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쟁호러 <알포인트> 이야기 [1] - 40도 넘는 열기와 빽빽한 밀림
2004-08-31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알포인트>는 저주받은 땅 알포인트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의 이야기다. 식민지 시대 원한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죽어서도 구조를 요청하고, 비명 섞인 그 무전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불러들인다. 슬픔과 원한과 진한 핏자국이 떠도는 전쟁터. <텔미썸딩> <하얀 전쟁>의 작가 공수창은 자기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그곳으로 떠나 베트콩만큼이나 완강하게 저항하는 캄보디아 땅과 싸웠다. 15년 동안 문자로 영화를 대해온 사람. 좋아하는 메이저 리그 경기도 못 보고 우기와 건기와 태풍을 두루 겪은 공수창 감독은 낯설기만 한 감독 의자로 서둘러 옮겨 앉았지만, 올해 가장 뛰어난 공포영화라는 결과로 보상을 받았다. 전쟁호러 <알포인트>는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서 세상에 나왔을까. 공수창 감독은 4년에 가까운 그 과정을 들려주었고, 촬영현장에서 이십년 만에 쓴 일기도 함께 보내왔다. /편집자

공수창 감독은 아직 앙코르와트를 보지 못했다. 석달 넘게 캄보디아에 머물렀던 그는 단 며칠도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촬영이 끝난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밤마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석달하고도 열흘. 40도를 넘어서는 열기와 갈대밭에 몸을 숨긴 독사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밀림이 그를 괴롭혔지만, 더욱 묵직하게 마음에 얹혀 있던 것은, 후회였다. 그는 <하얀 전쟁> <텔미썸딩> <링> 등을 쓰면서 15년 동안 공수창 작가로 살아왔다. 감독 두명이 교체되고, 더이상 촬영을 늦출 수 없게 되었다고는 해도, 느닷없이 공수창 감독이 되어 캄보디아까지 가는 건 못할 일이었다. 할 수 있을까, 하지 말걸 그랬나. 공수창 감독은 삼십년 만에 처음으로 태풍까지 불어오는 악조건 속에서, 알포인트 안에 갇힌 소대원들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행군을 계속했다.

40도 넘는 열기와 빽빽한 밀림 - <알포인트> 안에 갇히다

<알포인트>는 황석영의 단편 <탑>에 나오는 지역 이름이다. 80년대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공수창 감독은 그 무렵 이미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가졌고, 그 전쟁을 배경으로 한 황석영의 소설들을 기억에 새겼다. “해병대원으로 베트남에 갔던 친구 삼촌이 사진을 찍어왔다. 토막난 베트콩 시체를 테이프로 감아놓은 거였는데, 멋있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너무 심하다 싶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시체 사진을 보면서 환호하도록 만드는, 지독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수창 감독은 그에 대한 반감을 오랫동안 놓지 못했고, 군대에 다녀온 경험까지 보태어, 언젠가 한번 전쟁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갈망을 키웠다. 탄약부대 병사였던 그는 일년에 두 차례 비무장 지대 근방으로 파견돼 철책 근무를 섰다. “밤에 누가 나타나면 무조건 갈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처음엔 도저히 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일년 반이 지나 상병이 되니까 내가 알게 뭐냐라고 생각하게 됐다. 군대에서 원하는 인간으로 변한 내가 끔찍해서 일주일 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공수창 감독은 처음부터 공포영화가 아니라 군대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 아래 묻어둔 억압이 형체를 가지고 살아나온 형상이 공포이고 유령이라고 믿는다. 자대배치를 받고 처음 한 일이 자살한 병사의 피와 뇌수를 닦는 작업이었던, 한때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던 청년은, 유신 시절 고등학교와 전두환 정권 시대 군대를 가장 선명한 억압으로 기억하고 있다. 온갖 괴담이 떠돌 수밖에 없는 억눌린 집단으로. 그러나 대학 후배인 장윤현 감독마저 군대 이야기를 들고 가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군대 이야기는 싫어하지만, 무서운 이야기는 좋아하기 때문에, 공수창 감독은 전쟁호러라는 보기 드문 장르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2001년, 첫 번째 시나리오

한국 휴전선을 무대로 한 호러물

휴전선 부근 부대들은 대부분 바비큐 벙커라고 부르면서 쓰지 않고 내버려두는 벙커가 있다. 밤에 잠입한 북한군이 군인들이 잠자고 있는 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넣어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이 쓴 첫 번째 이야기는 이 바비큐 벙커를 소재로 삼고 있었다. 서해안 어느 무인도에서 일개 분대가 전멸된 사건이 발생한다. 병사 하나가 미쳐서 총을 난사했다고도 하고, 해안에 상륙한 북한 군대가 모두 죽였다고도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그때부터 무인도 앞바다에선 유독 난파당하는 배가 많아졌을 뿐이다. 삼십년이 흐르고 또다시 일개 분대가 비상경계를 서기 위해 무인도에 들어온다. 그들 때문에 굿을 마치지 못하고 섬에서 쫓겨난 무당은 자신이 불러낸 귀신을 아직 달래 보내지 못했다고, 섬을 떠돌고 있을 귀신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분대원들이 하나씩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 상황이 삼십년 전 죽은 한 병사가 남긴 일기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자그마한 무인도를 베트남 전쟁터로 확장한 사람은 <알포인트> 제작자인 장윤현 감독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작가만 할 줄 알았던 공수창 감독은 “<하얀 전쟁>은 병사들에게 깊이있는 사연을 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그 아쉬움도 풀고, 베트남 민중의 수난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장윤현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양을 곧이곧대로 흡수하는, 적도 바로 부근의 뜨거운 나라 캄보디아로, 그 자신이 떠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캄보디아가 그토록 완고하게 이방인들을 거부하리라는 사실도 그 무렵엔 짐작하지 못했다.

짙은 안개가 출몰하는 킬링필드, 이방인의 촬영을 거부하다

스물여덟 시간에 걸친 동굴 촬영 끝에 벌컥 화를 내기도 한 석형징 촬영감독은 “캄보디아는 단 한컷도 쉽게 내주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알포인트> 주요 배경이 된 프랑스 저택은 캄폿 근처 복코산에 있었다. 크메르루주는 그 저택을 최후 항전지로 택하면서 적대세력으로 지목한 수백명을 함께 끌고 갔고 막바지에 몰리자 거의 전부를 학살했다. 버려진 채로 핏자국처럼 붉은 이끼가 자라난 저택.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가도 몇분 뒤에 사라지고, 또다시 몇분이 지나면 안개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는 이상한 지역. 공수창 감독과 스탭들은 칼날처럼 내리꽂힌 저택 뒤 절벽에 보초를 세워 두고 언제 올지 모르는 안개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안개와 햇빛을 기다렸고, 세관에 묶인 필름을 기다렸고,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고, 살수차가 땅을 적시기를 기다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걱정된다, 걱정돼. 첫날부터 이러는데…”라고 수군거리는 스탭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불안만 가득했던 감독은 “나도 내가 걱정된다”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형 성질 알아서 하는 말인데 현장에선 절대 화내지 말라”는 박찬욱 감독의 조언을 꼭꼭 담아두었지만 치밀어오르는 스트레스까지 모른 척하진 못했다.

공수창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혼자 그려보던 대로 “정글 사이로 안개가 감돌고,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인도차이나 밀림은 미군이 고엽제를 살포해 말려 죽이고서야 정복할 수 있었던 요새였다. 그 질긴 생명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카메라와 조명기구를 들고는,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3년 가까이 시나리오를 써온 공수창 감독은 자신이 기록한 글자 안에 갇힌 듯했다. 그는 풀잎이 순간 백색으로 보일 정도로 환한 평원으로 옮긴 다음에도 글자 사이로 떠올랐던 밀림의 이미지를 버리지 못했다. 작가와 감독 사이의 멀고도 먼 간극. 마흔이 훌쩍 넘어 데뷔한 공수창 감독은 시나리오만 쓸 때와는 다르게 과연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까라는 커다란 고민부터 “배우가 독있는 벌레에게 물리면 어떡하나”라는 소심한 걱정까지 모두 짊어지고 살았다. 감독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않아도 좋은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연출할 줄 알았더라면, 왜 그것도 못해? 그냥 연출하면 되잖아, 라고 감독들을 모질게 구박하진 않았을 텐데”라고 미안해하고 있다. 그가 이정도면 어렵지 않게 연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구상했던 <알포인트> 이야기 중에는 지금보다 더 복잡한 구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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