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가 돌아온다. 제목은 <형사>. 시대는 조선이고, 주인공은 여형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후속편으로 기대된다. 오랜만에 새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매번 들러붙는 클리셰, ‘돌아오다’라는 표현이 이번만큼은 좀 감동적으로 들린다. 말 그대로 이명세는 근 5년 동안의 미국 작업 일지를 잠시 덮고, 다시 충무로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 촬영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궁금한 마음에 미리 만나보고, 또 예상해본다.
크랭크인 60여일 전.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형사>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무슨 진지한 평을 하기보다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마음으로 지난 5년간의 미국 생활과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 <형사>에 대한 기대를 펼쳐보자. 우선 그가 미국에서의 작업을 잠시 접고 다시 충무로에 입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 짧지 않은 여정은 신작 <형사>의 출생과도 관계가 있다.
이명세,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성공 그 후
2000년 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화려한 성공을 뒤로하고 이명세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나서 호감을 가졌던 토니 스콧의 초청이 있었기에 선뜻 결정한 일이었다. 처음에 그곳에서 시작하려고 했던 작업은 영화가 아니라 CF였다. 하지만 일정이 순탄치 않았다. 잠정적으로 쉬어야 했다. “인터넷 영화를 한번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왕 하는 거, 긴 거나 짧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시나리오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전문 시나리오 작가들이 써오는 작품들도 검토해나갔다. 그중에는 결국 조엘 슈마허가 연출하게 된 <폰 부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닉 놀테가 출연하기로 했던 영화 <뷰티풀 컨트리>는 “두달이나 석달 뒤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 겁이 좀 났다. 우려도 됐다. 존 우(오우삼)가 미국에 와서 처음 찍은 그런 영화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중 첫 작품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본 서구의 관객은 그를 존 우에 비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의 세계가 그보다는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명세 감독 역시 “액션영화감독으로 이름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첫 번째 떠올린 것은 공포영화였다. 여러 편의 다른 구상도 꼬리를 물었지만, 썩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 얘네들이 나한테 결국 원하는 건 역시 액션이구나, 그럼 액션을 한번 보여주마” 생각하고 액션영화 한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영화가 <디비전>이다. <디비전>은 현재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2년째 집필 중이다. 첩보요원들이 주인공이며, 그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는 이명세 감독은 “심플하게 쓸 것”을 유도하면서 자기 생각을 하나씩 보탰다. 그러나 고집스런 시나리오 작가의 집필 의도와 자신의 연출 의도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시간도 덩달아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이 영화를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자” 하고 결정했다.
이명세를 증명하기 위한 영화 <형사>
<형사>는 그렇게 <디비전>에 채우려고 시나리오 작가에게 불러줬던 아이템의 골수만 뽑아 탄생했다. 물론, <디비전>은 그 자체로 여전히 진행이고, 지난해 PPP에 초청됐던 <크로싱> 역시 시나리오 작가가 붙어서 현재 작업 중이다. 두 작품 모두 중도포기한 것이 아니라 보류 중인 셈이다. 이명세 감독은 한국에 돌아와서 만드는 이번 영화 <형사>의 연출에 대해서 “전략을 좀 바꾼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좀더 자신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이번 작품을 통해 성공을 이룬 뒤에,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미국에서 만들 다음 영화들의 조율을 수월하게 하겠다는 장기적인 포석이 깔려 있다. 혹은 이런 조언도 마음을 굳히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해줬다. 지금 감독님에게 중요한 건 어떤 영화를 하느냐가 아니라 뭐든지 일단 찍는 거다. 감독님은 한번 더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보여준 그것이 이명세의 진짜 실력인가 아닌가, 스스로 판단하고 싶을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준비하는 영화가 바로 <형사>인 셈이다.
<형사>는 이명세 감독의 첫 번째 사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의 사극에 대한 애정은 사실 오래된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 있듯 그가 데뷔작으로 의중에 두었던 건 <개그맨>(1988)이 아니라, 무협사극이었다. “엉성하게 찍을 바에야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포기한 청운의 프로젝트를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내가 정말로 뭘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안 해야 할 게 뭔지는 알고 있다. 원래 시나리오 쓸 때도 그렇지만, 사극이라고 해서 기와의 아름다움이라든지, 한국의 풍광들, 그런 것은 찍지 말아야지 싶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미니멀리즘적인 게 나오지 않을까”라고 스스로 예상한다. 그러면서, “빛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 좋았다. 광원을 내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이건 아주 색다른 사극 한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의 폭을 넓혀준다. 세트가 아닌 구조물조차 세트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이명세표 영화의 비주얼은 조선의 배경을 상상의 힘으로 다시 설계할 것이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시놉을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이런 것이다. “내게 시나리오는 부수기 위해 있는 것일 뿐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시나리오를 보고 <수사반장>이냐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내 머릿속에 있는 절반은 글로 옮길 수가 없다. 그걸 옮길 수 있다면 글을 쓰지, 왜 영화를 찍겠는가?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