 없는 액션을 알아서들 만들어내서 수행한다.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여러 번 표명했지만 <남극일기>에는 인간의 욕망만이 어지럽게 교차하진 않는다. 이곳에서 감독과 배우들은 짬만 나면 이 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은 ‘남극’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려줬다. “지구의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인 남극에 인간의 들끓는 욕망을 가져다놓았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임필성 감독의 시나리오는, 영화 속에서 탐하고자 하는 인간과 이를 허락하지 않는 자연의 대결구도로 비중있게 그려질 계획. 욕망의 발자국을 거부하는 남극의 시선을 임 감독은 “주관적인 카메라 시점을 주로 쓰고 있다”는 답변으로 설명한다. 부대장 영민(박희순)과 장비담당 재경(최덕문) 등 탐험대 대원들이 몰아닥친 강풍에 휩쓸려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애쓰는 장면을 지평선에 가까운 낮은 눈높이에서 망원렌즈로 잡고, 한쪽에서는 남극과 사투를 벌이는 대원들을 격렬한 핸드헬드로 동시에 따라가는 걸 모니터로 번갈아 보니 제작진이 말하는 욕망이 불러온 공포의 실루엣이 더 풍성해 보인다.

△ 유지태(왼쪽)는 극중 민재처럼 막내지만 때론 아직은 카메라가 낯선 연극계 선배들을 이끄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위 사진) △ 호텔 연회장처럼 이곳 현장에는 간식을 나르는 스탭이 있다. 먹고 싶은 거 가져다 먹으라는 우리 현장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아래 사진)

‘남극일기는 CG일기’

소리내진 않지만 현장에도 그런 감시의 시선이 있다. 바로 CG팀 EON. 무려 4명이나 되는 인원이 같이 상주하며 현장 막사 안에 장비를 차려놓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광량 때문에 <남극일기>는 촬영 뒤에 전체 디지털 스캔을 받아야 하는 상황. 게다가 일일이 매만져야 하는 컷만 400컷이 넘어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남극일기가 아니라 CG일기’라고 할 정도다. EON의 정성진씨가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살아 있는 캐릭터로서의 남극. <버티칼 리미트>처럼 액션이 강한 영화들의 경우는 빠른 화면 때문에 남극을 찍은 기존 홍보용 필름을 합성했지만, <남극일기>는 가급적 실제 촬영분을 갖고서 CG 작업을 한다고 한다.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더욱 배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서 임필성 감독과 최대한의 가능선을 점검하고 있다.

취재진에게 접근이 허용된 오전 촬영이 끝날 무렵, 지금까지 찍은 촬영 분량이 궁금하기도 해서 “러시는 보셨죠?”라고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에게 물었더니 “보내준 게 있긴 한데 하나도 안 봤어. 이번에 들고가서 봐야지”라며 뜸들인다. “미리 봤으면 감독하고 스탭들한테 무슨 말 하고 싶은 맘이 동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타지에서 고생하는 감독과 스탭들 괜히 쫄게 만들잖아. 이번에 보고 나서 할말 있으면 전화로 슬쩍 하려고. 그래도 임필성이가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이라 잘했을 거야” 한다. 하긴 너무 이른 질문인지도 모른다. 극중 탐험대장인 최도형이 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듀피크 산을 넘는 장면을 위해 헬기를 타고 남극과 가장 비슷하다는 마운트 가비 촬영을 비롯, 현지 로케이션만 아직 2주가 남아 있다. 국내에서도 대원들의 감정의 파고가 극점에 오르는 전체 분량의 55%에 달하는 세트 촬영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배우와 스탭들은 가장 혹독한 상황에서 남극의 기운을 맛보고 국내에 들어와서도 이를 몸으로 기억해내는 과정에 있다. 물론 <남극일기>의 전모가 드러날 2005년 상반기까지 궁금증은 계속될 것이다. “나도 한국 가고 싶어”라는 말을 삼키고서 일일이 취재진을 배웅하는 송강호와 유지태(참고로 이들 두 배우가 남반구에서 부친 편지는 다음호에 게재될 예정이다)를 뒤로 하고 버스는 녹아서 질척거리는 땅을 아쉬운 듯 느리게, 느리게 돌아밟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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