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때 그 사람들> 후폭풍 [3] - 임상수, 남재일 대담 ②
2005-02-22
글 : 남재일 (문화평론가)
사진 : 정진환

나는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임상수 감독, 문화평론가 남재일, 이종도 기자(왼쪽부터)

남재일 | 어떤 사람들은 당신 영화에 비주류를 향한 공감이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주류에 대한 반감이 더 큰 것 같은데,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부류가 있는가?

임상수 | 없다. (웃음) 주류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주류나 못사는 사람들, 약자들에 대해 연민은 갖지만 동질감은 못 느낀다.

남재일 | 그 말은 존재가 사회적으로 뿌리박은 장소가 없다는 얘기이고, 그렇게 되면 정치적 관점은 없을 수밖에 없다. 물론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적 관점은 어떤 유형이든 계급성이 없는 그냥 단순한 지적 입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그렇다.

임상수 | 나도 정치적 관점이라고 내세울 만큼 어느 사회적 집단과 나를 동일시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다. 한심하지 않은가. 배급사가 배급 취소하는 영화나 만들고 <조선일보>에 씹히기나 하고. (웃음)… 나는 정말 이게 마지막 영화가 될 수 있다고, 한국사회에서는 더이상 작품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혼자여서 그런가? 내가 영화판에 친구가 없다. 영화판이 아니라 어디에도….

남재일 | 어디선가 자신은 ‘정신적인 귀족’이라고 말한 걸 본 적이 있다. ‘철학적 귀족’이란 말은 들어봤는데, 아마 같은 말인 것 같다. 그런데 그거 하면 배고프고 외로워진다고 그러던데….

임상수 | 그건 우리 아버지가 수입이 없는 사람이어서 잘해주지 못하니까 애들 앞에 앉혀놓고 한 말이다. 내가 수입이 없어서 너희가 이렇게 못살지만 정신적으로는 귀족이다라고. 나한테는 그게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득을 위해 무릎 꿇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문제로 <한국일보>에서 해직당한 기자였다. 그때 박정희가 비판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한국일보>도 내부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념대립의 블랙홀에서 개인을 구하고 싶다

남재일 | 나는 임 감독이 아나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나키의 핵심은 어떤 명분이든 형식의 도구적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이념의 지향보다 그 적용 맥락에 시비를 걸 수밖에 없다. 굳이 아나키의 정치성을 말하면 ‘반정치의 정치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처럼 정치가 특권화돼 있고, 도구적 가치에 불과한 정치적 관점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경직된 권위주의 문화에서는 정치에 함몰된 개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 정치성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상수 | 나는 주류적인 것에 대한 반감이 있어서 아나키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주류여야 하지 않는가.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는 좌파든 우파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면 인정을 잘 못한다. 지금 한국은 모든 게 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로 얘기하니까 구체적인 문제의 핵심은 피해가게 된다. <그때 그 사람들>을 그런 틀로 보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정치적 시각에서 재단될 것이다. 이념대립은 사람을 잡아먹은 블랙홀 같은 거다. 나는 거기서 개인을 꺼내오고 싶은 사람이다.

남재일 | 친구가 없고 정치적으로 휩쓸리기 싫어하면 사적인 인간관계는 어떻게 맺는가?

임상수 | 여자하고 술 먹는 거지. (웃음) 나는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제한돼 있어서 그걸 술로 푼다. 술을 마시면 누구하고도 친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남자하고만 술 마시는 건 좀 싱겁다. 여자들만 있는 술자리에 나 혼자 있는 것 그건 특종이지. (웃음)

남재일 | 다른 사람들은 숨기는 말을 솔직하게 한다. 당신은 몇년 전에 베를린영화제에 갔던 경험을 신문에 글로 쓴 적이 있다. 내 영화 기자회견장은 텅텅 비었는데, 에미르 쿠스투리차가 기자회견할 때는 미어터져서 부럽더라고 했더라. 그런 건 사람들이 쑥스럽거나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서 다 숨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남들은 다 하는데 삼키는 말도 있을 거다. 내가 보기엔 수줍음이 많은 것 같은데, 영화는 스타카토 같더라. 툭툭 끊어지는 그 사이에 뭔가 말을 삼키지 않나 싶은데….

임상수 | 맞다. 나 수줍음 무지 많다. (웃음) 질문은 이해하겠는데 답변은 떠오르지 않는다. (웃음) 베를린 기자회견 이야기는 불리한 줄 몰랐는데 지금 들으니까 알겠다.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그리고 그런 솔직함이 타인에게 귀엽게 받아들여질 거라는 전략도 깔려 있다. 내 영화 네편은 모두 일종의 틈새시장에 서 있다. 다른 감독들하고는 다른 화법으로 다른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다. 그게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할 수도 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얜 뭐야, 하고 귀엽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온화한 연민을 가진 사람

남재일 | 개인적인 질문인데, 아기가 없다.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는 데 특별한 의미를 두나?

임상수 | 일단 나는 아버지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면 대단히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지금 같은 사태에 직면했을 때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라면 지금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남재일 | 나는 영화가 바닥에 있는 사실을 보여주되 그걸 토대로 한 판타지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판타지가 없는 소설을 쓰는 장정일이나 희망이란 단어를 경멸한다는 김훈과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임상수 | 나 역시 판타지가 없는 사람일 수 있다. 나는 판타지를 경계하고, 김훈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누군가 내게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라고 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나는 온화한 연민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다만 희망이나 온화한 연민을 오래 지속하려면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봐야 한다. 가짜를 보고 희망이나 연민을 느끼면, 그게 가짜라는 것을 아는 순간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희망이나 온화한 연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재일 | 여성과 성적,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가?

임상수 | 그런 판타지는 없다. 작품으로 그렇게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주변 여자들은 내가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한다. 섹스만 같이 하고 계속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내 마누라는 그걸 알지. 내가 대단히 수줍어하고 정말 말이 없고 혼자 세상에 처박혀 사는 예의바르고 마음 약한 남자라는 걸. 그런데 인터넷 기사를 보면 정말 싸가지 없고 공격적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마누라가 인간아! 너 왜 이런 식의 평가를 받고 돌아다니니라며 뭐라고 한다. (웃음)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이해받지 못함’, ‘코드가 다름’, ‘외로움’을 강조했다. 영화도 사람도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자신의 주장이 ‘기본에 충실하고 정직하자’는 건데 그게 왜 그리 어려운지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기본의 전달을 방해하는 것, 즉, 권위에 대해 ‘씹을’ 때 몹시 흥겨워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얘기를 할 때는 다소곳하고 외로워 보였다. 이 낙차를 그는 지혜롭게 솔직함으로 메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임 감독은 재지 않고, 간혹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이거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도록 했다. 나는 자신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는 것이 일종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과 싸울 의사가 없으니 나를 공격하지 마라’는 전언과 ‘내가 보여주었으니 그대가 찾아오라’는 구애를 압축적으로 형식화한 것. 내게 그런 전략은 외로움과 확신의 표현으로 보인다. 세상과 싸우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에 구애를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상처를 감내해야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구애법. 나는 그의 솔직함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니 앞으로 그의 영화를 볼 땐 수다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만 보지 말고 자기 안에 남고 싶은 모습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다변은 세상과 싸우는 창이자 자신을 가리는 방패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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