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카메오이긴 하지만 왜 이 영화에 개그맨 홍록기와 시트콤으로 낯익은 봉태규가 나오는 걸까. 또한 당대의 2인자 차 실장으로 분한 정원중조차 시트콤을 통해 각인된 연기자다. 게다가, <한겨레> 기자인 임범이 왜 전두환으로 나오는 걸까. <한겨레>는 전두환과 박정희가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만든 신문 아닌가. 10·26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그리면서 어쩌자고 이런 농담 같은 캐스팅을 했을까. 혹시 <그때 그 사람들>은 웃자고 만든 영화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박정희. 그가 군사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는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간단히 진압해버렸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거짓 평온이 흐르고, 시민들은 한껏 웅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았습니다.”
여기서 ‘뜻밖에’와 ‘뜬금없게도’란 말이 귀에 박힌다. 내레이터이자 출연배우인 김윤아가 귀에 박히게 발음한다. 생뚱맞은 단어들이다. 문장들의 자연스런 흐름을 위해서라면 두 단어는 ‘필연적으로’ 혹은 ‘당연하게도’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말이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임상수 감독은 말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인과율이란 실은 허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중이 참여한 정의의 시위가 뜻밖이라면, 한 영웅주의자가 저지른 10·26은 당연히 뜬금없는 일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인과율, 혹은 역사 진화론이 괄호 안에 밀어넣은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다. 별다른 설명없이 만 하루 동안에 벌어진 사건에 집중하는 이 보고서는 냉담하며 자기의 인물 가운데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혹은 모두 동정한다.
1인자 박정희는 외로움에 찌든 노인일 뿐이며(그는 부하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로 불린다), 2인자 경호실장은 오만하고 경솔한 권력중독자다. 3인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백윤식)은 2인자에게 받은 모멸감을 민주주의의 결핍으로 오인하는 가련한 과대망상증 환자일 따름이다. 그를 따르는 주 과장(한석규) 역시 돈과 권력의 상대적 결핍을 끔찍해하는 생활인으로 그려진다. 육군참모총장이란 사람은 자기 한몸 추스르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이 작은 인간들의, 살인극으로 이어진 감정 싸움과 서열 다툼이 한국사회를 뿌리째 흔들었고 현대사의 진로를 뒤바꿨다. 살인 계획은 허술했고 그 계획을 지지할 명분과 후속책도 급조됐으므로, 그 모든 과정은 참혹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소동극이 될 수밖에 없다. 홍록기와 봉태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건이 숭고해지거나 비장해질 리는 만무다.
이 영화가 어느 편에게나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의 가족이나 그를 국부로 존경해온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불경한 묘사이고, 그 시대를 억압과 고문으로 견뎌낸 사람들에게라면 혹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가족과 동료를 잃은 사람들에게라면 영화 속의 박정희와 하위 권력자들이 너무 평범하거나 안쓰럽게 그려졌다고 느낄 것이다. 놀랍게도 영화 속 박정희를 증오하기 힘든 약점의 인물이며 그를 연기한 송재호의 피로하고 순한 얼굴은 결코 난폭하거나 사악해지지 못한다.
이 영화의 정치적 태도가 애매하다는 비판은 비판으로 성립될 수 없다. 임상수 감독은 어느 편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음모론과 대의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결국 약점투성이의 개별자였을 뿐임을 전제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 영화가 재구성한 10·26은 노선 투쟁도 면밀한 계획의 산물도 아니며, 그저 지리멸렬한 생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거의 미쳐버린 인간들이 빚어낸 희비극일 뿐이다. 역사는 종종 이성과 필연보다 광기와 우연에 속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핑계로서의 동기가 아니라 제어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관찰이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 중 하나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실들을 순례하는 트래킹숏이다. 취조라는 이름의 추악한 범죄들이 그곳에서 저질러지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그곳에 ‘뜻밖에’ 도착했고, 누구도 그곳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그 추한 행위의 반복성과 절대성이, 느리게 수평이동하며 물리적 장벽을 초월하는 특권적 카메라의 전언이다. 이 장면은 처참한 살인극이 일어난 뒤 ‘뜬금없게’ 죽어버린 1, 2인자와 성실한 경호원들과 순박한 요리사들의 곳곳에 흩어진 시신을 공중 트래킹으로 응시하는 후반부의 숏과 조응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짓눌린 관념 혹은 그들의 선택에 관한 해석 일반에 대한 비평이다. 그를 위해 임상수 감독은 수사의 기교를 벗어던지고 사건과 인물의 표면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알레고리와 은유의 수사가 그리고 역사를 전용한 장르영화가 도달할 수 없었던 두터운 입체감과 육중한 박진성에 이른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질화하는 극단적 정치적 냉소주의가 위험하다 해도, 이것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기존의 한국영화가 이르지 못한 경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