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 스케치 [1]
2005-03-0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진 : 오계옥
정한석 기자가 말하는 홍상수의 현장이 특별한 6가지 이유

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이 지난 2월7일 촬영을 마쳤다. <씨네21>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이어 다시 한번 현장을 방문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그는 현장에서 많은 걸 결정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신기한 동물이었나를 되돌아보게 하다가도, 문득 자의식을 지닌 영화형식이란 무엇인지 질문받는 듯한, 그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전작들과 다름없이, 구조는 알쏭달쏭하고, 인물들은 흥미롭다. 이제 남은 것은 개봉을 기다리는 일인데, 여기저기 빈구석을 상상으로 메워넣으며 <극장전>이 펼쳐지는 5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모든 현장마다 기적처럼 일어나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모든 영화현장이 다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머리로 마련한 구상을 현장에서의 인상과 감각으로 깨뜨려나가는 특이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한다. 촬영 전에 트리트먼트 한번 보여주고 다시 뺏어간 뒤에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는, 네가 맡은 여주인공 이름이 뭐냐며 장난처럼 되물어보기도 하는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 준비가 여주인공 엄지원으로서는 그저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촬영분 첫날, 현장에서 만난 엄지원은 잠을 설쳤다고 했다. 홍상수 감독과 만나서 다른 말은 안 하고 “혈액형 얘기, 사는 얘기”만 나눴다는 이기우는 “꿈에서도 감독님과 가위바위보 게임 하며 술만 먹었다”고 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이미 한번 그 리듬에 취한 적이 있던 김상경만 “다 된다”고 호탕했다.

홍상수의 현장에는 무엇이 있나?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쓰는 쪽지대본

홍상수 감독이 트리트먼트만을 갖고 촬영에 임하고, 실제로 촬영 당일날 현장에서 대본을 쓴 뒤에 배우들에게 그것을 주고 연기를 시킨다는 것은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이 점은 배우들에게만 당혹스런 일일까? 지난해 12월25일, 오뎅집에 앉아 요즘 새로 개발한 술먹기 게임(그가 이미 발명한 유명한 게임은 가위바위보 게임이고, 이 게임의 목적은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데 있어 보인다)이 있다고 스톱워치를 만지작거리는 홍상수 감독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촬영 당일날, 대본이 나오지 않아 당혹스러운 적은 없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자. 막상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풀리는 것이 없다. 스탭들과 배우들은 감독만 쳐다보고 있고, 모든 시작이 나에게 달려 있는데 나오는 것은 없다. <아메리칸 뷰티>를 만들었던 샘 멘데스는 감독이 현장에서 “잘 모르겠는데”라고 주저하는 순간 그 영화는 끝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작도 못한다는 건 더 위험한 경우다. 그러니까 배우들이야 그렇다치고, 모든 걸 떠맡을 긴장의 연속을 정작 홍상수 감독 본인은 과연 어떻게 헤쳐내는지 궁금했다.

<극장전>의 첫 번째 현장공개를 했던 때가 그런 날이라고 했다. 아침에 현장에 왔는데 “머릿속이 백지장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럴 때는 화장실에도 가보고, 괜히 연출부에게 커피도 한잔 달라면서 시간을 끌어본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재미있게 앓는 척하는 소리로만 들리지가 않는다. 구상과 언어의 시기를 지나 현장에서 몸으로 영화를 다시 만들려는 창작의 시도는 당연히 그 대가를 위해 고통을 수반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긴장의 아슬아슬한 대면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맞닥뜨려야만 진짜 감각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나온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 확신에 따라 배우들도 곧 흐름에 몸을 맡기고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홍상수 감독 영화현장의 흥미로움이 있고,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의 현장을 따로 또 기록하는 최소한의 이유가 있다. 브레송은 강조했다. “단순히 집행하는 자의 자세에 머물지 말자. 숏마다 미리 머리로 상상했던 이미지 위에 새로운 자극을 찾아내자.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착상을 중시하라(그리고 재창안하라).” “실재(현장)와 마주한 너의 팽팽한 집중력은 작품 구상 초기의 잘못을 명확히 해준다. 바로 너의 카메라가 그 과오들을 교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네가 새삼스레 느낀 인상이야말로 흥미로운 유일한 현실이다”라고. 홍상수 감독은 그 용법을 보기 드물게 ‘자기화’한다.

<극장전>은 어떤 영화인가?

어느 영화감독지망생의 하루

<극장전>(이 제목은 영화 속 영화의 제목과 같다)은 크게 볼 때,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이라는 두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 겹칠 것이다. 이기우와 엄지원은 영화 속 영화에서 상원과 영실로 등장하며,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나이다. 종로 거리를 걷던 상원은 우연히 어느 안경점에서 예전에 자신이 좋아했던 영실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둘은 그날 만날 약속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가고, 골목에서 키스도 한다. 그 이상 추측이 가능하지만, 현장에서 본 그들의 이야기는 이 정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극중 영화감독 이형수의 작품 내용이다.

7∼8년째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데뷔 준비만 하고 있는 영화감독 동수(김상경)는 회고전에서 이 영화를 본다. 그는 영화 속 영화를 만든 이형수의 같은 과 후배이고, 오늘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이형수를 위한 동창 후원모임이 있는 날이다. 그는 그곳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오던 동수는 여배우 영실(엄지원이 1인2역을 한다)을 발견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안경점 앞에서 그녀를 다시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보는 데에도 성공한다. 한편, 극장 앞에서 친구를 만나게 되는 동수는 그의 가족식사에도 초대받지만, 결국은 어이없이 따돌림당하고 어슬렁거리며 남산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지금은 일이 없는 택시기사들 한 무리를 만나 술자리에 끼게 되고, 그들 중 술집 주인의 부인과 묘한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동수는 별안간 다시 산밑으로 내려와 동창회에 참석하기로 한다. 아마도 친구들 사이에서 동수는 ‘이상한 놈’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동창회에 여배우 영실이 찾아오고 적어도 그녀가 떠날 때까지는 얌전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이형수의 병원으로 문병을 가기 위해 자리를 뜨자마자, 술자리에서 여자 동창들에게 치근대며 술주정을 벌인다.

<극장전>의 현장방문은 모두 이 내용에 한정되어 8회에 걸쳐 이뤄졌고(그러나 그중에는 2∼3시간 견학 수준으로 있다 온 것도 있으므로, 온전히 8회차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영화잡지를 대상으로 한 현장 공개인 지난해 12월18일 종로 거리의 안경점 신을 시작으로, 종로를 주동선으로 한 영화 속 영화장면 3회분을 참관했고, 일간지를 대상으로 한 현장 공개인 1월17일 극장 앞 신을 시작으로 19일 중국집 장면, 25일 남산 꼭대기 술집, 26일 팔각정 주변, 29일 남산 밑자락의 갈빗집으로 이어졌다. 영화 속 현실에서의 회상장면을 몰아찍은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전작들의 경우처럼 대부분 영화의 신 순서대로 찍어나갔고, 29일 현장 당일 갈빗집 장면의 마지막 촬영신이 62신이었고(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대본에는 신 체크를 따로 하지 않으며, 편집을 거친 뒤에는 당연히 바뀔 것이다), 당일이 24회차였고, 평균 하루에 2∼3컷(신)을 찍어나갔고, 2월7일 29회차로 촬영을 마쳤다. 총 촬영신은 76신이다. 여기에 예상 가능한 플롯을 붙이자면, 동수는 영실이 간다던 경희대쪽으로 택시를 뒤늦게 잡아탈 것이고, 선배의 병실에 정말 도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수와 영실은 결국 만날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의 나열은 영화의 입구에 다름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풀어 조합해야 한다. 아직은 아니다.

홍상수는 어떻게 현장을 지휘하나?

현장을 지배하는 단어는 “뭐든지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 영화의 촬영현장은 대본쓰기, 세팅, 리허설, 테스트, 슛의 수순으로 반복된다. 그중에서도 다른 현장과 크게 차별점을 갖는 것이 당일 대본 쓰기다. 대략 40분 정도면 당일 분량이 나오는데, 촬영 일반에 관한 기술보다는 인물들의 액션과 대사와 간간이 붙어 있는 감정 설명들로 채워져 있다. 촬영 초반 안경점 앞에서 이기우와 엄지원의 연기지도를 할 때 보면,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대본에 형광펜으로 칠해놓은 대사와 그렇지 않은 대사들을 구분해놓고 있다. 말하자면, 배우가 전체 대사를 대본과 얼마나 똑같이 외워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장면의 느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중심적으로 잡아주는 대사를 정해두고, 그것을 따라 감정 리듬을 자연스럽게 타고 나가도록 할 때가 있다. 홍 감독은 그 대사들을 틈나는 대로 수정한다. 가령, 중국집 장면에서 아이들이 대사 때문에 부자연스러워질 때는 아예 일부를 빼버린다. 갈빗집에서 여배우 영실이 노래를 부를 때는 간주 부분에 해야 할 긴 대사를 즉석에서 만들어 보태넣음으로써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심기를 드러낸다. 배우들이 했던 말들을 대사로 옮겨놓는 것도 여전하다. 갈빗집에서 동수가 “크레딧 카드를 잃어버려서 개털이 됐다”는 말은 그 전날 엄지원이 실제로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사는 그 역할 자체로 거기 있어야만 하는 구조적 버팀목 같은 것과 현장의 리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말로 바뀌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나눠져 있는 것 같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를 둘러싸고 꼬리를 물어가던 대사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극장전>의 동수에게도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

대본이 나오면, 촬영과 조명팀은 세팅에 들어간다. 현장에 가 있는 동안 낮장면이 많았고, 특별히 복잡한 조명 설계가 필요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홍상수 감독은 조명(빛)에는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대전제의 원칙이 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걸 원한다. 그래서 항상 순서대로, 시간대로 맞춰서 찍는다. 편하게 바꿔서 찍는 게 일반적인데, 홍 감독은 그 시간의 느낌이 리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바꾸면 되게 싫어한다. 어떤 건 조명도 후지고, 그림도 후져도 그 순간에는 그게 맞는 거다. 예전에는 그림 만들어보려고, 이거 먼저 찍고, 저거 나중에 찍으면 안 되나 했는데, 지금은 안 그런다.”(김형구 촬영감독) 현장에 맞춰 선택되는 것에는 의상도 해당한다. 이건 거의 직관에 의존한다. 동수 역의 김상경이 줄곧 입고 있는 푸른색 점퍼는 현실장면 출연 첫날 시네코아 극장 앞에서 갑자기 홍 감독이 자신의 옷으로 바꿔 입힌 것이고, 그대로 촬영 내내 주인공 동수의 옷이 됐다. 여배우 최영실의 엄지원 역시 당일 입고 온 의상 그대로 줄곧 촬영했다.

카메라의 위치가 결정되면, 연출부가 배우들 대신 자리를 잡고 대강의 액션을 취한다. 그 이후에야 배우들이 카메라 앞으로 와 연기를 시작하는데, 슛이 끝날 때마다 배우들을 불러 모니터를 초단위로 멈춰가면서 조금씩 미세한 차이에 대해서 지적한다. 가령 상원이 안경점에서 영실을 발견하는 첫 순간에는 이기우에게 “아니야, 너무 나올 걸 확신하는 것 같잖아”라고 지적하고. 동수가 엉뚱하게 술집 여주인의 팔을 꼬집으러 올 때는 “상경아, 네가 애국지사라고 생각해”라고 지시한다. 갈빗집에서 영실에게 노래 신청하는 동수에게는 “상경아, <다시 사랑한다면>까지는 점잖게 하고, 부탁합니다는 장난스럽게 한번 해봐” 한다. 그 순간 동수의 성격이 날이 선다(도대체 한 문장을 이렇게 세심하게 양면해서 느끼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또는 여자 동창들에게 치근대는 동수를 보는 남자 동창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는 원래 이 친구가 갖고 있던 이미지보다 야리야리하게 놀았거든요. 여배우 간 다음에 돌아와서 퍼먹는 거예요. 진심이니까 좋아 보이기도 하고, 저놈은 원래 이상한 놈이니까, 하고 생각도 하고, 우리라도 정상으로 남아 있어야 되니까, 하는 생각도 하는 거고”라는 식으로 복잡한 심정을 설명한다. 그가 주연과 조연 상관없이 배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가장하지 말고”, “자기답게”, “창의적으로”다.

대체로 구조의 덩어리는 크게 변하지 않는데, 그 안에서 감정과 행동이 조금씩 자리를 찾아 살아날 수 있도록 끌어나간다. 더러는 너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다. 가령 갈빗집에서 동창들 앞에서 노래하는 영실을 줌아웃하여 보여준 뒤, 왼쪽으로 패닝하여 경청하는 동창들을 지나, 망연자실 빠져 있는 동수의 표정까지 가서, 얼굴로 줌인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던 신59는 결국 나눠 갔는데, 촬영감독에게 말하기로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너무 크게 잡힌다”라고 했지만, 뒤이어 내뱉은 혼잣말은 “좋게 보이려고 해도, 좋게 안 보이네”였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인지, 이 장소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의 취흥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퍼뜩 의심이 간다. 감정이 알몸으로 드러나는 것에 홍상수는 질색한다.

사진 제공 시네와이즈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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