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상병은 사무보조로 일하는 예쁘장한 베트남 처녀와 장난처럼 사귀고 있다. 그러나 처녀는 자신과 결혼해서 한국으로 데려가주지 않으면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오 상병을 위협한다. 궁지에 몰린 오 상병은 행정병이라는 보직을 이용해서 매복작전지역을 처녀가 살고 있는 마을 근처로 설정하고, 밤늦게까지 처녀를 사무실에 붙들어놓는다. 그날 밤 혼자 마을로 돌아가던 처녀는 베트콩으로 오인당해 매복조의 총에 맞아죽는다. 그리고 알포인트 수색작전이 시작된다. 사창가에서 총을 숨기고 있는 창녀를 사살했던 최 중위와 죄없는 처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오 상병, 그들과 함께 떠난 일곱명은 모두 베트남 여인을 죽였던 경험이 있는 군인들. 그들은 알포인트 안에서 공포의 퍼즐을 맞춰가다가 자신들이 모두 같은 여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포인트>는 한 여인의 원혼이 베트남 현대사를 감싸안고 있다는 전제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손목에 방울을 달고 흰 아오자이를 입고 나타나는 알포인트의 소녀는 프랑스 군인들과 찍은 사진 속 소녀이고, 치명상을 입은 채 대나무 숲에 방치된 베트콩 소녀이고, 한국군을 암살하고 자신도 살해당한 사창가의 테러리스트다. 그러나 공수창 감독은 오직 최태인 중위만이 그 소녀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은 모두 다르다. 오 상병은 ‘정숙아 기다려라’라고 적힌 철모를 쓰고 있는 옛 동료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원혼에 시달린다. 진 중사는 사라진 소대원들을 찾지 못하면 증거를 조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 명령을 모욕으로 여기므로, 정말 실종된 무전병을 발견하게 된다. 최 중위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한 소녀를 죽였다.” <이벤트 호라이즌> <유혹의 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죄지은 자들은 망각을 넘어 돌아온 가해자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이다. 원한으로 포박당한 그들은 죽어서도 탈출할 수가 없다. 베트남은 <알포인트> 원안의 배경이 되었던 무인도보다 넓은 땅이지만, 한번 발들인 자는 돌아갈 수 없는 저승과도 같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폐쇄된 공간이다.
죽은 전우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총든 군인들
직업군인의 아들이었고 전쟁영화를 좋아했던 공수창 감독은 이처럼 수만명이 뒤엉켜 싸울 수도 있었을 전쟁터에서 스펙터클 대신 세밀한 공포를 포착했다. 그는 “총을 든 군인은 소복 입은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죽은 동료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함부로 총을 들이대진 못하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 자신이 겪은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수창 감독은 군대 시절 한밤중에 보초를 서다 두 소년을 통과시켜준 적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붙잡으려 했지만, 아이들은 사라진 뒤였고, 함께 보초를 서던 신참은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 전 부근 마을 저수지에 중학생 두명이 빠져죽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아이들을 쫓아갈 수 있었던 건 총을 갖고 있어서였다. 그때는 귀신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낮에 들은 이야기가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공수창 감독이 펜으로 써내려가고 카메라로 생명을 준 군인들은 공포를 이기기 위해 총을 든 손에 힘을 주면서도 죽은 전우가 돌아오면 무너져내린다. 영화 속에서 여섯달 전에 실종된 수색대원들 역시 총을 들고 있는 순간엔 무서운 게 없었을 것이다.
사라진 53대대 수색대원들의 사연
실종된 두 명의 전우를 찾아 ‘알포인트’로
공수창 감독은 <알포인트>가 여섯달 전 실종되었다고만 설명하는 수색대원들의 사연을 생각해 놓았었다. 종전을 1년 앞둔 1972년 베트남, 강 대위와 소대원들은 정보를 캐낼 포로 한명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들은 숲속에 잠복하지만, 계피를 채취하러 나온 민간인 중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그들을 목격한다. 대원들은 할 수 없이 아이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모두를 사살해 땅에 묻는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중 유독 예쁜 소녀 한명을 살려두기로 한다. 그날 밤, 가장 먼저 윤간에 나선 병사 두명이 군번줄이 사라진 시체로 발견되고 소녀는 온데간데없다. 강 대위는 군번줄을 되찾고 사건을 깨끗하기 마무리하게 위해 소녀의 흔적을 쫓아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알포인트로 빨려들어갔다.
베트남전이라는 공포의 기억에 다가갔다 복귀하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온전한 영혼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다. 장 병장은 혼자 살아남았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봐버린 눈동자를 찌른 파편의 흔적은, 아물지 않을 것이다. 공수창 감독은 눈먼 병사 자신은 볼 수가 없을 그 상처를 발견해준 사람이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나면 그 전쟁을 평가하는 문학이 나올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내전으로 수백명이 죽은 땅 위에 카메라를 세우고 완성한 <알포인트>는 그 대답은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끝내 귀국선을 타지 못한 병사들이 어떤 공포 앞에 던져졌는지, 그 악몽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시 기억해낼 수 있다면 언젠가는 대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수창 감독은 몇겹 장벽을 넘고 자신과 싸우면서 멀고 먼 기억으로 다가갔고, 무사히 이땅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