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빙의’ 16년 전 죽은 영혼들이 깨어난다, <레드 아이>
*시놉시스
1988년 7월16일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는 대형 열차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16년 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지막 운행을 위해 여수로 떠나는 무궁화호. 첫 근무를 위해 이 기차에 오른 열차승무원 미선(장신영). 승객이 하나둘 객차에 오르고 서울을 출발한 열차는 어느 순간 급정거한다. 잠시 뒤 열차의 운행은 재개되지만 그때부터 기차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미선은 열차 곳곳에서 88년 사고 당시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출발시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얼굴의 승객도 나타난다. 동시에 원래 탑승한 승객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사실 이 열차에 오른 승객은 대부분 과거의 열차사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 사고 당시의 상황과 후유증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가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열차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 달린다.
*모티브
2003년 태창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인 <레드 아이>의 시나리오에서 김동빈 감독은 ‘달리는 기차’라는 제한된 시공간에 먼저 흥미를 느꼈다. 마지막 운행을 앞둔 현실의 열차와 유령열차라는 설정을 만들고 그 열차에 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KTX나 비행기를 주로 이용하는 속도제일주의 사회에서 교통수단으로 점점 예전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열차의 모습이 <레드 아이>의 출발점이 된다. 촬영 중에 폐선로 장면의 무대가 된 정선 구절리가 실제로 폐선로가 되어버린 일이나 통일호가 없어지고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만 남은 철도체계와 같은 현실은 이를 반영한다.
기차를 소재로 한 호러는 흔치 않다. 김감독이 알아본 사례 중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 중 <고스트 트레인>이라는 에피소드 정도. 노부부가 유령열차를 기다리는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도 유령열차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레드 아이>에서는 단순히 인간과 유령의 빙의가 아닌 기차와 유령열차간의 ‘빙의’가 시도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정한 시공간이 다른 시공간에 밀려들었을 때, 그 시공간은 두곳의 혼재된 모습을 지닌다. 선로가 겹쳐지듯 두 열차가 하나가 되었을 때, 유령과 현실의 승객이 서로 대립하는 구도가 아니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든다. 따라서 이렇게 시공간을 포개놓을 때 인간과 유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레드 아이>라는 기차의 종착역이다.
*공포의 방법론
1년간의 사전조사, 8개월간의 세트 제작, 6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레드 아이>의 열차 세트. 똑같은 공간적 구성을 피하기 위해 침대차, 스낵카 등의 설정을 도입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기차 세트는 ‘빙의’ 뒤에는 최소한의 불빛만 존재하는 어둠과 공포의 공간으로 돌변한다. <레드 아이>는 유혈이 낭자하는 슬래셔무비는 아니지만 열차가 유령열차로 변하면서 피로 물드는 단 한 장면을 위해 준비된 300리터의 피도 관객을 놀라게 할 요소. 특정한 유령이 나타나 승객을 살해하는 게 아니라 검은 물체 같은 것이 나타나 승객을 해치우는 컨셉은 “기차라는 공간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보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와 연결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기차에 같이 올랐던 일행이 자신을 해하는 존재로 돌아온다는 구조는 긴박감을 조성한다. 기차와 유령열차가 합체되는 ‘빙의’장면과 열차와 열차가 맞부딪치며 통과하는 종반부는 CG로 처리되었다. CG를 맡은 NIG의 여인수 팀장은 “배경 자체를 풀 3D로 만들어서 처리한 장면이 두컷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가장 공들인 작업으로 열차사고 때 사람들이 더미로 무너지는 장면을 꼽았다. 전반부에 보여질 열차사고의 생지옥을 그린 이 장면은 이후 본격적인 공포의 전초전이 된다. 기존의 몰핑 기법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사람들이 불타 죽은 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오리지널리티
4시간이라는 영화 속의 운행시간, 기차라는 폐쇄공간은 <레드 아이>라는 호러의 특징이 된다. 이러한 긴박하고 한정된 상황 때문에 미스터리물이나 액션 장르에서 기차를 소재로 한 영화는 있었다. 한국호러영화로는 처음 기차를 주무대로 삼은 <레드아이>는 동일한 공간이 반복되는 요소나 앵글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의 협소한 공간적 특성 때문에 연출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컷 넘게 가야 하거나 풀숏은 복도에서만 가능한 상황”이 빈번히 주어졌다. 여덟량으로 이루어진 기차를 빌려 2주 정도 촬영한 운행장면은 한번 NG가 나면 다음역까지 기차를 보냈다가 기계로 돌려서 와야 하는 번거러움으로 제작진을 괴롭혔다. 한편 <레드 아이>의 이야기 구조는 서구적인 호러의 기본공식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종반부에 드라마가 강조되면서 결국 공포는 특정한 무서운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가 느끼는 서로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며, 이것이 나중에 다른 감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드라마의 결론은 동양적 인과응보론에 가깝다. 순환적 구성으로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캐릭터간의 관계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한마디로
“1999년 <링>을 만들 때만 해도 지금처럼 부담은 없었다. 좋은 원작소설과 영화가 이미 존재했고, 처음 하는 시도라 공포라는 장르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식도 부족했다. 그때는 기대도 많았지만 평균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1년에 5∼6편씩 호러가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현 상황에서 독창성이 없는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장르적으로도 두 번째 시도이기도 하고. 요즘 사람들은 예전만큼 기차를 타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 특히 기분이 우울할 때면 밤에 기차를 많이 탔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면 다른 기분에 젖거나 묘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마지막 열차에 오르는 기분으로 <레드 아이>를 본다면 관객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야, 나! 내 목소리 안 들리니?”, <여고괴담4: 목소리>
*시놉시스
영언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소녀다.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영언에겐 선민이 유일한 친구. 선민은 영언과 달리 물심양면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구김살이 없고 친구가 많지만 그에게도 영언과 영언의 노랫소리가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런 영언의 노래연습을 곧잘 늦게까지 기다려주던 선민이 먼저 집에 돌아간 날, 영언은 누군가에 의해 하얀 악보 모서리로 목이 그어져 죽는다. 영언은 이것이 꿈이었다고 믿지만, 이튿날부터 영언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나야, 나! 내 목소리 안 들리니? 나 안 보이니?”라는 애타는 외침을 유일하게 듣는 사람은 선민뿐이다. 선민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영언이 죽은 게 아니라 믿으며 앞뒤 상황을 알아보고자 나선다. 그런 선민에게 평소 존재감이 없던 한반 친구 초아가 자신은 어려서부터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영언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학교 기계실 안에선 영언이 생전에 엄마처럼 따랐고 그런 영언을 편애했던 음악선생 희연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어 학교 엘리베이터 안에서 덜컥 나타나는 영언의 시체. 이제 선민은 귀신이 된 친구와 대화하기를 꺼리고, 영언은 선민의 외면으로 인해 점차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져감을 알고 두려워한다.
*모티브
<여고괴담4: 목소리>의 연출을 맡은 신인 최익환 감독은 <여고괴담> 1편의 조감독 출신이다. “<여고괴담> 현장에서 애들하고 매일 붙어 있다보니까 그냥 떠오른 것”이라고 설명한 감독의 당시 아이디어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귀신’이 전부였다. 영화화에 대한 기대나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무심코 발생했고 그래서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도 않았던 한 구절짜리 시놉시스는 1999년 미국에서 영화제작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체화됐다.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 등 실험적인 영상 기교를 배우는 중에 사운드 테크놀로지의 세계에 매료된 감독은 사운드의 질감과 공간 활용의 상관관계, 사운드만으로 일으킬 수 있는 정서적 효과 등에 주목하고 그곳에서
라는 단편작업에 착수했다. 한 여자가 자신의 지난 삶을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는 이 단편은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술적 효과를 낼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시도였다. “처음엔 보통의 내레이션처럼 들리다가 갈수록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추상적인 사운드로 변한다. 그러면서 결국 남는 건, 여자의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는 직접적인 경험들이다.” 여기에 오래 묵혀두었던 시놉, ‘목소리가 사라지는 귀신’이 연결됐다. *공포의 방법론
<여고괴담4>의 장르적 스펙터클은, 불만 꺼지면 어디서건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학교 내외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여고괴담4>의 주인공 영언은 목소리밖에 남지 않은 귀신이고, 공포의 방점은 목소리가 사라짐에 따라 존재도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찍혀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감독은 영언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블루캡의 김석원 대표와 사운드 질감에 관한 상의와 실험을 했다. “결국 ‘관객이 그렇게 느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게 원칙이다. 정답은 아주 간단한 데 있을 수 있다. 기술은 마술이 돼야 한다. 쓰려면 아무도 모르게 써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여기는 필터도 두 가지만 섞어놓으면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모른다.” 학교 안에 담긴 일상적인 소리들도 섬세하게 부각될 거라고 감독은 덧붙였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바람 때문에 움직이는 사물소리, 기계실 안 전구의 필라멘트가 내는 소리. 와이드 사운드가 아닌 클로즈업 사운드를 지향하는 <여고괴담4>는 촬영에서도 한컷 안에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깊은 심도보다 훨씬 제한된 정보를 전달하는 얕은 심도의 촬영을 절대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공간을 잘게 쪼개고 묻혀 있던 소음들을 키워 친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든 다음, 제 귀에 늘 익숙하게 들렸던 제 목소리가 지워지면서 존재의 위협을 느끼는 귀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것이 최익환 감독이 구상하는 <여고괴담> 시리즈의 네 번째 학교 괴담이다.
*오리지널리티
감독은 <여고괴담4>가 “우스갯소리로 두번 죽는 얘기”라고 말했다. “공포는 기본적으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나오는 건데 귀신이 주인공이 되고 나면 걔는 이미 죽었으니 어떻게 공포를 만들어내요, 라고 물을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운드에 대한 색다른 경험과 더불어 <여고괴담4>가 공포영화로서 가질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라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귀신만이 경험하는 세계를 묘사하는 게 아주 큰 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사실 <여고괴담>은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공포영화 브랜드면서 동시에 여고를 배경으로 여고생들을 둘러싼 무서운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공포영화들에 없는 전제조건을 짊어지고 가는 기획영화다. “생각해보면 이미 할 얘기 다 했고, 나올 소재도 다 나온 것 같다. 더이상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싶다”라며 감독은 국내 유일의 공포영화 시리즈물로 충무로 데뷔식을 치르게 된 부담을 살짝 털어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신인배우들이 연기를 어려워할 때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똑같다. 영언에겐 어느 날 네 존재가 목소리로만 남게 됐는데 그 목소리가 사라져간다면 어떻게 하겠니, 라고 묻고 선민에겐 네 친구가 목소리로만 너와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니, 라고 묻는다. 목소리는 생명이다. 내가 배우들에게 강조하는 건 이거 하나다. 더불어 이 영화는 사람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을 때의 상황, 즉 조작가능한 기억과도 관련돼 있다. 그래서 규정할 수 없게 된 정체성에 대한 것이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다. 근데 그렇게 어렵게 안 봐줬으면 좋겠다. (웃음) 어쨌든 나는 20억원이 안 되는 저예산으로 <여고괴담4>라는 상업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 부분은 분명하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내 얘기도 같이 묻어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