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은 사랑의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
-<외출>은 어떤 이야기인가. 감독이 고른 단어로 직접 듣고 싶다.
=인수라는 남자가 있다. 콘서트 조명감독이다. 삼척 국도에서 아내 수진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크게 걱정하며 달려간다. 아마도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사고당한 동승자 경호가 연인이었음을 알자 감정은 혼돈으로, 분노와 배신감으로 변한다. 차라리 자기가 다쳤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차라리 죽지 그랬니?”라는 마음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다. 경호의 아내 서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영과 인수는 이 일을 친척이나 친구에게 알리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병원 앞 모텔에 장기 투숙한 두 사람은 계속 스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비밀과 공감대가 그들을 이어주는 고리는 아니다. 복수심은 더욱 아니다. 둘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냥 불륜이었다면, 더욱 많이 잘 사랑했을 사람들이다.
-어떤 러브스토리에 부여되는 상황은 그것이 사랑의 어떤 특정한 측면을 드러내기 때문에 선택된다고 생각한다. <외출>이 극단적 상황을 통해 노출시키려는 사랑의 단면은 무엇인가.
=아이러니다. 사랑하던 아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된다. 그리곤 다시 자기도 같은 상황에 빠져들면서 아내와 그 연인이었던 남자가 겪었을 고통을 맛본다. 수진과 경호가 일상을 떠나 행복한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을 왔듯이 인수와 서영도 여행을 떠난 셈이다. 원안의 작가는 여행을 많이 다니다가 모르는 여자들을 태워주는 일이 잦다보니, “이러다 사고가 나면 아내가 오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나리오에 착안했다는데, 그 경우는 더 극적이었겠지. 나중에 <랜덤 하트> <블루> <유리의 성> 등 비슷한 설정의 영화들을 발견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왜 이 이야기가 애초 내 마음에 달라붙었는지 반추하면 그들과 다른 할말이 분명 있지 않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름에서 겨울까지, <봄날은 간다>는 겨울에서 시작해 계절이 몇 바퀴 돌았는지 몰라도 봄에 끝났다. <외출>은 겨울부터 봄까지 한달음의 시간을 담나.
=아니다. 이번에도 겨울에서 봄 사이에 계절이 몇 바퀴 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삼척을 떠난 뒤에도 시간은 또 흐른다. 결혼하거나 오래 사귄 사람들의 정(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기억들인 것 같다.
-왜 주무대로 겨울의 삼척을 선택했나.
=촬영이 가능한 병원부터 전국에서 물색했다. 결국 결정한 삼척의 병원은 바로 앞에 장기간 간호하는 보호자들이 머무는 모텔까지 정확히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텔을 지나서 걸어가면 죽서루라는 정자가 있고 일본식으로 기둥없이 지은 오래된 카페가 있다. 거리 자체가 세트 같아서 영화 속 공간이 그대로 현실의 공간이다.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촬영하면 된다. 바다는 차로 10분 정도? 회 먹으러 갈 때 나오겠지. (웃음)
-그럼 <외출>에서도 세트는 전혀 안 쓰나? 세트가 왜 그리 싫은가?
=이번에도 안 쓸 것 같다. 그래서 병원과 모텔의 벽을 텄다. 동선과 카메라 움직임을 미리 다 계획하는 경우는 세트가 편하고 안정적이지만, 배우가 실제 공간에서 연기를 하면 세트와 다른 자연스러움이 분명 있고 의외성도 디테일도 그 안에서 나온다. 가령 배우가 창 밖을 본다면 거기에 풍경이 존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배용준의 강함, 손예진의 총명함에 끌렸다”
-<외출>의 시놉시스를 읽으면서, 이런 이야기의 멜로드라마에도 연애의 천진난만한 희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궁금했다.
=있을 거다. 있었으면 좋겠다. 순간순간 행복한 감정이 나올 거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는 러브스토리이지만 기본적으로 남주인공 정원과 상우의 이야기다. 다림과 은수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계의 일부다. 그런데 <외출>의 인수와 서영은 다른 길을 돌아 한 장소에서 만난다. 거울 이미지처럼. 시점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이야기가 남자에게서 시작된다. 그리고 남자의 시점이 여자의 시점보다 많을 것이다.
-인수 역의 배용준은 허진호 영화 속 ‘공격적이지 않은’ 남자들과 닮은 면이 있다. 그는 당신이 진작부터 기다리고 지켜보아온 배우인가? 아니면 선택에 작용한 다른 요소가 있나.
=백상 시상식에서 처음 봤을 때 안성기 선배가 “부드러워 보이는데 직접 만나면 강한 느낌이 있는 묘한 친구”라고 귀띔하셨다. 그리고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현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관찰했다. 그는 강하다가도 부드러운가 하면 강한 동시에 부드럽기도 하고 때로는 두 가지가 충돌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재미있었다.
-배용준의 ‘강함’이란 의지나 결단력과 비슷한 종류의 느낌인가.
=그렇다. 인수는 조명감독이다. 조명감독은 조명을 컨트롤하며 거칠게 일해야 하는 육체성이 있는가 하면, 무대와 떨어진 작은 콘솔 앞에서 세팅을 할 때면 무척 외로워 보인다. 텅 빈 거대한 체육관에 오직 빛과 자기만 존재한다. 공연은 화려하지만 청중이 떠나면 조명장치는 해체된다. 전작처럼 남자의 직업이 사랑을 싹트게 하지는 않지만, 직업은 이 남자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빛에 민감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예컨대 전구가 나가려고 하면 빨리 알아차리는 남자다. (웃음) 그런 점에서 배용준이라는 배우가 조명감독을 연기하기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봄날은 간다>가 새로 개성을 발견한 이영애의 경우처럼, 자연인으로서 배우가 가진 성격이 허진호 감독 영화에서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언젠가 서영 역 손예진의 <클래식>에서의 연기를 칭찬한 적이 있는데.
=<클래식>의 연기 좋았다. 기혼자 역에 어리지 않나 싶었는데 만나보니 나이가 믿기지 않는 성숙함과 총명함이 있었다. 자기 배역만 보는 게 아니라 감독의 눈처럼 영화를 전체로서 바라보며 이야기하는데, 그건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능력과 직결되는 큰 장점이다. 서영은 일찍 결혼한 1년차쯤의 전업주부로 설정될 것 같다. 손예진의 느낌과 주부의 느낌이 묘하게 어울린다.
허진호식 멜로드라마란 없다
-콘티없이 그날 현장의 공기에 집중해서 어떻게 찍을까를 결정하는 것이 종전의 방식이었다. 현장의 감정을 숏의 길이와 거리로 곧장 번역하는 직접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콘티를 그렸다고 들었다.
=두 가지가 섞일 것 같다.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이모개 촬영감독과 미리 상의했지만 그대로 찍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내가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 인물에게 가깝게 들어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카메라가 움직이거나 컷을 나누어야 하니 사전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절제한들 드라마 자체가 요구하는 정서가 다르기도 하다. 전작들이 한 인물의 점진적인 감정 변화를 따랐다면 <외출>의 상황은 감정의 격한 단절과 역전을 부른다.
-설정이 유사한 영화들에 대해 아까 말했지만, <외출>의 제작 소식을 듣고 사실 자꾸 생각난 것은 왕가위의 <화양연화>다. 왕가위는 먼저 사랑을 시작한 배우자들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고 양조위와 장만옥을 통해서만 그들을 보여준다. <화양연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했다.
=울면서 봤다. (웃음) 상대의 아내, 남편인 척 연극하며 밥을 먹는 장면부터 재밌었다. 두 연인만 있는 상황은 유사할 수 있다. 그러나 <외출>에서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는 배우자들이 차지하는 무게가 중요하다. 그들을 향한 감정이 긴장으로 장애로 줄곧 작용한다. 플래시백? 단편 <따로 또 같이>처럼, 디지털카메라의 동영상이 기억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위험한 이야기다. 병원에 배우자가 누워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연애는 어떤 걸까? 제3자가 곡절을 모르고 인수와 서영의 행동을 본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저 주간지 가십감일 수도 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무렵 인터뷰에서, “죽어가는 사진사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생활에 가장 밀착된 소재라는 이유로 사랑 얘기가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후로 멜로드라마의 표식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만 해도, 연애는 삶의 유한성 또는 영화적 시간을 말하는 방식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봄날은 간다>에 이르자 ‘허진호식 멜로드라마’라는 조어도 나왔다. 그리고 <외출>의 스토리와 캐스팅은 장르적 관습을 굳이 꺼리지 않는 인상이 더욱 진하다.
=멜로드라마에 대한 정확한 주관은 없다. 다만 <8월의 크리스마스> 때와 비교하면 사람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데뷔 때는 죽음까지도 순순히 수용할 듯 세상 보는 눈이 50대 높이였는데, 욕망이 자꾸 늘어난다. 나이들수록 야한 색이 좋아지는 이치인가? (웃음) 내 삶은 여전히 안정과 고요함을 지향하지만 살면서 점점 부딪히는 부분이 많아진다. 평온해진다기보다 걱정이 많아진다. 예전의 정적 속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도 있지만, 그런 평정을 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을 겪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쉽게 단순히 정리한 것은 아닐까라고.
미술감독이 말하는 <외출>의 이미지
색과 공간, 리얼리티 속에서 비틀기
<외출>의 박상훈 미술감독은 CF와 잡지 코디네이션 분야에서 일하다가 영화의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고양이를 부탁해> <썸>, 정구호 미술감독과 함께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메모리즈>가 <외출> 이전에 그가 프로덕션디자인에 참여한 영화들. 허진호 감독과는 이공 프로젝트 단편 <따로 또 같이>에서 호흡을 맞췄고 <행복>의 프리프로덕션을 함께하다가 <외출>까지 동행했다.
색 |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리얼리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면 <외출>은 좀더 대담하다. 인위성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허진호 감독과 논의 끝에 미술감독이 세운 원칙은 “리얼리티를 존중하는 큰 틀 안에서 공간마다 컨셉과 색을 불어넣는다”는 것. 즉,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색이지만 쓰임새를 살짝 비틀어 개성과 분위기를 만든다. 예컨대 흰색 시트, 하늘색 담요, 분홍 커튼이 일반적인 우리나라 병원의 이미지라면 <외출>의 병원 커튼은 녹색이다. 영화의 전체적 색감은 레트로 계열. 지난해 유행한 꽃무늬 남방처럼 복고적이면서도 과하게 멋을 부리지 않는 색깔들이 주조다.
도시 | 일괄적으로 통제된 공간계획이 있는 대도시나 관광도시와 달리 삼척의 거리는 간판이나 대문이 가지각색으로 뒤섞여 있어 따로 미술작업이 없어도 묘한 분위기를 내는 정크 스타일이다. 시간이 지체된 듯한 느낌. <8월의 크리스마스>의 군산처럼 해가 지면 스산한 기운도 돈다(<봄날은 간다>의 벚꽃길이 우연히도 <외출>에 등장하는 거리 근방이다).
계절 | 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할 것에 대비해 <외출>의 미술팀은 인공 눈과 고드름을 많이 준비했다. 실내에 계절감을 끌어들기 위해 따뜻하고 도톰한 느낌의 패브릭을 많이 쓴다.
병원 |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로서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증축해 일관된 인테리어가 없다. 동과 층마다 색이 다르고 연대가 다른 로고까지 뒤섞여 있는 정경이다.
모텔 | 부분적으로 리모델링한 시골 모텔. 인수와 서영이 각각 묵는 방은 같은 층에 있고 서로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벽지는 붉은 계열이고 조명은 길고 짧은 스탠드, 벽등 같은 작은 광원을 여러 개 배치한다. 임시 숙소인 만큼 방을 캐릭터의 성격과 연관지어 꾸미진 않는다. 병원과 모텔 공히 인수와 서영의 감정선의 묘사에서 중요한 공간은 복도. 서로를 바라볼 때 거리감과 깊이감을 위해 긴 스트라이프를 모텔 복도 바닥에 쓸 계획이다. 병원과 모텔 모두 촬영을 위해 한층 벽을 허물었다.
의상 | 배용준의 의상을 위해 조명감독들을 인터뷰한 결과 공통된 스타일은 은근히 세련된 무채색의 어두운 톤의 옷이었다. 빛을 다루는 일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유사시엔 육체노동도 할 수 있는가 하면 장례식장에 가도 손색이 없는 스타일이다. 신혼주부인 손예진의 의상은 무채색일 경우 남자 옷보다 톤이 선명하고, 녹색이나 적색 계열일 경우 톤을 떨어뜨린다. 외지인이므로 두 사람 다 삼척이라는 도시와 약간 겉도는 외양이다. 간호를 하는 사람들이니 메이크업은 자연스럽지만, 사랑의 감정이 고조되는 대목에서는 여자의 화장이나 차림이 살짝 홍조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