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바친다
1995년 여름
백수 시절. 무명가수 강민규와 연일 음주행각을 벌이던 중. 호프집 주인, 포커 하우스 주인 등과 어울려 가리봉동의 한 지하 단란주점에서 문제의 소년소녀들과 처음 조우하다. 이런 청소년들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코앞에서 보니, 장난이 아니다. 흰색 홀복에 맞추어 흰색 고양이테 안경에, 흰색 고무장화를 신은 깜찍한 소녀를 아직 기억한다. 발에 땀이 찬다고 벗은 장화 속에서 나온 그 작은 발이라니! 그 난잡한 술자리가 끝나고 가리봉 오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토하면서 쓰리라고 다짐하다.
1995년 겨울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서 탄 돈으로 가리봉동과 화양리를 오가며 취재 시작. 뺀질거리는 아이들에게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다. 화양리에서 삐끼의 유혹에 넘어가주다. 퀘퀘한 지하단란주점. 약 한 시간 동안 싸가지 없는 소녀 세명과 노닥거리며 뚜껑이 따진 가짜 양주 두병과 안주 두 접시를 먹다. 술값 시비 끝에 건달들 앞에 불려가 가지고 있던 십만원짜리 수표 몇장을 포함해 지갑을 탈탈 털리고 택시값 오천원을 받아 나오다. 그 이후로 취재차 건 뭐 건 다시는 그런 술집에 가지 않음. 일단 취재를 중지하다.
1996년 봄에서 여름
우노필름 사장 차승재와 매주 목요일 아침 일곱시에 만나 아이템 회의를 너댓 차례 갖다. 내가 받은 아이템은 지금 싸이더스에서 김인식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로드무비>의 원안이다. 어느 게이의 사랑이야기. 매력적이었지만 난 그즈음 나온 <증오>와 <키즈> 얘기를 해가면서 내 아이템으로 차승재씨를 설득해내다.
가리봉에 방을 얻다. 하지만 방 안에 있을 수나 있었지, 애들과 친해질 기회는 없다. 거리에 나가 선글라스 노점상을 하면서 비로소 정식으로 가리봉 멤버가 되어 애들, 건달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기회만 되면 애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다. 그때 애들은 나를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알코올 문제로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으로 간주하고, 때때로 ‘형은 술 좀 작작 마시라’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건달 중 한명은 내가 어린 여자애 취향이 있는 것으로 넘겨짚기도 한다. 그때 그곳 여자 애들에게는 ‘가리봉 죽돌이’라 불리다.
새로 합류한 김재원 PD는 나에게 삐삐를 채워주고, 다른 동네 다른 부류의 소년소녀들을 대준다. 그들에게는 내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밝히고 녹음을 해가며 취재. 그 봄에서 늦여름까지, 난 매일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 집에서 기어나와 가리봉에서 홍대 앞, 미아리, 이태원, 화양리 천호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밤새도록 애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얘기하다가 아침 출근길 러시아워가 되기 직전 집으로 혹은 가리봉 방으로 들어가곤 하다. 그 엄청난 음주운전 행각에도 불구하고 무사했던 점, 아직도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가리봉 오거리 ‘조이 커피’ 이층. 새벽. 난 여자친구와 차를 앞에 두고 무료하게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거리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난 잽싸게 뛰어내려가 무슨 일인지 파악해 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경찰은 칼을 들고 도망가던 청년을 체포해 개 끌듯이 끌고 나온다. 청년은 엉망으로 취해 있다. 때마침 건달 하나가 옆구리에 피를 흘리면서 나타나 몽둥이로 그 청년을 무자비하게 팬다. 경관이 있거나 말거나. 술값 시비 끝에 취객이 건달에게 칼부림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다시 커피으로 올라온 나를 보고 여자친구가 조용히 웃는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너만 유일한 먹물임을 어쩜 그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냐, 면서. 내가 가엾어 보였나보다. 노동운동을 했던 그녀는 가리봉 벌방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해 여름, 가리봉 애들 여덟명을 데리고 차를 렌트해 동해안 망상해수욕장을 다녀오다. 애들과는 많이 친해져 있다. 소년들은 자기 고민들을 터놓고 얘기한다. 나이 많은 남자들을 유난히 경계하던 소녀 하나도 이젠 내게 눈웃음을 친다. 소년들은 내게 질투를 느낄 정도가 된다. 난 그때쯤 취재를 접고 김재원 PD와 속초로 떠난다. 집필 여행이다.
1996년 가을
바다가 보이는 속초의 원룸 오피스텔. 녹음테이프 십수개, 메모를 끼적여둔 노트 몇권을 앞에 놓고 난 복통을 일으킨다. 내시경 검사를 한 의사는 ‘어유, 되게 아프셨겠어요’ 하면서 급성 출혈성 위장염이란 진단을 내린다. ‘릴랙스하면서 사세요’하면서 준 약 한 뭉치를 난 다 버리고, 한약을 지어 먹는다. 담배, 술, 커피를 현저히 줄이고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릴랙스 좋아하시네.
속초의 동우전문대 여학생들과 가끔 어울리다. 은근히 섹스 얘기를 묻자 한 소녀가 말한다. “나쁜 잠이요? 전 나쁜 잠은 안 자요.” 제목을 건지다. 틈틈이 읽은 파스빈더 전기에서 파스빈더와 그 애인간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가 흥미롭다. 란과 창의 관계에 써먹기로 한다. 대단히 재미있어진다.
집단강간, 화장실 창문으로 탈출하기, 술집 진짜 사장과 건달들의 행태, 칼부림까지 가는 술값 시비, 보호관찰소에서의 구타, 장롱 속에서 가스 불기, 창이 뱉는 섹스에 관한 대사들, 벌방 속에 갇히기, 건달에 맞고 부상당한 여자애에 관한 얘기, 삐끼치다 아버지 만난 일, 쓰레기뿐인 바다, 하교길 학생들 속에 갇힌 일, 공중전화 박스에서 난장 꿀리기, 경찰에 반항하다 가스총 맞은 일 등등이 다 취재 중에 보거나 들은 것들이다.
1997년 1월
저녁 무렵 시나리오를 들고 우노필름에 나타나다. 전화를 걸고 왔건만 사장도 없고 아무도 없다. 회사 뒤 영동시장 골목에서 진행되고 있는 <비트> 촬영현장에 모두 나갔단다. 시장 골목에서 만난 차승재는 그 옆 아무 다방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건네준 봉투를 열고 시나리오를 꺼내더니 아무 말 없이 읽어 내려간다. 난 당황한다. 하지만 곧 수습한다. 그래, 그냥 그 자리에서 읽어라. 시나리오 갖다주면, 읽었는지 말았는지 몇주가 지나도 연락 한번 없는 자식들보단 낫다. 한 시간도 채 안 돼 마지막 장을 덮고 차승재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재밌는데. 뜻밖이라는 투로.
약 한달 뒤
난 속초의 어느 콘도미니엄에서 조감독 김광중과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다. 침실에서 전화소리에 잠을 깬다. 밖에서 김광중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린다. 감독님, 아직 자는데요. 노크를 한다. 서울에서 배우 모집을 위한 포스터, 전단을 만들고 있던 PD 김재원이다. 차승재가 작품을 엎으려한다, 빨리 올라와라, 급하다.
묵묵히 차를 몰고 서울로 달린다. 김광중이 어렵게 침묵을 깬다. 감독님, 올라가서 제발 차 사장이랑 싸우지 마세요. 그냥 묵묵히 달린다.밤. 회사엔 김재원밖에 없다. 차승재는 내일 아침에 만나자는 전갈만 남겨놓았다. 물 건너간 게 확실하다.
여자친구와 막걸리를 마시고 여관에 든다. 발기가 되지 않는다. 여자친구가 조용한 목소리로 위로한다.
1999년 가을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소위 뜬 감독이 되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영화사 봄의 오정완 사장 패거리와 어울리게 된다. 오정완에게 슬쩍 냄새를 풍긴다.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차승재가 하지 않으려고 해서 고민이라고. 그리고는 모른 척 술만 마시다. 다음날 오정완에게서 바로 전화가 온다. 잘 들어갔냐는 안부인사 끝에 어제 얘기한 시나리오 좀 보여달라고, 퀵서비스로 보내달라고. 이렇게 정중하고 단순한 부탁을 거절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24시간 뒤. 다시 오정완에게 전화가 온다. 시나리오 너무 잘 읽었다, 각본료랑 연출료 얼마 부를 건지 생각해서 회사로 나와라. 그녀의 기민함에 혀를 내두르다.
2000년 봄.
병원행 1. 크랭크인을 코앞에 두고 고사를 지낸다. 그 뒤풀이. 젊은 스탭들은 유난히 술탐을 내서 이런 날 사고를 내곤 한다. 나도 꽤 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촬영 스탭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연출부가 팼단다, 감독에 대한 험담을 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영동세브란스 응급실. 새벽. 술은 이미 다 깼다. 검사결과 심각한 이상은 없다. 나는 괜히 죄없는 조감독 김진민을 뒤로 끌고 가 괴롭힌다.
병원행 2. 배우 세명은 매일 고수부지에서 오토바이 연습을 한다. 배우 봉태규가 회사 앞마당에서 오토바이를 꺼내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다 갑자기 부앙! 하더니 벽에 들이박고 쓰러진다. 격심한 다이어트중이던 봉태규는 기절해서 일어나지 못한다. 마침 이재용 감독과 오정완이 차를 타고 오다가 현장을 목격한다. 119는 빨리 오지 않는다. 이재용 감독이 자기 차에 봉태규를 싣고 병원으로 간다. 오정완이 회사로 들어가며 PD 강봉래에게 한마디한다. 형, 정말 걱정되겠어! 마치 자긴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병원행 3. 강봉래가 사무실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자기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 속을 보여준다. 오백원짜리만한 구멍이 나 있다. 자기도 아침에 거울을 보다 깜짝 놀라 병원에 갔다 오는 길이란다.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증. 난 크랭크인을 축하한다며 자기 집에 불러 성대한 게와 새우 파티를 열어준 그의 아내 조은주의 얼굴을 떠올린다.
병원행 4. 용호 역을 맡은 성지루가 택시 타고 도망가려는 취객을 쫓는 장면. 일분이 훨씬 넘는 테이크로 동선이 복잡하다. 몇번의 리허설을 마치고 첫 번째 테이크를 찍는다. 첫 번째인데도 성지루는 꽤 비슷하게 해낸다. 촬영감독과 연출부를 모니터 앞에 모아놓고 몇 가지 수정할 곳을 지시하는데, 성지루의 손에 묻은 피가 진짜 피라는, 손을 다쳤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시를 다 끝내고 두 번째 테이크를 가려는데, 강봉래가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단다. 난 한두 테이크만 더 찍으면 오케이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지루를 병원에 보내놓고 우린 다른 촬영을 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성지루는 붕대를 잔뜩 감고 있다. 중상이었던 모양이다. 두 번째 테이크를 찍을 수 없는 거다. 나는 첫 번째 테이크를 다시 반복해서 모니터링 하고는 오케이를 선언한다.
병원행 5,6. 야간 촬영. 강봉래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왔다갔다거리는 게 거슬린다. 웬 똥폼이람? 강봉래가 내게 오더니, 어제 미술감독 이진호가 양수리 소품 창고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내서 전치 8주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고사를 잘못 지낸 것 같다고 한탄을 한다. 괜히 신경질이 난 나는 선글라스 타박을 한다. 선글라스를 벗은 강봉래 눈이 토끼눈마냥 새빨갛다. 스트레스성 각막염. 릴랙스하면서 살아야 낫는 거겠지. 다시 조은주 얼굴이 어른거린다.
병원행 7. 보호관찰소 촬영.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조감독은 비가 곧 그칠 거라고 떠들고 다닌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난 철수를 결정한다. 제작부들이 오토바이를 버스에 실어보려고 낑낑대다 포기한다. 제작부장 류우건이 직접 몰고 회사로 가기로 한다. 난 류우건을 따로 부른다. 씩 웃으며, 알지? 아주 천천히 조심해서 와. 류우건도 씩 웃는다. 회사로 가는데 영동대교 앞 길 정체가 장난이 아니다. 무슨 사고가 났음에 틀림이 없는 거다. 운전하는 제작부장 장상필에게 휴대폰이 온다. 류우건이다. 영동대교 입구에서 사고가 나 병원에 실려가는 중이다, 사고난 소품 오토바이를 챙겨달라, 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다쳤는지, 어느 병원으로 실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아아! 정말이지 이럴 수는 없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마누라를 불러내 청요리에 배갈을 마신다. 대낮부터 헤롱거리며 밖으로 나오는데 날이 맑게 개어 있다.
병원행 8. 용호를 피해 창문으로 달아나는 한이 역의 한준. 담에서 뛰어내리다 다리를 다친다. 가리봉동 근처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큰 부상은 아니라는 거다. 한준은 계속 엄살을 떤다. 밉살스럽다. 다음날 연락이 온다. 큰 병원의 진단결과 한준의 부상은 전치 10주 이상의 중상이라고. 그럼, 가리봉동은 의사마저도 돌팔이란 말이야?
드디어 사망사고. 두달 만에 재개된 촬영. 난 두렵다. 이런 연속적인 사고들은 혹시 신이 주는 경고가 아닐까? 앞으로 있을 더 끔찍한 사고에 대한. 제작부장 장상필이 앞으로 촬영에도 강아지를 계속 쓸 건지 묻는다. 물론이다. 장상필은 머리를 긁으며 강아지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푸념을 한다. 벌써 두 마리나 죽었고 지금 찍는 게 세 마리째라는 거다. 어린 강아지들이 폭염 속 강행군 촬영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거다. 뭐라고, 우리 촬영팀에 사망사고가 이미 있었다고? 그렇다면… 하고 난 속으로 안심하기로 한다.
마지막 병원행. 마지막 신 촬영. 재촬영이다. 지난번에 서른여섯 시간 이상 찍었지만 폭발하는 장면 외에는 건진 게 없다. 전체적으로 일상적인 톤의 연기만 하다가, 갑자기 죽음의 공포에까지 몰린 연기를 하자니, 신인배우 한준은 어설플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촬영 전 나는 PD 강봉래와 조감독 김진민을 불러다 놓고, 오늘 벌어질 상황을 얘기해 준다. 그러니 모든 입구를 차단해서 한준이 촬영 중에 도망가는 사태를 막고, 김진민은 항상 내 옆에 서서 혹시 한준이 병이라도 깨서 덤비는 걸 막으라고 지시한다. 한준을 불러내 모호한 언질을 준다. 오늘 촬영은 특히 좀 힘들 거다, 다 영화를 위해서고, 너와 나를 위해서다. 그 큰눈을 껌뻑이며 불안해 한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는다.
먼저 한준의 팔에 불이 붙은 장면을 찍는다. 실수로 팔에 화상을 입고 그는 병원에 실려간다. 신경질이 나지만 나는 이제 그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몇 시간 뒤 다시 촬영 재개. 나는 배우 한준을 실제로 죽음의 공포에까지 몰고 가기 위해 큰소리로 쌍욕을 하고, 신발을 집어던지고, 구타까지 한다. 한준은 울면서 부들부들 떤다. 그 번잡한 촬영현장에 침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내 주위 반경 2m 안으로는 스탭 아무도 접근하지도, 눈도 마주치려 하지도 않는다. 제법 만족스럽게 찍혀 간다. 이제 거의 마지막이다. 그 죽음의 공포를 연결하기 위해 나는 또 한번 지랄발광(!)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도 지쳐 있다. 김진민과 성지루가 감독의 지랄발광 없이 죽음의 공포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한준에게 특별 연기지도를 한 시간 정도 한다. 다시 촬영이다. 라이터불을 켜든 한준이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프레임 아웃한다. 비슷하다. 프레임 아웃한 한준이 갑자기 쓰러진다. 스탭들이 웅성거린다. 준아 숨 쉬어, 어쩌구. 뭐, 숨 쉬라고? 나는 대뜸 소리를 지른다. 야, 119에 전화하지 뭐해! 119 대원들은 이 괴상한 아침 풍경에 어리둥절해 한다. 한준을 들것에 태운다. 부러졌던 다리쪽을 잡아도 안 되고, 화상입은 팔쪽을 잡아도 안 된다. 119 대원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촬영이냐고 힐난하듯 묻는다. 주연배우는 119에 실려갔지만 나는 촬영을 계속해서 끝을 낸다. 한준에게서 벗겨놓은 옷을 연출부에 입히고. 난 내 속에 있는 독기를 있는 대로 다 품어댄다. 나는 내가 악마 같다고 생각한다.
2000년 가을
첫번째 스크리닝. 부산영화제.관객은 계속 폭소를 터뜨리고 발을 구른다. 그런데 아이들이 스크린에서 찧고 까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흐른다. 당황스럽다. 지가 만든 영화를 보고 지가 울다니. 소리 죽여 훌쩍거렸는데도 옆자리 소녀가 이상하다는 듯 흘끗거린다. 도대체 왜 눈물이 흐르는지 나도 모른다. 이 모든 고생 때문에, 감상에 빠져서? 천만의 말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이런 정도 일은 어느 촬영현장에서나 있게 마련이다. 그럼 왜? 글쎄.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 아니면 그 모든 애들이 너무 가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