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빌리지> 도쿄 시사기 [1]
2004-09-07
글 : 박혜명

서로 아무런 연관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9월11일이라는 시선 붙들기 좋은 날을 개봉일로 정한 일본에서, M.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빌리지>의 시사회가 지난 8월24일 저녁에 열렸다. 애초 자국 내 언론만을 대상으로 한 이 자리에 한국 기자들이 초대받아 간 까닭은 감독 샤말란과 여주인공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가 무대 인사차 도쿄를 찾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와킨 피닉스, 에이드리언 브로디, 시고니 위버, 윌리엄 허트 등 샤말란의 <빌리지>에는 이름만으로도 매혹적인 다른 걸출한 배우들이 있었지만,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이 이방 땅의 마을을 기꺼이 방문한 사람은 감독과 여배우뿐이었다. 샤말란 감독은 “이번 영화의 포인트는 로맨스다. <빌리지>의 초자연적인 힘이 바로 사랑”이라며 처음으로 러브스토리를 담게 된 자신의 신작 <빌리지>를 소개했다. 론 하워드 감독의 딸로 뉴욕의 연극 무대에서 캐스팅된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완성본을 처음 봤을 때 영화가 너무 아름다워 쓰러질 만큼 충격을 받았었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되지만 솔직함이 느껴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첫 주연작을 관객에게 홍보했다.

샤말란 감독의 계산과 욕심이 드러나는 신작

<빌리지>는 3700만달러로 미국 개봉 주말 박스오피스에 데뷔했고, 개봉 4주차인 현재(8월24일)까지 1억700만달러가량을 벌어들였다. 제작비 6천만달러의 영화로는 대단히 좋은 성적이다. 자신의 매 영화를 ‘<식스 센스>의 샤말란’이란 말로 먼저 반응하는 관객이 있음을 아는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는 바로 그들에게 ‘네가 그토록 다시 보여달라고 졸랐던 게 이거란 말이지?’라고 되묻고 있는 듯한 영화다. 그리고 그들이 예상할 만한 것보다 더 많은 대답을 준비한다. 전작들보다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 구조를 전작들보다 훨씬 예상 가능한 수순으로 전개시키는 <빌리지>는 겹겹의 반전이 러닝타임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일정 간격으로 몰아닥치고, 전에 없던 로맨스로 극적 강렬함을 노리며, 비유를 내포한 이야기가 샤말란의 네편 가운데 가장 명징하고 교훈적으로 메시지를 강조하는, 많은 계산과 감독의 욕심을 포함한 영화다.

△ 루시우스 헌터와 아이비 워커는 오래전부터 담아둔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표현한다. 정신질환을 겪는 노아 퍼시 역시 자신에게 친절한 아이비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샤말란의 마을은 1897년 펜실베이니아주 어느 구석엔가 있는, 영화 속에서 아무 이름도 없는 동네다. 마을의 중대사를 이끄는 8명의 원로와 그들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이 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숲 밖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이름이 없는 마을과 달리 ‘코빙턴 우즈’라고 불리는 숲엔 매우 야만적이면서도 인간보다 명민한 생물체가 살고 있다. 그 생물체는 수십개의 뿔이 등에 달렸고 커다랗고 긴 발톱을 휘두르는 무서운 존재라고, 우리 인간과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 공존에 합의했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이 균형을 깨뜨리는 이는, 조용하지만 겁없는 친절하고 성실한 청년 루시우스 헌터(와킨 피닉스)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마을 청년 노아 퍼시(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약을 이웃 마을에서 구해올 목적으로 원로들의 허락없이 임의로 숲에 들어갔다가, 숲속 괴물의 경고 표시가 더 잦아지는 결과만 초래하고 만다. 얼마 뒤 그는 마을 내에서 가장 씩씩한 소녀 아이비 워커(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곧 큰 사고를 당한다. 이제는 아이비 워커가 연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괴물과의 공존 상태가 깨진 위험한 상황에서 이웃 마을에 다녀올 것을 결심한다.

겹겹의 플롯, 반전의 도미노

<빌리지>는 원래 <더 우즈>(The Woods)라는 제목에서 시작했다가 저작권 문제로 뒤에 제목이 바뀐 영화다. “내 영화는 언제나 다른 영화들을 복사해 만들어진다”고 말한 샤말란은 인간과 괴물이 공존하는 영화 <킹콩>과 농장의 평화로운 바깥 풍경에서 힌트를 얻어 <빌리지>의 스토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대한 각색·연출 제의가 들어왔다. 제안을 거절한 대신 샤말란은 <폭풍의 언덕>이 묘사한 시대의 낭만적 분위기를 자신의 영화에 끌어온다.

△연인인 루시우스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아이비는 괴물이 사는 숲을 통과해 이웃 마을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사실 <빌리지>의 인물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숲속의 괴물이 아니다. 루시우스가 겁이 없는 이유는 그가 엄청난 담력을 타고 나서가 아니라 감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숲을 통과해 이웃 마을로 가겠다는 아들이 놀라워서, 엄마인 앨리스 헌트(시고니 위버)는 묻는다. “너는 왜 그렇게 겁이 없니?” 루시우스는 대답한다. “전 비밀이 없어요. 모르시겠어요? 이 마을은 구석구석에 비밀이 존재해요. 그게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거예요.” 되돌아갈 길을 기억하기 위해 몇 걸음마다 조약돌을 놓는 것처럼 하나하나 밝혀지는 마을 사람들의 사적인 기억과 비밀들은 결국 마을 전체가 공유한 두려움의 원인과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는 그보다 한층 깊게 숨겨진 진실과도 맞닿아 있다. 괴물과의 공존이라는 점에서는 <더 우즈>로 불려도 그럴듯했겠지만, 결국 <빌리지>는 제목 그대로 마을에 대한 영화이자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지켜낼 수 없는 가치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비와 루시우스의 사랑도 그 가치에 대한 믿음만큼 순수하고 뜨겁다.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오늘날 섣불리 꺼냈다가는 사기죄로 몰릴 고백이 <빌리지>에서는 마을 전체를 구원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된다. <싸인>이 영적인 존재와 신, 기적에 관한 믿음을 이야기했다면 <빌리지>는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존재해야 할 믿음을 사랑에 결부시킨다.

이 겹겹의 플롯 곳곳에, 반전이 있다. 쓰러지는 도미노 블록들 사이에 일정 간격으로 폭탄이 터지듯, 샤말란은 영화 후반부에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반전의 순간을 다소 뻔한 설정을 무리하게 끌어오면서까지 실컷 터뜨린다. ‘<식스 센스>의 샤말란’을 관용구처럼 쓰는 관객의 입을 근질거리게 만들고자 작정한 듯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서 부정적인 평가도 많은 편이다. <필름 크리틱>은 “관객의 지적 수준을 무시했다”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마지막의 깜짝 지점을 보여주려면 그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야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고 단지 반전을 위해 존재하는 의미없는 상투적 설정을 비판하고 있다. 상상을 통해 공포감을 증폭시키는 히치콕/샤말란의 방식도 후퇴함이나 더 나아감 없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반면 전작 세편을 함께한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고전적인 음악 스타일은 19세기라는 시대적 형식미를 덧입어 이전보다 더 고상해지며, 숲 속 괴물의 형상은 <싸인>에서 인간을 닮은 외계인을 만들어냈던 샤말란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흥미롭게 재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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