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허진호 감독의 <외출> [1]
2005-02-01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허진호식 불륜영화 <외출>의 밑그림을 듣다

허진호 감독의 <외출>은 지금 막 시작되려 한다. 1월19일 강원도 삼척 현지 테스트 촬영으로 외투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나면, 곧바로 겨울바람 속으로 나아가 크랭크인이다. 4년 만인 그의 세 번째 장편은 여느 때보다 조금 소란스레 시동을 걸었다. 한류 격랑의 꼭대기에 선 배용준과 아시아 관객에게 인지도가 높은 손예진의 캐스팅은 <외출>(제작 블루스톰, 투자 쇼이스트)에 쏠린 시선의 무게를 부쩍 늘려놓았다. 그러잖아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아시아의 동료 감독과 관객에게 사랑받았고 <봄날은 간다>는 홍콩, 일본(어플로즈 픽처스, 쇼치쿠)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비평가들은 그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이나 오즈 야스지로를 거명해왔다. 허진호 사랑론의 3장을 기다리는 관객은 우리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의 영화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고 이별이 있다. 그리고 죽음이 서성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는 연애의 이면에 허진호 감독은 또다시 유심한 눈길을 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사랑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에, <봄날은 간다>가 유리그릇처럼 금이 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궤적에 주목했다면, <외출>은 두 기혼 남녀의 밀애가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피투성이로 까발려진 다음, 병상에서 두 배우자가 마주쳤을 때 어처구니없이 불붙는 사랑 이야기다. 등을 맞대고 있는 두쌍의 감정 또는 네 남녀의 사방무늬 같은 관계에 대한 흥미는 지난해에 만들어진 허진호 감독의 단편 <따로 또 같이> <나의 새 남자친구>로부터 엿볼 수 있다. <따로 또 같이>에서는 짐 싸서 헤어진 남녀가 행복한 시절 녹화된 이미지를 보고 각자 울음을 터뜨린다. 분명 자신들이지만 어떤 타인보다도 지금의 자기와 다르게 느껴지는 두 연인의 이미지를 응시하며. 후속 단편 <나의 새 남자친구>에서는 실연한 여자와 남자가 사랑의 낙서를 지우러 백마의 카페에 갔다가 바로 짝을 짓는다.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신생 커플의 어깨 뒤에는 지워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 대한 추억과 <외출>이 경계를 긋는 부분은, 주인공 인수와 서영의 사랑에 내포된 격렬한 삶의 위기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봄날은 간다>의 아픔이, 비록 찢어지는 고통이었을지언정 외적인 일상의 수면에 파문을 남기지 않는 ‘내상’이었다면 교통사고의 파열음이 두들겨 깨우는 <외출>의 갈등은 생사와 결혼의 무거운 계약이 흔들리는 지각변동이다. “내 영화에서도 감정이 표출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인물의 감정이 무척 크다면 그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라고 간간이 말해왔던 허진호 감독은 <외출>에서 스스로를 강제해서라도 카메라를 인물에 한발 더 밀착시키고 영화를 응시의 자리에서 밀어내 인물 심리에 연루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외출>의 이야기 자체가 허진호 감독이 원하는 거리감을 깨뜨리는 ‘침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눈물과 신음의 멜로드라마를 상상하면 낭패 볼 공산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허진호 감독은 분노와 절망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해의 단서부터 찾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허진호 감독의 두 영화가 보여준 농밀한 정적 언저리에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아주 망그러뜨리지 않으려는 엷은 연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배신의 중첩으로 요약되는 <외출>의 ‘선정적인’ 모티브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의 설정이라기보다 TV연속극적인 상황에 가까워 보인다. 플로베르는 불륜을 “통속성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저항”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평정한 세계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 명해온 금기를 대범하게 쓸어 담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지지 않는 경지를 보여주려는 야심을 <외출>에서 읽는다면 예단일까. 이튿날이면, 삼척행 국도를 달리는 차 안의 카메라 뒤에서 인수의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허진호 감독에게 <외출>의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2001년 가을 <봄날은 간다> 이후 <외출>이 있기까지, 두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한 장편에 관한 이뤄지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2003년 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제 감정의 분출을 그리고 싶다”는 말은 당신의 영화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막연히 짐작하게 했다. 아카데미 20주년 옴니버스 단편 <따로 또 같이>부터 이야기해보자. <따로 또 같이>는 오직 사랑이 끝난 여자와 남자의 흐느낌만 번갈아 보여준다. ‘연애에 실패해서 우는 남녀를 찍는 법’을 실습한 것 같다. 이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장편 <행복>의 시나리오를 쓰는 도중 한달 동안 만들었다. “비디오를 본다”는 명제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왜 요즘 누구나 디지털 비디오를 많이 찍지 않나. 동거하던 남녀가 헤어져 여자가 짐을 싸서 나가는 상황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나쁜 상태에서 행복했던 날 모습을 찍은 비디오를 볼 때 느끼는 어떤 역설, ‘차이’가 만들어내는 슬픔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비디오 내용을 하드코어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다음검색 페스티벌 단편 <나의 새 남자친구>는 <따로 또 같이>에 이어지는 후일담이다. 실연을 극복하는 온갖 방법을 시도하던 여자가 또 다른 실연남과 맺어진다. 이 영화에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클로즈업이 나온다. 연애의 유치함을 마음껏 보여주기도 한다.

=문득 연작의 형식을 떠올렸다. 클로즈업은, 안 그러면 내가 자꾸 인물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의도적으로 확 들어가서 찍자고 했다. 또 일부러 가볍게 찍었다. 이모개 촬영감독도 놀라더라. <봄날은 간다> 일반 시사회의 폭소를 들으며 “내 영화, 로맨틱코미디구나”라고 느끼기도 했다.

-본디 세 번째 장편으로 계획했다가 <외출> 다음 순서로 밀린 <행복>은, 병들어 요양소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고 들었다. <외출>은 그 병실 바깥을 서성이는 두 사람 파트너의 이야기인 듯해 차례가 바뀌는 편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두 이야기는 쌍둥이이거나 변주인가? <따로 또 같이>와 <나의 새 남자친구>의 관계처럼.

=아니다. <행복>은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그리는 영화이고 <외출>은 과연 이렇게 만날 수가 있나 싶은 상황에서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다. 일상에서 동떨어진 공간에서 만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행복>의 남녀와 <외출>의 남녀가 나눈 시간의 성격은 다르다. 요양소 세팅 등 여러 문제가 겹쳐 <행복>을 결국 미루고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지난해 7월1일에 “자, <외출> 하자!”고 스탭들에게 말했다. <외출>의 모티브는 2003년 상반기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 심사에서 접한 이일 작가의 <바람-소년 소녀 여행을 떠나다>에서 왔다. 원안은 여자와 보험회사 직원의 연관이 밝혀지는 등 일종의 반전 스릴러였는데, 이야기 첫머리의 교통사고가 특이하면서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 담아두었다. <외출> <행복>, 2편의 장편을 한해에 찍어볼까 의욕도 냈는데 그건 좀 힘들어진 것 같다. 그래도 <외출>이 끝나면 지체없이 <행복>을 찍고 싶다.

-그런 조바심은 <행복>까지 한 시기를 마감하고, 이후에는 판이한 작품을 찍고 싶어서인가.

=맞다. 다음다음 영화도 구체적으로 여러 편 상상해두었다. 연애 이야기가 있되 서브 플롯으로만 들어가기도 하고. 차기작을 안고 영화 찍기는 처음이라 부자가 된 기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연희·장소협찬 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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