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이 영화가 원래는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지난해 6월 말 <인어공주>를 개봉하고 딱 석달 쉬었다. 본래 “더 빨리 시작하려고 했다”는 그의 신작 <엄마 얼굴 예쁘네요> 시나리오는 감독이 <하루>의 조연출을 끝낸 뒤 쓰여졌다. 1979년 10월26일부터 1981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까지, 유신정권의 끝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가는 약 3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년 광호의 짧은 성장기였다. 원고를 들고 싸이더스를 찾아갔다. 스타 캐스팅이 되는 연령도 아니요 보송한 아이를 써먹을 연령도 못 되는, 사춘기라는 애매한 나이의 주인공을 들어 제작사는 “캐스팅 각도가 안 보인다”는 표현을 썼다. 마음을 접고 싸이더스의 다른 프로젝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데뷔하게 된 박흥식 감독은 <엄마 얼굴…>의 한 장면을 <나도 아내가…> 속에 슬쩍 집어넣어 아쉬움을 달랬다. 어린 봉수가 ‘우리 엄마 죽었다, 안 죽었다, 죽었다, 안 죽었다…’라며 이파리를 뜯는 모습이 바로 그 미련자국이다.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인 조성우 음악감독에게 <인어공주>를 촬영하다 불쑥 물었다. 이러이러한 영화가 있는데, 사람들이 안 하려고 들겠지? 라고. 조성우 감독은 시나리오를 보여달랬고, 재미있다며 제작사 블루스톰 배용국 대표를 소개해줬다. 그리고 투자사 쇼이스트 김동주 대표를 만났다. 감독의 주변인들은 “<나도 아내가…> <인어공주>에 이어 또 잔잔한 얘기를 한다”고 말렸지만 <인어공주> 촬영이 끝나갈 무렵 프리프로덕션을 위한 세팅은 모두 끝났다. 감독이 <인어공주> 후반작업을 하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한 <엄마 얼굴 예쁘네요>는 지난해 11월21일 전주에서 크랭크인해 현재 크랭크업을 코앞에 두고 있다.
키워드
폭압적인 시대, 흔적, 그리움
<엄마 얼굴…>의 시나리오는 감독의 개인적 기억에 바탕해 있다. 시나리오를 쓰게 된 직접적 기억은 학교 청소 시간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떼내던 순간이다. 17년간 한자리를 지킨 사람의 사진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액자 윤곽이 아닌 그 사람의 윤곽이 남아 있었다. 광호와 동갑이었던 박흥식 감독은 그걸 똑똑히 봤다. 중학교 3년간 교실 앞 정중앙에 자리했던 사진은 박정희에서 최규하로, 그리고 전두환으로 달라져갔다. “이상한 시기였다. 성장기에만 겪을 수 있는 여러 정서적 느낌들과 더불어 시대의 공기도 이상했으니까.” 그러므로 <엄마 얼굴…>은 특정한 세대에만 환기되는 성장기일 수 있지만 감독은 성장의 보편적 징후도 놓치지 않는다. “성과 사회와 자기 주변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보이면서 커나가는 시기니까 시대는 달라도 동일한 과정이 있다.” 광호는 여느 소년들처럼 성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가족에겐 이유없이 삐딱하며 약한 또래는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폭압적인 사회의 공기를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와 상관없이 발딱발딱 움직이는 열네살 소년의 혈기, 호르몬. <엄마 얼굴…>은 딱 그 나이만큼 알고 반응하는 광호의 호기심과 상상과 행위와 정서들을 죽 좇아간다. 최후 상실감에 도달하기까지. 박흥식 감독의 성장영화의 방점은 그곳에 찍혀 있다. 광호의 성장은 상실과 함께 찾아온다. 자기 주변 것들이 어이없게 상처받는 모습들을 보며, 광호는 그제야 그것들이 자신의 한 시절을 이루는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엄마 얼굴…>은 “폭압적인 시대, 흔적, 그리움”을 안은 성장통이다.
스토리
그때 그 시절 소년의 성장통
광호는 엄마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산다.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돈 벌러 가셨다. 화장품 외판원인 엄마는 어울리지도 않는 진한 화장을 늘 촌스럽게 바르고 다니고, 여동생은 그런 엄마 옆에 딱 붙어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를 연발하는 다섯살 꼬마다. 광호는 엄마한텐 반항하고 여동생은 쥐어박는다. 자기 집 안에서 광호가 좋아하는 사람은 셋방 사는 간호보조사 은숙뿐이다. 스물세살의 그녀는 흰 피부와 탐스러운 머릿결, 은은한 향내를 가진, 광호에겐 그저 여신이다. 앞집에 새로 이사왔다는 다운증후군 환자 재명이는 광호가 ‘바보’라 부르는 괴롭힘 대상이다. 광호가 학교에서 친한 애라면 정훈이 정도. 어릴 적 친했던 철호에겐 중학교 들어와 어깨에 문신이 생겼다. 가운뎃손가락마저 하나가 없어 아이들은 철호를 무서워한다. 덩달아 광호도 철호와 서먹해졌다. 그런 주인공에게 느닷없이 ‘행운의 편지’가 날아든다. 나흘 안에 7명의 사람에게 똑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한단다. 편지를 받고 그냥 내다버린 케네디 대통령은 9일 있다 암살당했다 하니, 겁먹은 광호는 곧바로 리스트를 만든다.
천재지변 같은 사건이 없는 대신 감독의 유년의 기억들이 정밀하게 배치된 <엄마 얼굴…>은 군사정권 시기의 암울한 공기를 깔고 있어 마냥 화사하지만은 않다. 특히 감독의 실제 친구를 모델로 한 캐릭터 철호(이름도 같다)나 감독 앞집에 살았었다는 다운증후군 아이를 반영한 재명이의 에피소드는 감독의 가슴 아린 기억을 반영한 것이 많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의 장르는 성장코미디”라며 밝은 면도 강조했다. 그 면은 사춘기 소년의 에너지나 주변 인물들의 소소한 개성과 함께할 때 밝아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한 소년의 성장기가 됐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 시대가 갖고 있었던 이상한 공기, 그 아우라는 광호의 주변 사건들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프로덕션 포인트
인물
<엄마 얼굴…>은 20억원에 못 미치는 예산으로 알뜰하게 만들어진다. 시대적 공기를 재현해줄 미술이나 세트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감독 자신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고, 늘 좋아해온 성장영화”이기 때문이다. 진정 그렇다면 많은 부분에 욕심을 내야 맞지 않은가 싶지만 박흥식 감독은 “이걸 만들 기회가 나한테 주어졌다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로 <인어공주>의 믿음직한 스탭들을 설득하고 제작사쪽엔 “제작비를 맞출 테니 시나리오를 비롯해 영화 찍는 데 어떤 것도 관여하지 말아달라”는 단호한 제안을 걸었다. 1979년 서울시가의 세트 재현을 포기하고 “많이많이 부족하지만” 그나마 당시 서울과 비슷하단 판단에 전주시로 내려갔다. 탐스러운 것들을 단념한 대신 <엄마 얼굴…>이 기대하는 열매는 “인물이 살아나는 것”이다. 광호를 중심으로 주변에 존재하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생동감을 갖는 것. <살인의 추억> <효자동 이발사> 등에서 또래보다 깊은 감성과 이해력을 인정받은 이재응을 비롯해 엄마 역의 문소리, 은숙 역의 윤진서 등이 집중력과 성의를 다해 연기했다. 특히 감독으로부터 “내가 너라고 생각하고 너가 나라고 생각하고 찍자. 너와 나는 하나야”라는 의식을 부여받은 이재응은 예산 절감 차원의 빠듯한 일정이 힘들지 않냐는 감독의 걱정에도 “제 영화인데요, 뭐”라고 대답할 정도로 감독에게 믿음을 줬다. 리얼리티 보강을 위해 재명 역엔 실제 다운증후를 가진 스물네살 청년이 캐스팅됐다.
한마디로
“성장한다는 건 사람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시작할 때 하나만 분명히 하자고 했던 건, 한 소년이 성장하며 겪는 여러 정서적 느낌들, 유쾌함, 슬픔, 즐거움, 아픔, 상실감 등을 함축적으로 묘사하자는 거였다. 그 주변인들을 통해. 소년의 진심을 담아내고 싶었고, 영화는 다 찍혔다. 그대로 찍혔느냐는 판단은 내가 할 수 없겠지만 노력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