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는 한국영화의 밑거름이다”
조명 _ 이주생
이주생(44)씨가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이 1979년의 일. 현재 조명감독협회 이사장인 그는, 스크린쿼터부터 스탭처우 개선까지 영화계의 크고 작은 현안을 두루 꿰고 있는 충무로의 큰어른이다. 후덕한 교장선생님처럼 점잖은 분위기가 인상적인 그는, 영화계가 너무 오랫동안 스크린쿼터에 매달린 탓에 장비 국산화, 배급 독점, 영화인 재교육 등의 중요한 사안들을 간과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독립영화의 배급 시스템. 사전제작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단 한개의 독립영화 전용관이라는 그의 의견은, 애정을 기울여 완성한 영화들이 관객과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어떻게 독립영화를 하게 됐나? 이주생씨가 조명감독으로 참여한 첫 번째 독립영화는 영화아카데미 2기 출신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 <자유부인 1990>으로 박 감독과 함께 입봉했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조수 시절에도 그는 영화아카데미 초반 기수들의 실습작품에 참여해왔다. 함께 배우는 입장에서 어울렸던 관계가 거미줄처럼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 최두영 촬영감독 등 그 시절 친구들부터, 홍두현 감독(<노을소리>)처럼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 둘도없는 지인이 된 이들, 여기에 충무로에서 만난 인연과 소문을 듣고 시나리오를 건네오는 감독들까지…. 이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감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변함없는 기준은 바로 ‘시나리오의 재미’라고, 그는 덧붙인다.
* 독립영화를 하는 이유는? 조수들의 차비만 챙겨주는 선에서 개런티도 받지 않고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몇편이던가. 대부분의 경우 수익이 생기면 사후에 배분받기로, 이른바 지분참여방식으로 참여한 그 영화들이, ‘투자비용’을 돌려주는 경우는 (다들 짐작하다시피)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주생씨는 지금도 1년에 2, 3편씩 꼬박꼬박 독립영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상업영화는 1년에 한편꼴). 그러나 “안 좋은 영화는 독립영화건 상업영화건 절대 거절”이다. 단지 정 때문에 ‘돈 안 되는’ 작업에 열심인 건 아니었다는 이야기. “독립영화의 풍부한 토양이 좋은 상업영화를 만드는 비롯의 밑거름”이라고 믿는 그는, 그 모든 작업들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한편 상업성이나 제작사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스탭들이 “평소에 시도해보고 싶었던 새로운 장비며 아이디어들을 망설임 없이 실험해볼 수 있는” 자유분방함은, 독립영화만의 매력이라고. 새로운 장비나 기술에 누구보다 민감한 위치이기에, 그런 기회는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독립영화에 바란다 그는 독립영화 스탭일수록 현장에서 더욱 독한 프로 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이건 독립영화니까 등의 안이한 핑계는 용납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감독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는 상황은 영화의 완성도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 이제는 독립영화에도 전문적인 제작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많은 이들이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영화가 제대로 된 상영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현실. 돈을 벌 수는 없어도, 최소한 완성한 영화를 발판으로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 정도는 갖출 수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 그의 이유있는 항변이다.
* 필모그래피 상업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 <품행제로> <오! 해피데이> <아홉살 인생> <알포인트> 등 다수 독립영화 <노을소리>(홍두현) <애로영화>(김시경) <신도시인>(홍두현) <달려라 장미>(김응수) 등 다수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라도 계속 떠들라”
편집 _ 문인대
영화제작에서 거쳐야 하는 여타의 까다로운 단계들과 달리 편집은, 컴퓨터 한대와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기본’은 할 수 있다. 따라서 만능이 되어야 하는 독립영화 감독이 편집단계까지 외부의 손을 빌리는 것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건상 보충촬영이나 재촬영이 거의 불가능한 독립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편집과 사운드. 문인대(44)씨는 “홀로 작업을 해왔던 감독들이기에, 편집에서만큼은 객관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큰 것 같다”고 말한다. 언제나 감독의 의도와 색깔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가, “처음으로 제3자에게 자신의 작업물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잔뜩 경직된 감독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이렇다.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라도 계속해서 떠들어댈 것. 대개의 경우 감독들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게 마련이다.
* 어떻게 독립영화를 하게 됐나? 각종 영화제를 통해 웬만큼 유명해진 독립영화의 크레딧에서 문인대씨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 영업을 하면서 영화를 꿈꿔왔던 그가 친구와 함께 아비드 편집실을 차린 것이 97년. <7인의 새벽>으로 처음 상업영화의 편집을 맡은 것이 이듬해고, 첫 단편영화 <줄서기> 역시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일이었다. “함께하는 감독들에게 일단 편집자의 해석을 들려준 뒤, 생각이 다르다면 함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유연한 작업방식 때문일까. 이후 그의 손에 촬영된 필름을 맡긴 감독들은 권종관, 민동현, 송일곤, 박진표, 봉만대 감독 등 하나같이 주류에서 약간씩 벗어난 인물들. 그러던 인연이 어느 순간 상업영화까지 이어졌고, 이를 통해서 또 다른 일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니 그에게 독립영화는, 상업영화로 연결되는 통로였던 셈이다.
* 독립영화를 하는 이유는? 문인대씨는 상업영화 편집을 할 때마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다. 그것은 바로 제작자, 촬영감독, 배우 등 때때로 편집실 뒤켠의 소파에 앉아 편집본을 시사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 그 사람들이 한마디씩만 의견을 말해도 배가 산으로 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나 편집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깊이있는 소수의 의견. 그 점에서 감독 한명과 1주일 이상 붙어앉아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독립영화는, “감독과 긴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필수적인” 편집기사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에게 최고의 순간은, 완성된 영화를 처음으로 스크린 위에서 보게 되는 시사회 그 이후다. 배우와 감독, 제작자 등에 비해 아무래도 스탭들이 소외되게 마련인 상업영화와 달리 독립영화의 시사회장에서는 고생을 함께한 동료들과 저마다 주인공처럼 잔치를 벌일 수 있기 때문이란다.
* 독립영화에 바란다 그러나 문인대씨의 사람좋은 웃음만 믿고 무턱대고 그의 편집실을 찾아간다면, 가감없는 의견에 상처받기 십상. 작업료나 일정과 관계없이 가차없이 거절한 작품도 여럿이라는 그는, “영화를 찍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독립영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날카로운 지적을 서슴지 않는다. “독립영화를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혹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 한편을 만들고야 마는 몇몇 감독들”을 향한 그의 직언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독립영화인을 생각하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 필모그래피 상업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S다이어리> <동감> <내 마음의 풍금> 등 다수 독립영화 <지우개 따먹기>(민동현) <역진화론>(김정구) <이발소 이씨>(권종관) <죽어도 좋아>(박진표)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