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초여름, 일본의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는 프랑스영화 최근작을 상영하는 조촐한 잔치가 열린다. 올해로 9회를 맞은 요코하마 프랑스영화제는 상영작이 서른편이 채 안 되는 아담한 행사지만, 프랑스영화의 중요한 시장 중 하나인 일본에서 열리기 때문에 규모에 비해 프랑스영화계의 인사들도 꽤 모이는 자리다. 6월20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된 올해 영화제의 프랑스 손님 중에서, 신작 <마르타… 마르타>(Martha… Martha)를 들고온 상드린 베이세를 만났다.
상드린 베이세는 극심한 빈곤과 노동에 찌들린 채 고된 일상을 지탱해가는 어머니와 사생아인 일곱 아이들을 그린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로 알려진 프랑스의 여성감독이다. 국내에 98년 말에 개봉됐던 <크리스마스에…>는, 살아가기 위해 폭압적인 가장에 굴종해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의 비루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절제된 리얼리즘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 베이세는 이 영화로 96년 루이 델뤽상과 세자르영화상의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프랑스영화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성과 아이들을 주축으로 한 가족, 특히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비주류 계층의 삶은 <크리스마스에…>부터 꾸준히 이어지는 베이세의 관심사다. 무관심한 부모로부터 가출한 소년과 매춘부의 만남을 소재로 한 98년작 <빅토르…너무 늦기까지>(Victor…pendent qu’il est trop tard)에 이어 이번에 출품된 <마르타…마르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마르타… 마르타>는 젊은 엄마 마르타와 어린 딸 리제,남편 레이몽 등 세 가족의 삶을 다룬 작품. 중고 옷을 팔아 근근이 연명하는 이들의 삶은 빈곤하고 피로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가족이란 틀이 서로에게 안식을 주는 듯하지만, 유년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자아와 모성애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마르타의 혼란은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서 상영됐을 뿐 아직 프랑스에서도 개봉되지 않은 따끈한 신작 <마르타… 마르타>를 들고 온 베이세는 요코하마에서 현지 매체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감독 중 하나였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캐주얼한 복장의 소녀 같은 모습으로 인터뷰 장소에 늦게 나타난 베이세는 무척 지쳐 보였지만, 일단 인터뷰가 시작되자 농담을 모르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건넸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서 상영됐을 뿐 아직 프랑스에서도 개봉되지 않은 따끈한 신작 <마르타...마르타>를 들고 온 베이세는 요코하마에서 현지 매체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감독 중 하나였다. 약속시간에 20분 늦은 오전 11시, 머리를 하나로 묶어올리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나타난 베이세는 무척 지쳐 보였다. 아침 6시쯤 잠자리에 들어서 늦잠을 잤다며 미안해하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일단 인터뷰가 시작되자 진지하게 한 마디 한 마디 쌓가는 낮은 음색이 점점 또렷해졌다. 영어와 불어의 이중 통역을 거치는 과정에서 손상됐을 지 모르는 말의 뉘앙스 차이까지 답답해할 만큼, 섬세하면서도 야무진 고집 같은 게 베이세에게서 배어났다.
-세 번째 영화 <마르타… 마르타>를 선보였는데, 어머니와 아이, 여성의 삶과 유년기에 대한 관심사는 여전한 것 같다.
=그렇다. <마르타…>는 아이와 엄마, 아빠의 트리오라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전작들처럼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또 젊은 세대의 어머니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 젊은 엄마와 그녀의 어린 딸, 그리고 남편이라는 가족에 대한 영화가 됐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늘 나의 관심사였고, 그중에서도 가족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으니까.
-당신의 말대로 <크리스마스에…>의 어머니와 7남매 때부터 당신의 카메라는 가족이란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 중에서도 가족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있나.
=가족은 인간관계와 행위를 탐구하는 데 아주 이상적인 대상이다. 가족은 서로 선천적으로 가깝고 특별하지만 그게 꼭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형제와 자매라든가 부모와의 관계라든가 그 속에도 사랑과 증오 같은 많은 감정이 쌓여 있다. 서로 아주 가깝고, 단위가 작기 때문에 모든 감정들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곤 한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래서 사람 사이의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 아주 섬세하게 얘기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에...>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헌신적이라면, <마르타...>의 마르타는 때로 자신의 세계에 빠져 어머니라는 현실에서 일탈하고자 한다. 어머니로서 여성에서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여성관이라든가 생각의 변화가 있었나.
=특별히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어머니도 다양한 유형이 있으니까. <크리스마스에..>의 어머니는 아주 헌신적이고,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성에 가깝다. 하지만 <마르타...>에서는 젊은 엄마고, 그래서 엄마로 산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아이를 사랑하지만, 정말 어떻게 키워야 할 지 잘 모르고 많이 힘들어한다. 포기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이 어머니와 아주 힘들었던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지 모르고 갈등한다. 이 둘은 수천 가지 유형의 어머니상 중에 두 사람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이번엔 젊은 세대의 모성에 대한 것이고. <크리스마스에…>에서는 아버지가 악한 사람 같지만, <마르타…>의 레이몽은 선한 것처럼,역할이 전도된 것과 같다.
-당신의 영화가 투사하는 삶은 힘겨운 싸움과 같다. 빈곤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동반자살을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에…>의 어머니나 <빅토르…>의 창녀와 가출 소년, 집세조차 내지 못하는 <마르타…>의 가족 등 주류사회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데.
=내 영화 속의 인물들은 분명 사회적으로 상류층이 아니다. 노동계급이라고 해야겠지. <크리스마스에…>에서는 농장 노동자들이고, <마르타…>에서는 시장에서 헌 옷을 판다. 나에게는 그러한 노동계급의 삶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고급스럽지 않은 것. 또 어머니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로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렵고. 그래서 내 영화는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 어머니로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이다.
-노동계급, 하층민들의 삶에 애정을 갖는 이유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에…>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 있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보통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크리스마스에…> 자체가 내 자전적인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은 농부였고, 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다. 농장에서 열심히, 힘들게 일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상류사회가 아니라 보통의 가정, 농장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내가 아는 삶의 방식과 감정들에 대해. 내 영화에서 보이는 것도, 내가 아는 삶의 부분들이다.-<빅토르…>와 <마르타…>에는 아이들 시선의 판타지가 섞여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신의 영화는 리얼리즘에 충실하다. 왜 리얼리즘인가.
=그게 내 관심사니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는 것. 난 내 영화 속의 이야기나 가족 등 그 모든 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다. 관객이 그들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들 마음에 가닿도록. 이것이 진짜라고 느끼게 하고 싶다.
-값싼 희망이나 감상주의로 쉽게 흐르지 않고, 극도로 절제된 카메라에 포착되는 일상이 너무 비루해서 때론 당신 자신이 비관적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 말하자면 난 비관론자다.
-어떤 면에서?
=그건 내 본성이다. 그냥 그런 식이다. 그게 바로 나니까. 하지만 꼭 슬픈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니다. 나도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게 좋다. 행복은 당신의 것일 때 아주 멋진 일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비극에 대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삶의 모습도 다양하지만, 나는 그런 비극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게 인생이기도 하니까.
-비관적인(?) 당신의 렌즈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보길 바라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영화가 일단 관객을 만나면 그건 보는 사람들의 것이 되니까.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기보다는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인물들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들려줄 얘기를 고르는 것뿐이다.
-<크리스마스에…>를 찍기 전까지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몽펠리에대학 불문학도였다가 레오스 카락스를 만나면서 영화에 입문했다는데, 어떻게 시작했나.
=대학에 다닐 때, 돈이 필요해서 일을 구했다. 그때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촬영이 있었는데, 마침 미술과 세트 장식을 도와줄 사람을 원했다. 난 손재주가 꽤 있는 편이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그 촬영장에 합류하게 됐고, 그들과 친구가 됐다. 나중에 파리의 학교로 돌아와서도 촬영할 때 봤던 그 나무들, 자연 속의 생활, 아, 그게 얼마나 나와 가까운 것이었는데 잊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얘기를 하자 사람들이 그걸 한번 써보는 게 어때, 아름다울 거야, 하고 독려해줬다. 그래 한번 써보지 뭐, 하고 쓴 게 영화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는 영화에 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니까 카락스와 그의 영화스탭들, 나한테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 거다.
-한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감독이 되고 보니 어떤가.
=모르겠다. (웃음) 정말로 꿈꿔본 적은 없는데…. 하지만 감독이라는 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글을 이미지로 만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난 문학을 아주 좋아했는데 문학에 드러나는 사랑과 자연, 예술 등을 이미지로, 회화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영화다.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형상화해서 스크린에 옮기는 것, 문학과 이미지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
-앞으로의 계획은? 새 영화를 구상하고 있나.
=아직 없다. 난 영화를 그만뒀다! (웃음) 아니, 아직은 프로젝트가 없다. <마르타…>를 끝낸 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프랑스에서도 개봉을 안 했기 때문에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거다. 그러면 새로운 영화가 다가오겠지.
요코하마=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