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조화롭지 못하다. 드라마보다 영화에 죽 몸을 파묻어온 이성재와 영화보다 드라마와 CF에서 윤곽이 뚜렷했던 김현주. 매체가 사람을 결정짓는 건 아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노련하게 다져진 두 기운이 섞인 느낌을 촬영장 한켠에 서서 느낀다. 김현주는 “이래야 다리가 길어 보여요, 오빠” 하거나 “난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오니까 자리 바꿀래”라는 식으로 의사 표현이 매우 분명한데, 군말없이 김현주의 코치를 따르거나 순순히 자리를 바꿔주는 이성재도 상대방의 페이스만을 쉽게 따를 사람 같지는 않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어느 한쪽도 연약해 보이지 않은 두 사람은 그러나 프로페셔널하게 마블링 무늬처럼 뒤섞인다. 농담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울린다. 자기만의 페이스로 각각 카메라렌즈에 집중해도 만들어지는 근사한 조화 그리고 호흡. 동등한 프로의식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결과다.
“망가진 외모,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탈바꿈을 목말라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라는 인간을 버리고 환골탈태해 전혀 딴사람이 되는 것으로 배우란 직업을 스스로에게 먼저 증명하는 사람이, 이성재라고 생각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 <자귀모> <주유소 습격사건> <플란다스의 개> <하루> <신라의 달밤> <공공의 적> <빙우> <바람의 전설>. 뜨끈한 마음과 달리 겉엔 가시가 돋친 청년 철수, 사색하는 유령 칸토라테스, 그냥 늘 꼭지가 돌아 있어 목소리도 딱딱한 깡패 노마크, 궁색하고 치사한 시간강사 윤주, 자상한 남편 석윤, 모범생 출신의 조폭 영준, 알고보니 비열한 화이트칼라 규환, 불륜의 사랑을 감춘 산악등반가 중현, 춤에 모든 걸 바친 남자 풍식. 멜로, 코미디, 액션. 좋은 놈, 나쁜 놈. 관객의 환호, 평단의 인정. 7년간 아홉편을 찍으면서 이것 저것 다 해본 배우. 언젠가 그는 “빨간 영화에선 빨갛게, 파란 영화에선 파랗게”라고 말했다. 인간 이성재, 하면 떠오르는 분위기는 있어도 배우 이성재, 했을 때 그만의 캐릭터는 딱히 집히지 않는다. 오히려 변신이 그를 설명할 일관된 키워드 같다.
그는 자기가 작정하고 이미지를 변신하거나 필모그라피의 장르 궤적을 따져 영화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추남 신석기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신석기 블루스>에서 그가 눈썹을 밀고 머리를 볶고 뻐드렁니를 끼웠다. 더이상 추해질 길도 없는 추남이 됐다 하여 ‘이번엔 추남 변신까지?’라고 묻는 것도 의미없는 일일까? “첫째로는 감독님이 가장 큰 이유예요. 이 시나리오는 솔직히 이전에도 봐오던 느낌의 시나리오였고, 좀 가벼운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망설였는데, 감독님을 만나보니까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를 생각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믿음 때문에 해볼 만하다 생각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못생긴 남자가 보철 끼고 눈썹 밀고 하잖아요. 이거 재밌네, 했죠. 일상적이지 않은 걸 할 때 쾌감을 느끼잖아요. 내 외모가 망가진 걸 보고 관객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대중이 원하는 자기 이미지에만 매달리지 않는 그는, 진짜 추남이 되어버린 사진이 공개되고 주위에서 여전히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을 때도 끄떡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선택기준은 캐릭터보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있고, 자기 느낌에 있다. 이성재는 “나만의 재미, 감동, 여운. 이 세 가지를 보죠”라는 말 뒤에 “전 지금까지 상업영화를 해왔어요”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폭을 넓혀갈 수도 있겠죠. 이 일을 1∼2년 더 하고 말 것도 아닌데…. 마음 같아선 칠십 먹어서까지도 계속 배우를 하고 싶어요. 그것도 젊은 여배우와 투톱으로. 저는 할리우드가 딴것 때문에 부러운 게 아니에요. 숀 코너리가 그렇게 늙어서도 젊고 예쁜 캐서린 제타 존스랑 일할 수 있는 게 부러운 거지.” 이성재는 <신석기 블루스>와 상관없는 질문을 해도 꼭 마지막엔 <신석기 블루스>에 대한 홍보 멘트를 잊지 않는다. 데뷔할 때부터 매니저를 두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현장에서 나 때문에 누군가가 기다리는 걸 못 견뎌해요. 현장 사람들과 섞여서 나도 그 일원으로 있는 게 편하지, 다른 사람이 있으면 내 딴엔 배려를 해야 하니까 딴 일을 잘 못하거든요”라고 대답한다. 꼼꼼하고 조심스런 성격이 무슨 일에서든 드러나는 듯하다.
“요즘은 예전처럼 열심히 시나리오 분석하고, 그렇게 안 해요. 나만의 작업, 내가 만들어놓고 정해놓고 생각해놔도 현장에 가서 감독의 생각과 다를 때는 거기 융화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요. <바람의 전설> 때부터 바뀐 거 같아요. 기본적인 목표만 생각해놓고 현장에서 최대한 인물에 맞게 움직이자. 옛날에는, 어유, 촬영 전날엔 무조건 대본 펴놓고 밤새 책상에 앉아 있었죠. 근데 그게 앉아만 있지 대사가 눈에 들어오나. 그래도 그래야지만 맘이 편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을 많이 열려고 하죠.” 열 번째 영화 <신석기 블루스>에 이르러 그가 갖게 된 10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비슷한 마음에서 나온 듯했다. “열번째까지는 습작이었다고 생각해요, 소설가가 글을 쓰기 전에 습작하는 것처럼. 열한 번째부터는 이제 나만의, 내 첫 번째 영화가 되는 거죠.” 그럼 열번째 영화 <신석기 블루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려는 찰나 그도 아차 싶었는지 “<신석기 블루스>부터 그 시작일 수도 있고요” 라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