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독일이 경험한 첫번째 ‘리바운드’의 순간, <베른의 기적>
2004-09-07
글 : 김혜리
아버지는 귀향하고 축구팀은 월드컵 우승하니, 소년은 성장하고 독일은 부흥한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사회는, 바닥을 쓸어 한줌의 긍지도 건지기 힘든 수렁이었다. 그 수렁이 오죽 어둡고 깊었으면 독일인들이 재건의 희망을 다시 움켜쥔 일을 가리켜 세상은 ‘기적’이라는 격앙된 표현을 썼다. <베른의 기적>은 독일이 경험한 첫 번째 ‘리바운드’의 순간을 포착한다. 1954년 스위스 베른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거둔 승리가 독일인들을 어떻게 위무했는가를, 축구에 반한 광산촌 소년 마티아스(루이스 클람로스)와 그 아버지(피터 로마이어)를 통해 들려준다.

11년간 러시아에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다 귀향한 아버지와 올해 열한살 난 막내아들은 초면이다. 가장의 생환은 반갑지만 가족은 이미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다. 전쟁 노이로제로 갱에도 적응 못하고, 자식들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울음 같은 분노를 터뜨린다. 막내 마티아스에게 아빠를 대신하는 ‘대장’은 지역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된 축구선수 헬무트. 몇 차례의 어긋남 끝에 축구로 의기투합한 부자는 결승전 새벽 털털이 차를 빌려 타고 베른으로 응원길에 오른다.

<베른의 기적>은 핸디캡을 가진 기수와 말의 역주가 대공황기 미국 서민을 격려하는 <씨비스킷>의 독일계 사촌이다. 그런가하면 아들의 꿈을 격려한 가난한 아버지의 초상은 <빌리 엘리어트>와, 수치스런 역사에 포함된 아버지 인생에 대한 용인은 <효자동 이발사>와 닮았다. 보르트만 감독은 공동체의 기억에 기댄 감정적 호소로 시나리오의 구멍을 메운다. 가족멜로드라마가 엄연한 본론인 이 영화에서 마티아스의 집과 베른의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편집의 겅중거림은 이야기가 수렴하는 종반까지 부담스럽다. 관찰자로 등장하는 스포츠 기자 부부의 에피소드는 생뚱맞다. 당시는 약체였다지만 지금은 축구 강호로 각인된 독일팀의 분전도 쾌감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느슨하게 연출됐다. “전쟁엔 졌지만 축구는 이겼다”는 식의 환호는 남의 마을잔치처럼 뜨악하고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베른의 기적>에는 진심이 펜을 움직여 쓰여진 몇 장면이 있다. 라디오 중계를 듣는 소년이 포로생활에서 아빠가 터득한 비법으로 눈을 감고 상상으로 경기를 관전할 때, “독일 소년은 울지 않는다”고 훈계했던 아버지의 눈물을 “사실 말이지, 독일 소년도 울어요”라고 아들이 다독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독일에서 성공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2002년 월드컵의 어느 찬란한 날이 내 인생을 흔들었다고 회고하는 한국영화가 언젠가 만들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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