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중간결산 [1] - 이종도 기자의 중간점검 ①
2005-02-23
글 : 이종도
글·사진 : 이혜정
지금 베를린의 날씨는…

이종도 기자가 살펴본 베를린 영화 기상도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 (아모스 오즈)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2월10∼20일)는 머지않은 과거의 역사를 정치화한 영화제였다. 길게는 19세기 아프리카 식민지화부터(개막작 <맨투맨>) 가깝게는 나치에 저항한 백장미단 사건(<소피 숄-마지막 날들>)과 나치 수용소(<페이트리스>)에서 최근의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호텔 르완다> <4월 언젠가>)과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파라다이스 나우>)까지 과거를 거슬러올라가 현재적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몇몇 뛰어난 정치성 짙은 영화들이 베를린영화제에 무게감을 실어주었으나 경쟁부문의 절반은 함량 미달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가 경쟁부문에 올라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주었다. 임권택 감독은 명예 금곰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관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영화는 <여자, 정혜>(이윤기 감독), <신성일의 행방불명>(신재인), <마이 제너레이션>(노동석, 이상 영포럼 부문), <세라진>(김성숙, 파노라마 부문) 등 네 작품을 비경쟁 부문에 진출시켰다. 폐막을 앞둔 시점에서 영화제를 중간 점검했다. 신재인 감독이 보내온 베를린 기행문을 여기에 더했다. 편집자

2월9일 수요일

안개 덕에 신용불량자 되다

축축하게 안개에 젖어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넘어오니 벌써 밤 10시. 신용카드도 안개에 젖었는지 호텔 카운터는 카드가 되지 않는다며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한다. 저 먼 한국에서 열다섯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당신네 영화제를 보러왔고 여기는 베를린영화제가 공식 지정한 호텔이라고 따지고 싶었는데,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강제 추방당하는 외국인노동자의 표정을 지으며 호텔 문을 나섰다. 바람에 붉은색 베를린영화제 깃발이 나부꼈다.

2월10일 목요일

구박받은 개막작 <맨투맨>

<맨투맨>

2층 시내버스를 타고 주행사장인 포츠담 광장까지 간다. 포츠담 광장 못 미처 베를린의 자랑인 노란색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이 보인다. 주민들이야 구동독 사람들 먹여살리느라 허리가 휜다고 하지만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이 즐비하고 세계적인 영화제까지 치르는 도시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프레스센터가 있는 하얏트호텔에 들어가 30유로를 내고 프레스 카드를 받았다. 주행사장인 포츠담 광장 일대는 아침 여덟시부터 기자들과 관계자들로 붐빈다. 배정받은 우편함으로 가서 자료를 받고 영화제 가방도 받았다. 개막작을 보러 시네맥스에 들어가면서 그제야 영화기자 임명장을 받은 듯한 뿌듯함에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다. 베를린영화제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지 기자지, 하는 알량함 말이다. 옆자리에 앉은 띠동갑도 안 될 듯한 어린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시몬은 독일 마인츠대학 학보사 기자라고 한다. 아프리카인도 우리 유럽인과 똑같은 사람, 이라는 매우 뒤처진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의 개막작 <맨투맨>은 그 흔한 박수 한번 기자들에게 받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텅 빈 위장 안으로 밀어넣는다. 개막작이 보여준 저 미개한 서구영화인의 현실인식과 거친 빵껍질이 입천장을 두루 어지럽힌다. 도착한 지 이틀째, 베를린의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부는 지랄맞은 날씨였다.

2월11일 금요일

웰 컴 투 <호텔 르완다>

<호텔 르완다>

뮤직비디오와 CF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입봉했다는 마이크 밀스 감독의 <엄지손가락 빠는 아이>는, 예쁘고 착하게 만들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안달이 난 영화였다. 뮤직비디오에 이스트를 잔뜩 입힌 다음 뻥튀기 기계에 넣고 돌린 듯한 성장영화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키아누 리브스의 얼굴도 있고 선댄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받은 루 테일러 푸치의 얼굴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어떤 냄새를 피우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탈북 청소년과 불법 체류 노동자 청소년들 얘기만 들어도 아마 손가락 빨기는 그만하게 될 텐데. 물론 자기가 진 십자가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법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아주 사소한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터 관객은 어떤 결말이 날지 뻔히 안다.”(<타게스슈피겔>)

이안 매켈런이 주연을 맡은 <정신병원>에서 보상을 받으려 한 마음은 좀더 상처받았다. 데이비드 매켄지 감독은 비비 꼬인 플롯으로 베를린의 어긋난 환심을 샀던 것 같다. 정신병원 의사의 아내가, 정신병 환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갈피를 못 잡고 남편과 병원원장과 정신병 환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는 아주 선량하게 보자면 미셸 푸코식으로 이 세상은 하나의 큰 정신병원이며 이 정신병원에서는 여자의 욕망이 남자의 시선 아래 재단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주 불량하게 보자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노동과 고통은 없고, 성욕과 성욕이 뒤엉켜 갈등을 빚어내는 권태만이 있는 곳이다. “영화의 고급스러운 화법과 화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고 거의 아찔한 결말로 향해가는데도 종종 지루하게 느껴진다.” (<타게스슈피겔>)

내리 본 세 영화가 모두 부실하니 속이 절로 헛헛하다. 저렴한 아케이드 식당가엔 밥 때를 놓친 기자들로 바글바글하다. 느끼한 완탕수프에 더 느끼한 볶음국수를 먹었더니 정말 화가 치밀어오른다. 이런 지루한 영화를 보고 저런 맛없는 음식을 먹으러 열다섯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다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잔인할 정도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그러나 나를 비롯한 수천명의 기자들은 단 한편의 영화로 구원을 받기에 이른다. <호텔 르완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독일 언론의 평대로, 테리 조지 감독은 ‘영리하게’ 르완다 인종 청소라는 예민한 정치적 화두를 드라마로 엮어냈다. 호텔 휴머니즘은 낡았지만, 호텔 모더니즘이나 호텔 포스트 모더니즘보다 더 재미있었다.

본인은 주류인 후투족이지만, 비주류인 투치족 아내의 일가와 피난 나온 투치족 모두를 합해 1268명이나 살려낸 호텔 매니저 폴의 실화는, 여독과 함량 미달의 영화가 준 중금속 독성을 말끔하게 씻어내주었다. 실제 주인공 폴은 기자회견장에서 이 영화가 세상의 아픔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웨이크 업 콜 노릇을 할 거라고 말했다. 폴 역을 맡은 돈 치들은 삽시간에 나의 우상이 되었다. 여태껏 영화기자를 하면서 기자회견장에 나온 배우 중 이렇게 멋진 배우가 또 있던가, 싶다. 기지와 양심과 용기를 두루 갖춘 우리 시대의 영웅이 탄생했도다. “주연배우 돈 치들은 실제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 역을 위해 맞춘 배우인 양 평생의 명연기를 펼친다.”(<벨트>)

모두의 무관심 속에 길바닥에서 칼에 맞아 죽어간 투치족들의 영혼을 불러내 달래주는 이 진혼곡 앞에서 영화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 조잡하게 만들었더라도 미리 감동받을 준비를 했을 영화였지만 말이다. 기자회견장은 이들에게 보내는 박수와 질문 세례로 아주 뜨거웠다.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동과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마주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서 예까지 날아온 거군요. “영화가 고발하고 있는 무관심은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다. 르완다 학살을 방치하고 언론인들까지 피난시켜버린 세계의 무관심 말이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 결말부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카메라맨과 같은 심정이 된다.”(<타게스슈피겔>)

다시 우연히 만난 마인츠 학보사의 시몬과 나는 미리 입이라도 맞춘 아마추어 배우들처럼, 짧은 영어로 깊게 감동받았다, 를 합창했다. 어쩐지, 오늘 전조가 좋았다. 커피를 들고 우아하게 하얏트호텔 앞을 지나가던 빌 머레이를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

임권택 감독 명예황금곰상 수상식 스케치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베를린 필름 팔라스트 극장에서 지난 2월12일 임권택 감독의 명예황금곰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영화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라며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며, 수많은 선후배들이 노력해온 토대 위에 내가 이를 대신해 받게 된 것으로 본다”며 자신과 영화인생을 함께해온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계속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준 피에르 루시앵과 그의 영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려준 베를린 전 영포럼 집행위원장인 울리히 그레고르와 에리히 그레고르 부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임권택(71) 감독은 평생 99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한국전 이후의 한국사를 영화화했으며 100편째 영화의 시나리오를 준비 중이지만 모두의 기대가 커서 한편으론 많은 부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임권택 감독의 특별회고전은 <춘향뎐>을 시작으로 3월까지 열린다.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일곱편으로 <왕십리> <족보> <만다라> <길소뜸> <서편제> <축제> 등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자료정리 및 도움 진화영 베를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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