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큼이나 모호한 베일에 싸여 있던 <썸>이 그 실체를 공개했다. <접속> <텔미썸딩>에 이은 장윤현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썸>은 5년의 긴 기다림만큼이나 다양한 기대와 추측을 불러왔다. 결국 <썸>은 세간의 예상과도 다르고, 장윤현 감독의 전작들과도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많은 영화로 나타났다. 마약 탈취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 그의 죽음을 (예견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교통 리포터가 24시간 안에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 한다는 기둥 줄거리는 비교적 심플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고, ‘운명은 의지다’라는 믿음을 설파하려는 시도는 물론 여전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야기의 모티브인 데자부의 여운, 빠르고 화려하고 역동적인 영상의 힘이 압도하는 영화다. “온갖 스타일과 장르를 몰아 만들었다”는 감독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7개월 동안 촬영하고, 3개월 넘게 매만진 정성은 영화 곳곳에 드러나 있다. “데뷔하는 것처럼 긴장되고 떨린다”는 장윤현 감독에게 만남을 청해, <썸>을 특징짓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어디에도 쓰이지 않은, 정형화되지 않은 단어를 제목으로 붙여, 일종의 브랜드나 고유명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처럼, 영화를 본 관객이 “이 영화, 과연 ‘썸’하다“라고 반응할 수 있을지는 10월22일 이후를 기약해봐야 할 것 같다.
Keyword1 FUSION - 장르는 섞이고, 시점은 나뉘고
<썸>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장르를 따지고 들어가면 혼선이 생긴다. <접속>의 멜로 코드와 소통의 주제, <텔미썸딩>의 스릴러 구조와 단절의 주제, 윤종찬 감독이 진행했던 <그녀의 아침>의 판타지적 요소와 데자부라는 소재, 장윤현 감독이 과거 수년간 준비했던 <테슬라>의 SF적 요소와 다세계 개념을 모두 쓸어넣은 영화가 <썸>인 까닭이다. “퓨전으로 보면 된다. 재료가 저마다의 맛을 갖고 있지만, 섞여서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어야 퓨전이다. 그동안 내가 지나왔고, 또 생각해온 모든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멜로, 판타지를 섞어서 한 줄기로 엮었다. 각 장르의 요소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그걸 모아 새롭고 특별한 맛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텔미썸딩> 때 어렵다는 지적을 많이 들어서, 그런 선입견을 지우고 싶었다. 이게 이해가 되나, 설명이 되나, 하는 고민이 늘었고, 그래서 촬영 기간이 길어졌다.” 굳이 정체성을 이야기하자면,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그날의 결론이 바뀌느냐 마느냐’ 하는 점이 강조되는 만큼, 스릴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액션멜로’로 보는 것이 맞다는 설명이다.
장르가 혼재돼 있는 탓에 시점도 복잡해졌다. 데자부와 현실의 시점이 다르고, 배경과 인물에 따라 시점이 바뀐다. 물론 데자부로나 현실로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유진(송지효)의 시점이 중요하게 다뤄지며, 모니터를 통해 강성주(고수)를 거듭 ‘바라보는’ 행동으로 은근한 멜로 무드가 연출되기도 한다. “멜로는 정서적, 감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둘의 시점으로 디테일하게 파고든다. 스릴러는 사건의 진행을 따르는 만큼 1인칭 시점이 적절하다. SF는 신기하게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보여줘야 한다. 이 모든 장르를 아우르다보니, 이전보다는 복잡한 시점의 영화가 되었다.”
Keyword2 DEJAVU - 과학보다 가깝고, 현실보다 먼
<썸>은 데자부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기억과 경험,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남자를 기억해”, “오늘 하루가 내 기억 속에 있어”라고 되뇌이는 여자. 이 데자부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생인가, 평행 우주인가, 아님 닥쳐올 미래인가. “경험했던 하루, 그러나 인지하지 못해서 경험이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하루다. 수십번 수백번 경험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인지하는 건 그중 하루뿐인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린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오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평행 우주나 다세계 가설보다 쉽게 풀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경험, 다른 삶이 진행되는 때는 의식과 현실이 단절되는 시간, 잠을 자거나 눈을 떴다가 감는 순간이라고 가정했다. 유진의 데자부는 모두가 잊어버리는 그 경험, 그 기억의 흔적이고, 이는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운명을 만들어갈 기회로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 데자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어떤 찰나적 직관에 가까운 ‘사인’(sign), 그리고 존재했던 과거로서의 구체적인 ‘기억’이 나란히 이어지는 식이다. ‘사인’은 영상과 음향이 약간 흔들리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기억’으로서의 데자부는 얼굴 뒤로 과거의 사건이 파편처럼 떠오르거나, 바랜 듯한 옐로 톤으로 처리되는 다소 고전적인 기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시감이 중요한 모티브이긴 하지만, 기시감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처리할 생각도 했지만, 이건 엄연히 현실을 타고 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도드라져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예지력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표현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로서의 데자부를 어떻게 영상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던 고민이다.
Keyword3 NEW FACE -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얼굴과 함께
<썸>의 남녀는 젊고 밝다. 장윤현 감독의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멜로에서든 스릴러에서든, 대체로 어둡고 느리고 정적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커다란 변화다. “<접속>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텔미썸딩>이 카리스마 있는 사람들의 얘기였다면, <썸>은 아직 희망이 있고, 싱싱한 젊은 친구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친구들의 얘기다. 전부터 서른 이전의 젊은이들의 얘길 한번 해보고 싶었다.” 우선 강성주는 기존 영화에서 만나왔던 강력계 형사와는 그 외양부터 다르다. 마약 거래 정보를 캐기 위한 위장이긴 하지만, 외제차와 피어싱과 문신이 썩 잘 어울리는 요즘 청년. 피로와 의문과 혼란이 휘몰아칠 때도, 상대에게 손을 흔들며 ‘난 괜찮아’ 하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 습관일 만큼 낙천적인 캐릭터다. “경찰 이미지가 너무 고정돼 있어서, 달리 가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 언제나 남자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사건에 끌어들이는 전작의 여자들처럼, 교통 리포터 서유진도 영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해리 포터>의 영특한 꼬마 숙녀 ‘헤르미온느’의 이름을 ID로 쓰고 있는 서유진은 인간이라면 망각해야 마땅한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려내는 ‘신통력’을 발휘하고, 이로써 자기와 엮인 강성주의 운명을 바꿔놓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는 CCTV로 “어디선가 우릴 지켜보고 있고, 느닷없이 그 목소리를 들려주는” 교통 리포터라는 직업이 주는 신비감과도 맞물린다.
캐릭터가 젊어졌으니 배우들이 젊어지는 건 당연했지만, 고수와 송지효의 캐스팅은 당시로선 의외의 선택으로 여겨졌다. 고수는 박카스 CF에서 비롯된 건실하고 순수한 청년의 이미지가, 송지효는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의 호러 소녀 이미지가 강했고, 둘 다 영화로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 다른 감성을 원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자신처럼 그들 또한 “변신을 필요로 했고, 그러면 신선하겠다 싶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전에 본 적 없는 터프하고 와일드한 고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송지효의 모습은 그런 대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현장에서 당일 대본을 받아 촬영한 이들 ‘초짜’ 배우들의 불안과 혼돈이, 불길하고 숨가쁜 하루를 미덥게 만들어주는 데 일조한 것도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