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재미있냐 없냐로 물어볼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봤는지, 가 아니라 어떻게 본 척해야 하는지가 문제인 영화 중 하나다. 표정관리 잘하셔야 되여, 당신의 무식이 드러나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니깐여,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시대는 지금 우리의 뿌리다. 손쉬운 순서에 따라서 사람들은 열매를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잎을 먹고, 그 다음에 줄기를 먹는다. 뿌리는? 몸에 어지간히 좋다고들 해싸서 떼돈주고 먹든가 아님 먹을 게 없어서 어거지로 먹든가 둘 중 하나다. 10·26은 독한 뿌리에 속한다. 그때 그 시대를 살았거나, 안 살았거나 간에, 여전히 냄새 독한 뿌리를 누군들 제대로 즐기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소재를 제대로 즐기기 어렵게 만든 영화라고 푼다. 누구는 임상수 감독을 천재라 하고, 누구는 ‘독하다’고 하지만, 그를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이런 싸가지 없는 결론부터 날리는 데 아무런 자의식이 없다. 임 감독,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커리어 추구할 생각 없다”고 쿨한 멘트를 날리셨죠? 저, 감독 말, 믿어요. 영화, 하나도 센세이셔널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10·26 자체는 엄청 센세이셔널했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물론 영화의 효능은 그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영화에 대고 ‘왜 이렇게 만들었지?’를 비롯해서 할말이 엄청 많을 것이고, 안 살았던 사람들에겐 ‘왜 만들었지?’를 비롯해서 의문이 왕창 남을 것이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간에 억울할 건 없다.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기억의 또 한겹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기억이 생겼을 테니까.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영화 보는 내내 지루했다. 10·26이라면, 확보 가능한 온갖 디테일을 활자로 마스터해버렸는데, 아무리 뒤틀고 양념쳤다 한들 그때 그 사건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지루하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극장문 나서면서 만난 평론가 허문영을 비롯한 일부 뇌구조 복잡하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언어적으로 과잉발달한 사람들의 말처럼 ‘절대 지루하지 않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나, 이 대목에서 진짜 자신없다. 나 하나만 지루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영화보는 데 정답 있다는 사람은 없으니깐.
확실한 것 하나. 그때 그 사람들의 시대는 독재권력이 온 국민을 갖고 놀던 시대였다. 코미디 같은 논리가 수많은 비극의 작법으로 써먹혔고, 그 비극의 양이 질로 전화될 때 예고된 또 하나의 비극적 코미디가 바로 10·26이었다. 나는 그때 그 시대에 가지고 놀림을 제대로 당하던 운동권 대학 초년생이었으므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그때 그 시대를 맘껏 조롱하고 희롱하는 방법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한들 유감이 있을 수 없다. 그 희롱과 조롱마저 지루했을 따름이지. 희롱당하고 조롱당했던 사람들이 희롱과 조롱으로 그 기억에 앙갚음하는 시대가 온 것에 대해, 아, 역사의 잔이 한 순배 돌았구나, 싶은 소회는 있다. 그 사람, 박정희의 기억이 영화 <캐리>처럼 느닷없이 무덤 위로 손을 뻗쳐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마다 ‘누가 저 손 좀 도로 안 묻어주나’ 안타깝던 기억으로 보면, 감독이 택한 그 독하다는 조롱의 방식, 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갖고 놀아보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묻어나는 오프닝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만하면 제대로 갖고 논 거겠지? 라는 반문이 느껴지는 클로징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다큐멘터리를 시대극 필름통의 앞뒤 마개로 써먹은 발상도, 중간의 농담이 사실은 다큐멘터리 자체보다 진실에 가깝다는 역설적 강조법 같다. “제발 그 시절 존경하지 말래, 응? 사실은 이 영화처럼 갖고 놀다 확인사살까지 해야 하는 그런 거라고”라고 감독은 얘기하는 듯하다. 근데, 앳되고 앳된 박근혜 얼굴, 그게 걸린다. 그거야말로, 이 영화가 빠진 유일한 상업주의의 함정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그건 마, 무덤 위로 삐져 나온 팔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