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저주받은 작가의 전설을 만난다,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
2005-02-02
글 : 홍성남 (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2월15일부터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 상영
<이유없는 반항>

1951년에 파리에서 공개된 니콜라스 레이의 데뷔작 <그들은 밤에 산다>를 보고서 극장을 나온 관객은 화가 나 얼굴이 붉어져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처럼 처음으로 프랑스를 찾은 레이의 영화는 매정한 반응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안 있어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의 지위에 올랐으니, 프랑스의 어떤 시네필들, 특히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쓰던 이들이 그 영화의 진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와 프랑수아 트뤼포는 둘 다 <그들은 밤에 산다>가 놀랍게도 브레송적인 측면을 가진 미국영화라고 상찬했다. 이후로 레이의 필모그래피가 확장될수록 레이에 대한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의 비평적 환대 역시 두터워졌다. 그들이 레이에게서 본 것은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개인적인 인장이 새겨진 영화들을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영화감독이었다. 레이야말로 ‘작가’의 진정한 표본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트뤼포의 언급을 인용하자면, 그는 레이를 두고 “황혼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꽤 적절한 말인 것은, ‘황혼’이란 단어로부터 환기되는 것들, 즉 어둠, 고독, 폭력, 불안, 환멸 그리고 서정성 등이 레이의 세계를 구축하는 주요 자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둡고 외로운 세계 안에서 폭력의 충동을 분출하거나(<고독한 영혼>의 딕스, <어둠 속에서>의 짐), 반항의 절규를 내지르거나(<이유없는 반항>의 짐) 또는 위협적인 괴물이 되어버린(<실물보다 큰>의 에드) 이들과 만나게 된다. 레이가 그리는 인물들이란 대개가 자기 내부에 악마를 가지고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폭력에의 매혹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폭력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행사하게 된다. 레이는 그처럼 온전히 사회의 품에 안길 수가 없고 힘든 싸움을 벌이며 소외와 고통의 원환(종종 여기에 자기파괴까지 포함된)을 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박력있게 그려냈다.

주로 내적인 고통과 과민의 정서에 카메라를 가져간 영화들인 만큼 레이의 영화에는 (극적·시각적) 발작의 순간들이 자주 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으로는 <고독한 영혼>의 한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딕스가 앞에 앉은 경찰 부부에게 살인의 순간을 재연하도록 할 때, 레이는 딕스의 눈에 빛을 던짐으로써 그의 내면에 자리한 도취적 광분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조차 스펙터클로 만들 수 있는 레이의 능력에 대한 단지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만일 대본에 모든 게 다 있다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말한 레이는 무엇보다도 화면으로, 특히 뛰어난 공간감각과 색채감각이 발휘된 화면으로, 말을 할 줄 아는 그야말로 시각적인 시네아스트였다. 그리고 그가 만든 화면들은, <이유없는 반항>이나 <자니 기타>에서 보듯이, 추상화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브레송이 레이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단순화해 말하자면, 레이는 정말이지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스펙터클화할 줄 아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렇게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줌으로써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들(과 다른 일부의 영미권 평자들)로부터의 ‘과도한’(?) 환대를 제외하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지 못했다. 심지어는 상업영화를 만든 감독 정도로 치부되며 “(샤티야지트) 레이냐 아니면 (니콜라스) 레이냐?”는 식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레이라는 시네아스트를 재발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

일자: 2월15일(화)~24일(목)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문의: 02-3272-8707, www.cinemathequeseo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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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그들은 밤에 산다

<그들은 밤에 산다>
이전에 함께 연극 활동을 했던 엘리아 카잔의 영화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1945)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 만들기를 스스로 배웠던 니콜라스 레이는 데뷔작부터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레이의 첫 영화인 <그들은 밤에 산다>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가 탈옥한 청년 보위와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여인 키치가 야음 속에서 사랑의 도주를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두운 범죄 이야기와 운명적인 러브스토리를 절묘하게 배합함으로써 영화는 우아하게 멜랑콜리한 기운을 얻는다. <그들은 밤에 산다>는 제작사쪽의 머뭇거리는 태도로 인해 제작된 지 2년이 지나서야 개봉되고 결국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레이의 탁월한 시각적 감수성은 이것을 <시민 케인>과 미국영화 최고의 데뷔작을 겨룰 ‘고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고독한 영혼

<고독한 영혼>
니콜라스 레이의 많은 영화들이 소외와 실패, 그리고 상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면, <고독한 영혼>은 그 전형적인 실례가 될 만한 영화다. 영화는 살인 혐의를 받게 된 시나리오 작가 딕스 스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태도로 세상을 보다가도 자신의 성미를 건드리는 대상에게는 분출하는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 지극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냉소적인 인물에 대한 초상을 그리면서 결국에는 그가 처한 곳이 왜 고독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고독한 영혼>은 그처럼 험프리 보가트 자신의 그간의 페르소나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이미지’에 대해 성찰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셋 대로>와 함께 가장 어두운 비전으로 할리우드를 바라보는 영화이고 강박적으로 로맨틱하며 미묘하게 불안한 필름누아르의 대표작이란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에서>
영화 속에서 악당처럼 행동하는 경찰이라면 흔히 <더티 하리>부터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레이는 그보다 20년 전에 이미 그 선배격인 인물을 보여주었다. <어둠 속에서>의 주인공 짐은 폭력의 습성을 내재화하고 있는 형사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우선 그런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지만 뒤로 가면 전·후반이 대칭을 이루는 영화의 구조 때문이기도 함이 드러난다.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짐은 유아살해 사건을 해결하라며 시골 마을로 보내지고 눈먼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도시에서 눈덮인 시골로 공간을 옮기면서 고독의 이야기에서 구원의 이야기로 이동한다. 그러면서 마치 <이유없는 반항>을 연상케 하는 인물들 사이의 대칭과 균형의 구도가 설정된다. <어둠 속에서>는 레이 자신은 실패작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평자들로부터 복합적이며 모던한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다.

러스티 맨

<러스티 맨>
오랫동안 로데오 챔피언으로 군림했다가 이제는 은퇴한 주인공 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못 탈 말도 없고 안 떨어지는 카우보이도 없죠.” 그의 이 한마디는 <러스티 맨>의 정신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레이의 세계관도 잘 요약해준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자부심에 사로잡혀서는 결국에 자기 파괴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 남자들의 미성숙 혹은 운명이 <러스티 맨>(과 레이 영화들)의 주제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오래 지켜보는 로데오 장면들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가 정해진 무모한 행위의 아름다움 또한 느끼게 만든다. 남자의 내면과 미국에 대한 언급이 담긴 로데오 영화에 서두르지 않는 필치로 그려진 삼각관계 이야기가 더해져 <러스티 맨>은 시적이고 애상적인 걸작영화가 되었다.

실물보다 큰

<실물보다 큰>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니콜라스 레이는 시대를 앞서 나간 면이 있었다. <실물보다 큰>은 레이의 그 예가 되는 영화인데, 이것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가운데 최초로 약물과 그것으로 인한 중독의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단순한 사회문제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가장 에드는 심각한 병을 앓게 돼 새로 개발된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이 약에 중독되어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가족 멜로드라마로 시작했다가 마치 <샤이닝>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호러영화로 바뀌는데, 그 전이지점에서 레이는 동시대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을 의문시한다. 한편으로 <실물보다 큰>은 시네마스코프를 가장 잘 활용한 영화감독이라는 레이의 명성을 확인케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야생의 순수

<야생의 순수>
<파티 걸>은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레이의 연출력이 완벽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레이 자신에게는 고용인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준 영화였다. 다음 영화로 그는 할리우드의 울타리를 벗어나 야심적으로 합작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야생의 순수>이다. 또 다른 실락원 이야기인 <에버글레이즈에 부는 바람>과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이 영화는 에스키모인 이누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문화 갈등의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들려준다. 그리고 자연의 본모습 그대로를 담겠다는 레이의 의도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포착해낸다. 강렬하고 매혹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에게만 평가를 받은 <야생의 순수>는 밥 딜런의 <마이티 퀸>이란 노래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기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앤서니 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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