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3]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③
2005-02-23
글 : 이종도
사진 : 이혜정

2월14일 월요일

세 거장의 공동작품 <티켓>

<파라다이스 나무>
<티켓>

새로운 한주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는지 소복한 눈이 베를린을 뒤덮었다. 영화제 경쟁부문도 점차 알찬 작품들로 채워진다.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를 통해 관객에게 논쟁적인 화두를 어떻게 던질 것인가에 대해 지혜로운 비전을 보여준 <파라다이스 나우>(하니 아부-아사드 감독), 인간은 어떻게 연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세 거장(에르만노 올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켄 로치)의 <티켓>, 그리고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들려주는 <고 미테랑 대통령>(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잘 숙성된 영화의 그윽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평생 단짝인 칼레드와 사이드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자리를 잃던 날, 그들은 자신들이 자살 폭탄조로 뽑혔음을 알게 된다. 다음날 아침 비디오에 부모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결혼식 하객 차림으로 텔아비브를 향해 떠난다. 피 한 방울, 탄피 하나 없이 만들어내는 극적 긴장이 혈관을 죄어오지만 감독은 이 대목에서 폭탄 테러를 불발로 만든다. 그리고 폭력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하니 아부-아사드 감독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항공 기술자로 일하다가 영화로 방향을 돌렸다. 감독은 “양쪽의 교전으로 하루도 촬영을 중단하지 않은 날이 없다”며 여섯명의 독일 스탭들이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 뒤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영화기금은 <파라다이스 나우)의 배급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영화의 힘이 이스라엘을 움직였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명상록>을 연상케 하는 <고 미테랑 대통령>은 VIP 전용 클럽의 호사스런 프랑스식 요리 같은 작품. 젊은 작가 앙트완은 미테랑 대통령의 전기작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한 노인의 삶과 동시에 최고 권력자의 삶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사치스러운 지적 유희 속에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세 거장의 이름만으로도 티켓을 사게 만드는 <티켓>은 일찌감치 티켓이 동나서 급히 영화제쪽에서 상영관을 하나 더 잡아야 했다. 손자의 생일 파티를 위해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노학자는 손자를 떠올리며 가난한 모자 승객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네고(올미 감독), 노인 검표원은 객차 안에서 승강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화해하게 만들고(키아로스타미),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스코틀랜드의 10대들은 가난한 알바니아 가족을 돕게 된다(켄 로치). 기차 안의 좁은 사회를 유럽사회의 축도로 그려낸 거장의 기지가 빛을 뿜는다. 특히, 슈퍼마켓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축구 경기를 보러 떠났다가 이웃의 아픔에 눈뜨게 된 10대의 이야기는 뭉클하고 가슴 벅차다. 셀틱스팀의 광팬인 세 소년은 베컴 유니폼을 입은 알바니아 소년에게 반가운 마음에 샌드위치를 사줬다가 티켓을 잃어버린다. 역무원에게 붙잡히게 된 소년들은 알바니아 소년을 의심하게 된다. 감독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 위기를 탈출하는 순간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켄 로치 선생님,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말씀하시려고 했던 거죠? 그런 거죠? 켄 로치 선생은 이렇게 답하셨다.

2월15일 화요일

우여곡절 겪은 <페이트리스>

<페이트리스>

영화제 개막 직전 공식 경쟁부문에서 <하이츠>(Heights)가 빠지고 대신 들어간 <페이트리스>(Fateless)가 그나마 오늘의 기대작이다. <하이츠>가 빠진 이유는 주연배우 글렌 클로스가 베를린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였다. 클로스는 갑작스러운 딸의 신상문제를 불참 이유로 댔다는데, 코슬릭 위원장은 이 작품을 애초에 선정한 이유가 (작품성이 아니라) 글렌 클로스라는 대배우를 둘러싸고 일어날 미디어 이벤트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베를린을 찾을 생각이었던 크리스 테리오 감독과 그외 출연배우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제작사인 ‘머천다이즈 아이보리’가 코슬릭 위원장에게 보낸 서신 내용이 알려지면서 소동의 내막이 밝혀졌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 원작의 <페이트리스>는 경쟁부문에 오르지 못했다가 케르테스가 베를린영화제를 비난하는 등 난리 끝에 본선에 올랐다. 헝가리의 거장 이스트반 자보와 함께 14작품이나 함께한 카메라 감독 라조스 콜타이의 데뷔작이다. 14살 먹은 헝가리 유대인 소년이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들어가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간다는 이야기. 훌륭한 카메라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 모르는 연출의 부조화가 영화 속 소년의 운명과 비슷하다.

총과 대포가 들어올 무렵, 황혼기에 접어든 사무라이 시대의 풍랑 속에서 사랑의 행로를 탐구하는 요지 야마다 감독의 <숨겨진 칼>도 범상함에 머물렀다.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친구로 헤어졌다가 적으로 만나는 우정을 씨줄과 날줄처럼 풀었는데 새로움이나 깊이는 없다. 15년 전 유괴된 딸을 찾아 헤매는 엄마와 잃어버린 딸로 추정되는 열다섯살 소녀 니나(줄리아 훔머)의 이야기인 <유령>(크리스티앙 페졸트 감독)은 유령처럼 불안하게 떠도는 줄리아 훔머의 연기 말고는 이야기가 힘이 없다. 아직 웨스 앤더슨과 차이밍량과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기다리고 있지만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엔 독기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취한 말들의 시간>에 나오는 말처럼 이들 영화에 베를린 맥주인 베를린 필스너라도 잔뜩 먹였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2월16일 수요일

웨스 앤더슨 그리고 차이밍량!

<스티브 지수와 함께하는 물 속의 삶>
<떠다니는 구름>

EFM의 한국영화 부스로는 끊임없이 바이어들이 몰려왔다. <스크린>은 2006 독일월드컵에 맞춰 케네스 브래너, 장 자크 베네, 에미르 쿠스투리차 등이 내년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옴니버스 축구영화를 첫머리에 보도하고 1면 중간에 “문제적 감독 장선우의 <천의 고원>이 이탈리아 배급사 ‘러키 레드’에 팔렸다”고 크게 보도했다.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가 일본과 싱가포르에 팔렸고,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도 일본에 270만달러 내외의 가격에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스티브 지수와 함께하는 물 속의 삶>(웨스 앤더슨 감독)과 <떠다니는 구름>(차이밍량 감독)을 보지 않았다면 베를린영화제를 보지 않은 것이다. 가족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와, 소통 불가능한 현대인을 섹스로 보여주는 차이밍량의 세계는 우뚝했다. “빌 머레이는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에로틱하기까지 한 피로한 표정이 이 작품에서는 더 깊어져 있다.”(<타게스슈피겔>) 이강생이 첸시양치의 입에 대고 사정을 하는 마지막 장면은 구역질과 각성을 동시에 안겼다. 웨스 앤더슨의 기자회견장은 ‘웨스 월드’의 뒷맛을 맛보려는 기자들로 터져나갈 듯했지만 차이밍량 감독의 회견장은 그의 영화 속 도시처럼 텅텅 비어 대조를 이루었다. 독일 언론은 독일영화와 할리우드영화 이외엔 관심이 없다.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아니라 독일베를린영화제다.

차이밍량 감독 인터뷰

“포르노에 대한 논쟁을 원했다”

-당신 영화 속에서 육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육체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누추한 것이자 명백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육체는 숭배할 만한 것이며 누군가에게 육체는 천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외롭고 짧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기 어렵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것은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부정적으로만 육체를 사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내 영화를 포르노그라피로 누가 보겠는가.

-왜 포르노의 형식을 들여왔는가.

=몸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서 궁금했다. 베를린이나 타이베이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게 포르노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 영화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으면 했고, 이런 토론을 하게 되서 기쁘다. 일본에서 온 포르노 배우는 여기서 찍는 게 포르노인 줄 알았다가 아닌 줄 뒤늦게 알고 당황했지만 훌륭하게 소화해주었다.

-왜 같은 배우들과 계속 작업하는가.

=나는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내게 영화란 나를 향한 독백이다. 영화 안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인생에 대한 느낌을 얼굴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이 배우들은 그런 나의 관심사를 보여줄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가뭄과 수박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공허함을 전달하고자 했다. 몇년 전 대만에서 큰 가뭄이 있었는데 물이 떨어지자 물보다 수박 값이 싸졌고 사람들은 수박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은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없는 것이었다. 물의 부족이란 바로 사랑의 부족을 의미한다.

-여배우가 의식을 잃었는데도 포르노를 계속 찍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 장면을 찍었는가.

=어떻게 찍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꼭 그 여자배우만 봐서는 안 된다. 상대 남자배우도 있는 거니까. 나는 앞으로도 육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자료정리 및 도움 진화영 베를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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