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목! 2005 한국 호러영화 [3] - <분홍신> <올(가제)> <병원기담>
2005-01-25
글 : 오정연
글 : 김도훈
사진 : 정진환
사진 : 오계옥

무희의 원혼이 부르는 핏빛 욕망, <분홍신>

*시놉시스

황사로 뒤덮인 회색의 도시. 남편을 떠나와 새로운 병원의 인테리어 공사에 열중하던 30대 초반의 여의사 선재는 지하철 선반에 놓여 있는 주인없는 분홍색 구두 한 켤레를 홀린 듯이 집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분홍색 구두는 라이벌에게 잔인하게 다리가 잘려 살해된 일제시대 무희였던 옥이의 원혼을 담고 있었고, 분홍신에 원초적인 욕망을 느끼는 선재와 태수, 주변사람들의 삶은 서서히 끔찍한 악몽 속으로 빠져든다.

*모티브

제작사인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주워온 분홍색 끈으로부터 <분홍신>은 시작되었다. 끈에는 ‘의외의 곳에서 행운이 찾아온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고, 주변사람들은 “왠지 무섭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의 사연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물건을 줍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거기서 매력적인 호러영화의 가능성을 본 제작진은 곧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고,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친 시나리오는 <와니와 준하> 이후 차기작을 준비하던 김용균 감독의 손에 들어갔다. 사람의 다리를 잘라버리는 원혼이 담긴 분홍신은 언뜻 안데르센의 잔혹동화를 연상시키는 소재. “과거의 호러영화들이 비디오 테이프나 전화기 같은 물건들을 공포의 매개체로만 사용했다면, 분홍신이라는 존재는 소유욕을 공포로 돌변시키는 입체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라는 것이 김용균 감독의 설명이다.

*공포의 방법론

“등장인물들이 악몽에 휘말리는 현재는 거칠고 창백한 질감을 사용해서 묘사할 생각이고 과거의 장면들은 디지털 색보정을 거쳐 복고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끔찍함을 끌어낼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서 시작된 저주가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발생시키는 공포를 극적인 대비로 표현하기 위해, 김용균 감독은 영화미술 경력은 없지만 설치미술 작업들을 해온 임형태 미술감독을 끌어왔다. “관객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그로부터 리얼리티를 확보하면서도 전형성을 벗어나는 비주얼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라는 것이 김용균 감독의 행복한 비명. 다리가 잘려나가는 잔혹한 장면 등 신체 훼손의 극렬한 공포심이 도드라지게 묘사되어 있는 시나리오지만 “호러영화의 전형적인 비주얼에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건드리는 시도”들이 본격적인 프로덕션 단계에서 더해질 예정이다.

*오리지널리티

장르영화의 뼈대를 구축하는 기본틀에서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 김용균 감독의 생각이다. 대신에 그는 “기본적인 전형성은 가져가되 이야기의 디테일이나 캐릭터, 프로덕션디자인들에서 조금씩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뻔하고 익숙한 이야기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감독이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은 캐릭터의 입체화. 예를 들어, 기존의 한국 호러영화들이 아역배우를 단순하게 이용했던 것에 비해 <분홍신>의 태수는 분홍신을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엄마와 경쟁하는 입체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그럼으로써 신발에 담긴 과거의 욕망이 주인공인 선재와 그의 딸인 태수에게까지 전해지는 공포의 ‘현재성’을 획득한다. “단순히 원혼 그 자체보다는 인간 마음속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김용균 감독의 진솔한 야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만들어진 장르영화에 대한 욕심이 있고, 그것을 내 식으로 잘 소화해내고 싶다. 전작인 <와니와 준하>와 비교하더라도 감독 김용균의 감성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와니와 준하>도 <분홍신>도 결국 인간의 다양하고 양가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니까.”

가발이 나를 조정하고 있어! <올(가제)>

*시놉시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지현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동생 수현을 간호하기 위해 결혼까지 포기해가며 정성을 다한다. 어느 날 지현은 항암제로 인해 머리가 빠진 동생을 위해 탐스러운 가발을 선물하고, 수현은 가발을 쓰면서 점점 생기를 찾는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가발은 수현을 점점 딴사람으로 만들고, 지현은 변해가는 동생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모티브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고생을 다룬 <세탁기>, 가난 때문에 존속살해범이 된 탈옥수의 인질극을 10분짜리 롱테이크에 담아낸 <자장가>, 보험료를 노리고 철로 위에 드러누운 해직 노동자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그린 <빵과 우유>. 전직 무술감독 출신 독립영화 감독 원신연의 최근 작품 목록이다. 그런 그가 코리아엔터테인먼트로부터 공포영화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것은 지난해 10월. 언제나 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작품을 만들어왔던 그가, 장르적 제약이 가장 심한 공포영화를 제안받은 것은 다소 의외처럼 여겨진다. 이에 대해 원신연 감독은, 자신이 썼던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 <구타유발자>가 “한정된 공간에서 4시간 동안 벌어지는 극한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고민 끝에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에게 제작사가 내건 조건은 세 가지 ‘사건의 발단이 되는 가발, 인간의 과거를 기억하는 머리카락, 그리고 (결정적 반전에 해당하기 때문에 밝힐 수는 없지만) 가발을 만든 머리카락의 원래 주인의 정체’였다.

*공포의 방법론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부패한다는 머리카락.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은 그간 수없이 등장했던 익숙한 공포의 코드였다. <올> 역시 원한을 품은 머리카락이 한올한올 스멀거리며 참혹한 복수를 저지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당연히 CG를 떠올리는 이 모든 장면은, 특수분장 등의 아날로그적 방법을 최대한 동원해 구현될 것이다. “조금만 고민하면 대부분은 아날로그로도 해결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시체가 머릿단을 토해내는 장면은 시체모형과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으로, 공포영화의 독특한 색감은 성실한 테스트 촬영으로 재현할 수 있다.”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고, 주요 스탭들은 이미 산더미 같은 할 일을 앞에 두고 있다. 그간 원신연 감독의 영화 속 까다로운 특수분장을 발벗고 나서서 도왔던 이창만씨. 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35mm 단편 <빵과 우유>를 위해 무려 3천자에 달하는 필름을 사용해 어마어마한 테스트 촬영을 감행해야 했던 김동은 촬영감독,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만한, 캐릭터가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김준성 음악감독 등이 그 주인공이다.

*오리지널리티

<올>에 등장하는 두번의 결정적 반전은 감독의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낼 만큼 묵직하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를 희생시켜가면서 극단적으로 강조됐던 일반적 공포영화의 반전과는 차별화된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원신연 감독은 머리카락의 원래 주인과 관련한 첫 번째 반전은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폭력,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집착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해결된 뒤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일 법한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사실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애절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는 “마지막에 죽어가는 가해자를 보면서 관객이 눈물을 짓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공포를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연약한 소녀(수현)의 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남아 못다한 사랑을 이루려는 애틋함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아픔에 대한 풍부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클림트와 뭉크의 그림을 적극 참고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공적인 조명, 밤신, 천둥 번개 등 공포영화의 일반적인 관습은 최대한 배제하려고 한다. 언제나 집 앞에 있었던, 하지만 한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던 나무 한 그루가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올>은 그처럼,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공포영화다.”

병원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공포 체험, <병원기담>

*시놉시스

1942년 경성의 어느 병원, 수진이라는 소녀가 응급실에 실려 들어온다. 수술을 담당한 신경정신과 레지던트 수인은 아이의 치료를 자청하지만, 외상 하나 없이 실어증에 시달리는 소녀는 사고시의 공포 속에서 다시 악몽을 경험한다. 그리고 도쿄에서 돌아온 정신과 교수 동원과 그의 아내 인영은 ‘구미호’ 짓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소름끼치는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다가 무서운 진실에 이르고, 젊은 인턴 진혁은 익사한 여고생의 시체에 얽혀든다.

*모티브

<병원기담>은 신인감독인 박진성, 박진석 형제가 준비하고 있다. 토니 레인즈가 감독한 <장선우 변주곡>와 박철관 감독의 단편영화 프로듀서를 맡았던 형 박진성은 우연히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일본에서 작곡가로 일하고 있던 동생 박진석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박진성 감독은 “어린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던 낡은 개인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오멘>을 읽다가 경험했던 패닉상태”를 회상한다. 이처럼 <병원기담>을 관통하는 코드 중 하나인 ‘병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들은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개인적인 기억들로부터 짚어진다. 그리고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의료행위는 항상 야만적이다. 그러므로 의학의 발전이란, 일체의 의료행위가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야만성을 발견하고 확인해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라는 시나리오의 서두는 <병원기담>의 숨겨진 주제의식을 암시하는 작은 단서다.

*공포의 방법론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구조를 벗어나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연결되는 구조를 지닌 <병원기담>에서 가장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 공포 장치는 병원 그 자체다. 1942년의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병원은 하얀 벽과 깨끗한 시트의 익숙한 이미지가 아니라 낡은 나무의 질감을 가진 일본식 서양가옥의 느낌을 지닌 공간이다. 전체 분량에서 70% 정도가 병원 세트 안에서 만들어질 예정인 만큼 감독들은 스산하게 낡은 병원을 창조하는 데 꽤나 공을 들일 생각이다. 또한 <낙타들> <달마와 놀자>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던 동생 박진석 감독은 전공분야를 살려서 영화 속 음향효과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진행 중이다. “작곡가가 앰비언스(영화 속 현장음)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지만, 앰비언스를 하나의 음악으로 통괄해서 직접 작곡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오리지널리티

<병원기담>의 시나리오는 독창적인 구조와 드라마투르기를 내재하고 있다. 사고로 가족을 잃고 실어증에 걸린 소녀와 치료를 맡은 신경정신과 레지던트, 도쿄에서 돌아온 정신과 부부와 구미호에 대한 민간설화, 젊은 인턴과 물에 빠져 죽은 여고생. 여러 인물들의 악몽 같은 이야기가 ‘병원’이라는 장소를 무대로 섞여든다. 이같은 시나리오가 영화의 투자자나 관객에게 조금은 복잡하게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 걱정하는 감독들은 “장르를 지나치게 비트는 시도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병원기담>은 호러영화의 정공법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호러영화들은 놀이동산의 괴기전 같은 구석이 있다. 돈을 내고 줄을 서서 괴기전에 입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도 즐겁다. 그리고 한번 그곳에 발을 디디면 결코 뒤로 돌아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끝나고나면 여름밤의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모두가 분출하는 아드레날린의 쾌감을 곱씹는다. 괴기전에서 벗어난 것이 기쁘고, 그것을 함께한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쁘고. 호러영화는 이처럼 페스티벌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원기담> 역시 그런 영화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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