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영화적 명상, <삼사라>
2004-11-23
글 : 김종연 (영화평론가)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 라마승복을 입은 채 진행되는 기독교 일상신학 강의. 동서(東西)와 성속(聖俗)의 획선을 넘어 전형성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풍경과 여성과 노동의 힘.

인생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구원의 길은 없는가? 어떻게든 이 부류의 고뇌가 찾아오면(발단) 대개는 서사의 산을 오른다(전개). 그리고 그곳에서 갖은 통과의례와 시험을 거치고(위기)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안개 뒤 산정에 올라 대답을 쟁취한다(절정). 그리고 정확히 있었던 그 지점으로 하산하는 것이다(결말). 외관상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난 상태. 이를 일컫는 수많은 이름, 성장, 구원, 해탈, 게슈탈트 변환, 패러다임 시프트 등등. 따지고 보면 영화를 포함해 모든 이야기는 이 소멸과 생성에 관한 종교적 에픽이다. 다만 장르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겪어내야 할 이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모두 일정한 도식에 밀어넣고 구조화한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내러티브 자체의 종교성은 어쩌면 모든 시간예술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한, 구원 그 자체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고뇌가 되는 영화는 이 일정한 도식을 사용할 수 없다. 자칫하면 조악한 ‘영상 설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이른바 ‘종교영화’가 그것이다. 열반(Nirvana)의 대척에 있는,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하는 불교 용어, <삼사라>를 타이틀로 올린, 이 영화 또한 어떤 의미에서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는 선승들의 공안(公案)에 주목하는 138분 동안의 영화적 명상이다.

이러한 <삼사라>의 종교적 서사를 이끄는 길라잡이는, 다섯살 때 라마승단에 들어와 지금은 삼년간의 초인적인 칩거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승려 타쉬(숀 쿠). 어두운 동굴에서 무아경에 빠져 있다가 사원으로 돌아온 그는, 뜻밖에 찾아온 성적 충동에 당황한다. 때늦은 제자의 사춘기에 당황한 스승은, 성행위의 형상들로 생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탄트라 유파 선승에게 제자를 보내 깨달음을 주려 하지만, 제2의 자궁과도 같은 컴컴한 동굴을 이제 막 빠져나와 삶의 경이에 몸을 떠는 제자에게 글과 그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한편 이미 타쉬는 모호한 욕망의 대상이 아닌, 강 건너 마을 추수 축제에서 삼사라계(界)에 실재하는, 아름다운 처녀 페마(종려시)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사라>의 산행은 여기서 대략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나는 타락과 성적 유혹이라는 하강을 겪은 뒤, 다시 산정을 향해 돌아가는 다소 뻔한 종교적 역(逆)산행 스토리이고 또 하나는 뻔하지는 않지만 불가해한 상징들과 선문답적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구루연(然)하는 태도다. <삼사라>는 일단 첫 번째를 택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며 타쉬는 페마의 관능을 품기 위해 기꺼이 파계하고 라마승단이 있는 저편과 마을이 있는 생활인들의 이편을 가르는 강에서 몸을 씻는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 강을 통해 갖는 익숙한 세례의 제스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제작 자본의 영향일까, 영화는 오히려 기독교적인 구도를 환기시키는 편이다. 그곳에서 라마승 타쉬는 완전히 죽고 애견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속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페마와의 육감적인 정사장면들이 따라붙기는 해도, 영화는 성애를 종교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히말라야 산맥과 초원, 사막과 호수의 광활함을 모두 간직한 라다크 지방의 영적 분위기만 가필해 넣을 뿐이다. 카메라는 잠시 넋을 잃고 파계한 라마승이 아이를 낳고 농사일을 돌보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장사치에게 분노하며 추수를 도우러 온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그 동안에도 이 풍경들을 물끄러미 관조한다. 별다른 트릭 없이도 영화가 숭고한 기운을 내뿜는 것은 이 로케이션과 튀지 않으려는 이 특유의 유장함 때문이다.

‘유혹과 타락’이라는 하강 그리고 재상승이라는 전형적 태도를 희석시키는 것은 그러나 라다크의 풍광만이 아니다. 거듭 반복되는 라다크의 계절, 부지런하게 일하고 쉬지 않고 자신이 쓸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상이 창조되는 순간들, 어쩌면 주인공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사에는 영 불필요한 이 노동의 정경들을, 영화는 굳이 매끈한 서사의 곡선들을 끊어가면서도 축약하지 않는다. 이럴 때, <삼사라>는 의도적으로,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노동의 스펙터클을 흔들림 없이 관장하는 또 다른 서사의 축, 페마가 있다.

강물을 오직 성속의 경계로만 인식하는 남편 타쉬와 달리 지혜로운 아내 페마는 부지런하게 매일의 일상에 만족하며 노동을 쉬지 않고 강물을 바다라는 큰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읽어낸다. 급기야 폭력과 욕정에 패배하고 다시 도하하는 남편에게, 처음의 화두, “하나의 물방울이 어떻게 하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넘겨주는 것이다. 영화는 이때, 아슬아슬하게 전형적인 결말을 벗어난다. 타쉬는 산정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삼사라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열린 결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성속의 구분을 떠나 ‘어느 곳에나 도가 있다’는 문구를 이미 알고 있는 페마의 영성(靈性)이다. 언뜻 영성에 있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선언하는 듯 보이는 <삼사라>는 결국, 라마승복을 입고 있는 칼 라너의 ‘일상신학’ 혹은 ‘어느 곳에나 도가 있다’는 탄트라 고승의 깨달음을 기독교적 구원으로 구체화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또 가깝다.

:: 촬영지 ‘라다크’

경이로운 풍광, 작은 티베트

<삼사라>의 여러 가지 의의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라다크’에서 촬영한 첫 영화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나 몇몇 사진집의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렸던 인류의 공동체적 이상향으로 비쳐진 이곳은 ‘종교가 삶이고 삶이 종교’라는 평판 그대로 성속의 이분법적 경계를 우회하려는 영화 <삼사라>의 의도에 적합한 로케이션이긴 했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불교사상을 생활 속에 깊이 받아들여 1000년 넘은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라다크. 만년설이 덮인 험산과 사막, 푸른 오아시스를 함께 가진 이 지역은, 그 경이로운 풍광만 해도 종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성속의 경계와도 같은 곳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지점이고, 정치적으로는 파키스탄과 인도가 지금도 부지런히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덕분에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할지 모르는 시점에 강행된 촬영은 도중에 세명의 라마승과 한명의 독일 관광객이 카슈미르 반군의 총에 사살되는 험한 일을 겪고, 전체가 물에 잠기는 숱한 우여곡절을 통과하고서야 마무리된다. 결국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해발 3500m에 자리한 인류 최후 지상낙원이라는 이곳도 결국 전통을 빙자해 이윤을 남기는 삭막한 도시 문명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된 <삼사라>의 한 부분이었던 것.

어쨌든 라다크의 풍광 자체가 영화에서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한 판 나린 감독의 연기연출이나 미술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최대한 튀지 않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감독 스스로 ‘Zenematography’(‘선’의 zen과 영화촬영의 cinematography를 합성한)라 명명한 이 태도에서 핵심이 된 것은, 현지에서 찾아낸 비전문배우들의 캐스팅. 타쉬의 동료승인 소남, 페마의 원래 정혼자 잠양, 악덕 상인 다와 모두 실제 현지의 라마승, 농부, 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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