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진실 다룬 다큐멘터리
레이몽 드파르동의 <10호 법정, 심리의 순간들>
파리 지방법원 10호실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재판 심리 과정을 소개한 실험적 영화인 <10호 법정, 심리의 순간들>은 2004년 6월 프랑스 관객과 만났고, 2004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선,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인 감독 레이몽 드파르동의 경력과 작품 세계를 먼저 소개해야, 순서가 맞을 듯 보인다.
드파르동은 1968년 5월 항쟁, 프라하의 봄, 베트남전 등 인류의 격동기를 따라잡으며 카메라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사진작가다. 사진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의 영역을 영화로 넓혀가기 시작한 그는, 1969년 소련의 체코 점령 반대 항쟁에서 희생된 대학생의 장례식을 영상화한 것을 시작으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선거 캠페인>), 미디어의 기능과 영향(<리포터>, 1981)과 의료 시설(<응급실>, 1988), 그리고 농촌의 실상(<농부들의 초상>, 2000) 등에도 눈을 돌렸다. 1985년 <텅 빈 거리, 아프리카의 여인>과 1990년 <사막의 포로>를 통해 독특한 스타일의 픽션을 만들기도 한 그는 2002년에는 서구의 식민화 정책을 반대하는 사하라 사막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 영상화했다(<서양을 거부하는 사나이>). 특히 드파르동은 요한 반 데르 쿠켄, 프레드릭 와이즈만 등과 더불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한 경향인 다이렉트 시네마의 미학을 통해 해설과 내레이션을 배제한 채 동시녹음과 몽타주를 영화미학의 우위에 두고 있다.
1994년작 <범법현장>에서 드파르동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경찰 체포의 순간부터 변호사와의 면담까지의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3년, 드파르동과 그의 스탭들은 5월에서 7월까지의 3개월 동안 파리 지방법원 제10호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판심리를 촬영할 수 있는 허가를 얻는 데 성공한다. 1985년 제정된 프랑스 법률에 따르면, 공판심리의 경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에 한해서, 20년이 지난 뒤에 상영이나 방송이 된다는 조건 아래서만 촬영이 가능하다. 따라서 드파르동이 획득한 촬영허가는 프랑스 법률을 뛰어넘는 예외적인 것이다. 매일 수십 가지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심리를 받는 사람들. 드파르동은 이들의 공판 심리과정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는다. 3개월 동안 촬영한 수많은 심리과정들 중에서 개인의 서면동의를 얻은 것 12개를 선별해서 영화화하는데, 이 12개의 공판에서 판결을 받는 12명의 사람들 중에는 우리의 이웃도, 전문 소매치기도, 국적이 없어 불법체류를 하고 추방명령에도 갈 곳이 없는 파리의 불법체류 외국인도 있다.
피의자와 피해자의 엇갈린 입장, 판사의 법적 해설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피의자들의 항변, 피고인의 발언을 비꼬는 검사, 이성보다 인정에 호소하는 변호인의 모습 등 각기 다른 12개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법정의 풍경은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법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사법 시스템과 법정은 유명인사나 거창한 사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공간’이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통된 경험’이다. 일상의 공간과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개인적인 기억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공유된 기억이다. 공유된 개인적 기억과 경험이 영화적 기록을 통해 세상에 전해진다면 드파르동의 프로젝트는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시대의 자료가 된다. 이 점에서 드파르동의 역사관은 영웅사관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역사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위해 드파르동은 코멘트나 내레이션을 배제한 채 카메라의 위치에 주목한다. 그의 카메라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판결을 기다리고, 그 판결에 항의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때때로 조심스럽게 다가갈 뿐이다. 스크린에 보여지는 이들의 이야기보다 더 훌륭한 해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 하나 하나가 시대의 기억으로 승화되는 순간.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드파르동의 카메라는 숨죽여 기다린다.
드파르동은 이 영화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들에 대한 존중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모습을 신중하게 카메라에 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는 데 있다. 법정의 일상적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미장센을 방해하지 않고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맞추었다. 그들은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이야기를 공동의 기억을 위해 용감하게 바쳤다. 우리가 영화에 담고자 한 것은 서툰 변명들, 분노, 반성 등으로 얼룩진 일상이다.” 즉, 기다림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이 바로 ‘진실의 순간들’이며, 이 순간들을 필름에 옮기는 영화적 실험을 통해 우리 시대의 공유된 기억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인고의 시간 뒤에 오는 진실의 순간이 영화적 기록의 역사성을 담보해준다.
2004년 우리는 영화적 기록의 의미와 역사성,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과 카메라를 든 사람의 윤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해주는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홍콩 장르영화는 전진한다
두기봉의 <대사건>
홍콩 영화산업의 스타 시스템 아래에서 대중스타를 기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 우리에게는 90년대 초, 홍콩영화의 전성기 시절, <우견아랑> <지존무상2> <심사관> <천약유정> 시리즈(한국에는 <천장지구>로 소개, 이 시리즈에서 두기봉은 제작을 맡았다) 등으로 알려진 두기봉 감독은 주윤발, 유덕화, 오천련, 주성치 등 주연배우들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거나 홍콩 영화산업의 침체와 더불어 기억 속에서 잊혀진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두기봉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스타일을 축소하거나 재생산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오우삼이나 성룡과 달리 홍콩에 남아 끊임없이 장르영화를 제작했고, 90년대 후반 작품에서부터는 점차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감독이 되었다. 사실 현재 홍콩과 중국 영화계에서 오우삼이나 왕가위보다 더 많이 언급되고 존경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감독이 바로 두기봉이다. 최근 2, 3년 동안 두기봉 감독은 홍콩의 금상장과 대만의 금마장에서 감독상을 독식하고 있다.
올해도 홍콩과 중국에서는 두편의 두기봉 영화가 개봉했다. 각각 2004년 6월과 10월에 개봉한 <대사건>(大事件)과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는 최근 두기봉 감독의 작품 노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996년 자신의 영화제작사를 설립한 이후 두기봉 감독은 대중의 기호에 맞는 장르영화와 자신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투영한 개인적인 작품의 제작을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영화(주로 위가휘와 공동감독의 작업방식을 택한다)가 유덕화, 정수문 주연의 ‘남녀관계 3부작’(<고남과녀> <수신남녀> <예스터데이…>)과 금성무, 양영기 주연의 <턴 레프트, 턴 라이트> 등이고, 후자에 속하는 영화가 <암전> <더 미션>
등이다. 이중에서 그가 자신의 영화사에서 제작한 <비상돌연> <진심영웅> <암화> 등 전형적인 홍콩누아르의 변주를 보여준 영화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암전>과 <더 미션> 등은 그의 변화를 확실히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네고시에이터>를 연상케 하는 <암전>에서 유덕화는 댄디 보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말 ‘쿨’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직의 보스를 경호하는 사회 주변부의 인물들을 묘사한 <더 미션>에서 황추생, 오진우 등 주로 조연에 머물렀던 6명의 주연배우들은 오우삼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화려한 총격전보다 총격이 일어나기 전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 영화 화면에서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었다. <대사건>은 이러한 두기봉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영화들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할 영화다. 일련의 ‘두기봉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사건>에서도 그의 몇 가지 영화적 장치들이 눈에 띈다. <암화>의 당일 정오 12시, <암전>의 3일,
의 하룻밤 등 제한된 상황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길 좋아하는 그가 이번에는 홍콩 시내 한복판의 서민아파트라는 제한되고 밀폐된 공간으로 인물들을 밀어넣고 있다. 여기에 경찰이 불안에 떠는 홍콩 시민들을 조종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중매체를 이용하고, 경찰과 대치한 용의자들이 이것을 역이용하는 흥미로운 상황이 덧붙여진다. <대사건>의 인물들 또한 두기봉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악 구분이 모호한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음식을 못하는 인질과 부하들을 위해 손수 밥을 짓는 보스와 용의자 검거에 밥먹을 시간조차 없는 강력반 형사가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를 먹고 연신 방귀를 뀌어대는 상황 등은 폼으로 무장한 수많은 홍콩 누아르영화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부한 인물묘사이다. <더 미션>
등에서 이미 보여줬던 고도로 계산된 장면 구성과 액션 연출 또한 <대사건>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영화 초반 7분에 달하는 경찰과 용의자간의 롱테이크 총격신은 이러한 두기봉 연출의 정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더 미션>의 총기 조립 장면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된 화면 분할법은 <대사건>의 한정된 공간에서의 효과적인 사건 전개 수단으로 유용하게 재사용되고 있다. 올 칸영화제에 출품돼 ‘홍콩 최고의 장르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임현제, 진혜림 주연의 <대사건>은 얼마 전 폐막한 금마장영화제에서도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수많은 장르영화 제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내공을 쌓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두기봉의 존재는 어둡기만 한 홍콩 영화계의 현실에 희망의 불씨를 남겨준다. 불혹의 나이를 막 넘어선 이 중년감독은 아직 현재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