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원을 추구하는 사랑의 이상향 <2046> [2]
2004-10-2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왕가위의 사랑은 ‘타이밍’이다

소설 <2046>의 미래는 차우의 현실을 복제한 것이었다. 차우는 결코 2046방을 쓰지 못하고 2047호에서 2046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비현실과 현실의 관계, 영화와 삶의 관계이기도 하고, 홍콩의 미래와 과거의 관계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도 왕가위는 기어이 여전히 나이 50을 넘기고도 사랑에 관한 감상을 포기하지 못한다. <2046>은 <화양연화>처럼 사랑을 목발질하며 살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차우는 두명의 수렌을 사랑했고, 수렌의 머리 모양을 닮은, 수렌의 눈매를 닮은, 혹은 수렌처럼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니기만 해도 그녀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사랑했던 그 많은 남자들처럼 차우가 사랑했던 그 많은 여자들은 다 달랐다.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2046 열차에는 나 혼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전야에, 차우가 건넸던 실크 스타킹처럼 착하게 세상을 살아야 받을 수 있는 산타클로스의 선물 같은 것이었을까. 다시 한번 기억은 내 것이 되고 기차는 떠나간다.

동양에선 누구에겐가 견딜 수 없는 비밀이 있을 때 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 비밀을 그곳에 속삭이고는 기억을 밀봉해버렸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 차우는 수렌과 긴 키스를 나누었다. 그는 이제 또 다른 수렌과 육체를 나누지만 입술을 나눌 수는 없게 된다. 사랑에 대신은 없다. 사랑은 타이밍이고, 타이밍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왕가위의 영화 세상에서 사랑이란 정시에 떠나는 기차와도 같다. 기차를 잡아타고 2046에 가볼지, ‘내가 그 구멍이 난 나무가 되어줄게요’라며 여기, 지금 여기에 머물지. 해피 투게더 하기 위해서.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란 모란꽃은 요염하게 웃다가 사라진다. 정말 정말이지. 그 속마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왕가위, 그 새로운 부활의 예감

처음으로 왕가위는 붉은 색 대신 푸른색으로 자신의 영화 제목을 덧입혔다. 그런 <2046>을 보면 화면 저편에서 죽은 장국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과수나 앙코르와트에 가는 대신 미래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실으며, 왕가위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보인다. “우리 다시 시작해자.” 그점에서 <2046>은 <화양연화>의 속편이라기보다 왕가위란 이미지의 전도사가 추억하는 홍콩과 자기 자신에 대한 회고담이자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는 왕가위의 다짐처럼 보인다. 나는 다음 9번째 왕가위의 영화가 또 다른 시작, <타락천사>로 끝장을 본 것 같았던 왕가위가 <해피 투게더>로 이 세상 끝에서 부활했듯이, 그가 새롭게 시작할 것임을 믿는다.

왕가위, 그가 다른 영화를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을 심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 버리기가 힘들었다.

심영섭 / 영화평론가

왕가위 감독이 말하는 <2046>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왕가위 감독을 만나기까지 수없는 반전을 겪어야 했다.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부산에 도착해서 마음을 고쳐먹었고, 허락된 인터뷰 시간 또한 10분에서 1시간까지 몇번이나 바뀌었다. 마침내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 도착한 순간,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근처 분식집으로 라면을 먹으러 나간 것이었다. 선글라스를 결코 벗지 않는 왕가위는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변화를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영화 같은 사람이었다.

-당신은 영화 한편을 찍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을 들이는 감독이다. 하지만 <2046>은 완성하는 데 5년이나 걸렸고, 올해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뒤 다시 편집을 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6개월이면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출연배우가 너무 많았고, 다국적 스탭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스케줄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나는 5년의 대부분을 스케줄을 기다리고 제작비를 기다리면서 보냈다. 영화는 대부분 마지막 18개월 동안 찍었다. 사람들이 칸 버전과 최종 버전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매우 이상하다. 칸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만의 버전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칸 버전이 더 길고 장쯔이 분량이 더 많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두 가지 버전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선택한 것이 아닐까. 차이가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뿐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프린트를 칸에 보냈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CG와 사운드를 손봐야 했다. 파티에 가는 여자가 시간이 없으면 화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완벽하게 차려입고 갈 수 있다. 그 차이일 뿐 결국 같은 영화다.

-<2046>은 1966년이 배경이다. 당신은 자주 196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데, 그 시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이 영화는 <화양연화>와 이어지기 때문에 1960년대가 배경이다. <화양연화>는 1963년에 일어난 이야기였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19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좋아한다. 홍콩은 매우 빠르게 변하는 도시이고, 과거의 흔적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시대와 장소를, 그것들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탁(기무라 다쿠야)은 ‘2046’에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숫자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5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2046’은 어떤 공간인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이상향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사람들은 모두 50년 동안 홍콩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겠다는 중국 정부의 약속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인생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가, 흥미를 가지게 됐다. 2046년은 중국 정부의 약속이 끝나는 해다. 나는 이 숫자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내가 변하지 않을지 혹은 상대가 변하지 않을지 걱정한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둘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2046’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이상이다.

-<2046>은 당신의 전작들처럼 사랑을 말하고 있다.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love story)가 아니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story about love)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가능성을 제시할 뿐 답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매우 거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또한 사람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물을 향한 사랑도 포함한다. 사람들은 모두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가질 수 없는 것만을 그리워한다. 그 때문에 누구나 상실의 느낌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당신 영화 속의 인물들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왜 그들은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 자체의 생(生)이 있는 기억은 대면하고 싶지 않은 순간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뭔가를 잊고 싶어지면 그걸 마음속에 자꾸 떠올리게 되고, 오히려 잊을 수 없다. 이것이 삶의 패러독스다.

-<아비정전>은 과장된 연기를 하던 홍콩 배우들로부터 놀라운 감정을 끌어냈다. 장국영이나 장만옥, 유가령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당시에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당신은 어떻게 배우를 선택하는가.

=그런가. 그 무렵엔 스타들을 그렇게 썼다고 욕을 먹었는데. (웃음) 장만옥이나 금성무, 왕페이 등은 처음 나와 일할 때는 지금처럼 지명도가 높은 스타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그들이 가진 자질을 느낌으로 알아차렸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왜 그렇게 스타를 고집하고 왜 같은 배우들을 반복해서 쓰는지 묻는다. 장쯔이 같은 스타를 꼭 써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지만 <2046>에 등장하는 다섯 여배우들은 모두 내게 의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초우가 꿈꾸는 사랑은 어쩌면 그 다섯 여인의 사랑을 모두 더한 사랑일 것이다. 장기를 둘 때는 포나 졸처럼 하찮은 돌도 꼭 필요하다. 그처럼 잠깐 출연하는 배우들도 제각기 담아내고 표현해야 할 몫이 있다.

사진제공 이십세기 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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