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한국영화가 찍지 못한 장면들 [3]
2004-12-08
글 : 박혜명
글 : 오정연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우리형> 장치적 캐릭터는 장치일 뿐… 조용히 사라진 성현과 미령과의 재회

정회석 프로듀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미령(이보영) 캐릭터가 갑작스레 없어진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부분이 가장 아쉽다”고, 상황상 찍지 못한 장면을 별 고민없이 꼽았다. 영화는 성현(신하균)과 종현(원빈)이 고등학교 때 함께 연모했던 여학생 미령의 이야기를 둘의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더이상 담지 않지만, 미령인 그후 아마추어 연극배우와 내레이터 모델을 겸하며 살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성현이 학교 앞에서 우연히 미령을 만나고, 미령이 연극표를 건네주며 “공연 한번 보러오렴” 하며 인사한다. 이 장면을 찍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후반부에 해결해야 될 두 형제의 갈등이 극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부산대를 섭외하고 촬영일정을 잡아보기도 했지만, 찍을 때가 되니 배우 스케줄이 어긋나고 그래서 미루고나니 장마가 찾아왔다.

안권태 l 미령은 이 영화에 잘 맞는 캐릭터이지만 또 전형적인 장치적 캐릭터라 분량을 늘려도 스토리상 유기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판단이 됐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고등학교 시절에서 결론을 짓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 문제를 두고 프로듀서와 황기석 촬영감독과 끝까지 상의했다. 개인적으로 또 아쉬운 건, 성현과 종현이의 아역 분량이다. 고등학교 시절과 성인 시절을 다 찍고 나서 아역 분량을 찍었는데 이미 그때의 스케줄과 러닝타임과 예산만으로는 시나리오대로 다 찍으면 상당히 오버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종현의 관찰자적 시점 내레이션으로 상당 부분 밀고 가버렸다. 아역 시절을 더 찍을 것인가도, 보충촬영하는 날까지 굉장히 고민했던 부분이다.

<인어공주> 물속에서 동화책 읽기, 촬영팀에 뇌졸중 경고

또 하나의 엔딩신이 있었다. 섬마을의 우체국 직원 진국(박해일)과 스무살의 해녀 연순(전도연)이 물속에서 동화책 <인어공주>를 함께 읽는 모습. 엄마 연순의 첫사랑 시절을 딸 나영이 시간여행하듯 되돌아가 지켜본다는 판타지를 담은 이 영화가 생각해둔 또 다른 엔딩신이었다. 마지막 촬영지인 필리핀 세부에서 찍기로 했다. 일정은 전도연이 다른 해녀들과 물질하는 장면 뒤로 잡았다. 그러나 계획한 엔딩신을 찍기도 전에 애초 체류예정기간인 나흘에서 하루가 더 흘러가버렸다. 물속에서 하루 10시간씩, 산소통을 하루 다섯개씩 소비한 수중촬영팀의 몸은 이상징후가 나타날 태세였다. 산소통을 기준치 이상 마시면 혈관 속에 기포가 생겨 뇌졸중으로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한 전문가가 수중촬영팀에 3일 휴식을 권했다. 체류비용이 1일 500만원이니까 엔딩 촬영일 하루를 더하면 추가되는 예산이… 2천만원.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니라 믿고, 크랭크업을 외쳤다.

박흥식 l 진국이 연순에게 글을 가르쳐주며 사랑을 키워간 모습을 연순의 기억으로 상징화하고 싶었다. 둘이 공부하는 장면을 바닷속에서 표현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수중촬영팀이 쉬어야 할 상황이 됐고, 하루만 쉬고 다음날 촬영하려니 서울 가는 비행기가 없다 그러더라. 그래서 나흘 정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에 대한 아쉬움은 현장에서만 있었다. 영화에 안 들어가서 아쉬운 건 없다. 막상 들어갔으면 닭살 돋고 그랬을 거다. 그런 거지, 뭐. 애초에 예정된 걸 현장에서 못 찍으면 뭔가 빼먹은 것 같고 이빨 한두개 빠진 것 같고 그런 아쉬움.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촬영장은 예측불허, 상량식 장면 스케쥴 문제로 하루 전 포기

건축가가 된 철수(정우성)가 언덕 위에 짓던 집말고 또 하나 건물을 짓는 게 있었다. 지반 공사부터 시작해 1층, 2층, 3층 등 차례로 건축물이 완성돼가는 장면. 빌딩이 쌓아올려지면서 시간의 압축과 철수가 건축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다이내믹하고 멋지게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직접 다 지으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 CG로 합성하기 위해 소스 촬영도 했고, 철물 골조를 다 올린 뒤 상량식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스케줄까지 잡아놓고는 촬영을 접었다. 원하는 퀄리티를 얻기 위해선 다른 스케줄과의 조정 등 몇 가지 문제가 생긴 터였다. 김상민 프로듀서는 “상량식 장면은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큰 그림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쉽다”며 “감독님의 의욕이 대단했지만 타협을 잘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재한 l 시간을 계산하면 2년 정도의 흐름이 있다. 그 시간을 압축하는 요소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장면을 인상적으로 찍고 싶었다. 사실 찍다보니 너무 지치기도 했고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포기하게 됐다. 다른 장면들이 어느 정도 시간의 흐름은 보여주긴 하지만 좀더 비주얼적인 영화 장치들을 가져가지 못해 아쉽다. 찍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게 또 있는데, 촬영 전날 접은 장면이다. 수진(손예진)이 오줌을 싸는 등 알츠하이머병이 심해지면서 철수를 옛 연인 영민으로 잘못 알아보는 대목에서 성적으로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이 있었다. 수진이 철수더러 “영민씨, 영민씨” 하면서.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강하게 던지는 장면이다. 그 다음날 “영민씨, 사랑해” 하는 장면으로 충분할 것 같아서 촬영을 안 했는데 넣었더라면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누가 빼자고 한 건 아닌데 지금도 잘한 건지 판단이 잘 안 된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바람이 된 명우’ 찍으려면 외국에서 장비 구해와야

일명 ‘빤스남 거리’. 경찰인 경진(전지현)이 여관에서 마약하던 이들을 검거하는 장면이었다. 경진이 도주하는 빤스남을 추격하는데 바람으로 존재하는 명우(장혁)가 경진을 따라다니며 도와주는 장면. 이 추격전에서 알 수 없는 뭔가가, 즉 바람이 경진을 앞질러가서 빤스남을 ‘자빠뜨리는’ 상황이었다. 전지현을 앞질러가는 바람을 찍는데 자동차에 카메라를 싣고 촬영하는 등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효과와 느낌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 진행된 현장은 전지현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로 아수라장이 됐고, 급기야 간질을 앓고 있던 엑스트라가 한바탕 ‘일’을 치르는 상황까지 겹쳐 촬영은 중단됐다. 육상경주 중계방송 등에 쓰는 케이블캠을 활용하는 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곽재용 l 촬영 전부터 케이블캠을 알아봤는데 국내에선 그걸 다루는 이들이 없었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봤으나 안 되겠다 싶어 포기했다. 중요한 건 바람의 시점으로 경진을 추월하고 도와주는 장면을 찍고 싶었다. 다른 몇몇 장면에서 바람의 시점이 있긴 했으나 이 장면에서 강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한두달 촬영이 지연되고 외국에서 장비를 들여오면 찍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곤란했다. 프리프로덕션이 충분하면 다른 방식으로 고쳐보는 게 가능할 텐데, 결국 프리프로덕션의 문제였다.

<주홍글씨> 마운트 장비 없어 막판에 무산된 헬기 촬영

헬기 두대를 띄워 아래쪽에 있는 헬기의 프로펠러가 회전하는 걸 슬로모션으로 찍는다. 그 헬기가 천천히 빠지면 화면이 쭉 자동차까지 내려간다. 기훈(한석규)과 가희(이은주)가 한적한 강가의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있다가 구출되는 장면은 이렇게 공중 시점에서 역동적으로 잡아낼 계획이었다. 헬기 대여와 공중촬영 허가까지는 어렵사리 받아냈으나(로케이션 장소가 환경보호구역이었다) 카메라를 헬기에 부착하는 마운트 장비가 없었다. 외국에서 임시로 들여와 부착하더라도 헬기와 무선으로 연락하면서 앵글을 잡아 ‘합’을 맞추는 데만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강민규 프로듀서가 첫 번째로 꼽은 아쉬운 장면이었으나 감독은 다른 장면을 더 아쉬워했다. 한석규가 성현아를 그룹섹스의 느낌으로 바라보게 되는 환상장면이 있었다. 사진관 천장에 달린 조각을 올려다보는데 그것이 갑자기 움직이고 어느 순간 그것이 성현아가 되고 정사하는 움직임이 되며 자기도 끼어드는 듯한 판타지. 남자 무용수 4명과 성현아가 한달 가까이 안무 연습을 했고 CG를 위한 소스촬영도 했는데 끝내 포기해야 했다.

변혁 l 국내에서 항공촬영이 얼마나 경험이 없고 열악한지를 경험했다. 항공촬영이 잘 나온 건 <번지점프를 하다> 같은 극소수의 작품인데 그나마 외국에서 찍어온 것이다. 한석규가 등장하는 긴 자동차 도로신도 항공으로 근접촬영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기술적인 난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지형 자체가 이런 촬영을 허용하지 않더라. 판타지 장면도 결국은 기술적인 문제였다. 환상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영화의 전반적인 톤에 비해 너무 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CG를 쓰더라도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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