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내 영화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6월 <아는 여자>가 개봉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장진 감독은 축지법을 구사하는 듯한 속도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크레딧은 자신의 연극을 각색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자. 한국전쟁의 포화에서 비껴나 있는 산골마을 동막골, 그곳에서 북한군과 국군과 연합군 병사들이 적의를 무너뜨리고 우정을 얻는 영화다. 장진 감독은 <묻지마 패밀리> 중에서 <내 나이키>를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에게 이 영화를 맡기고 자신은 다소 규모가 큰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쉬어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감독이 참여해 제각기 단편을 연출하는 환경영화와 인권영화 프로젝트, 연극 <택시 드리벌> 연출을 지나, 장진 감독은 “어느 정도는 대중적이고, 또 어느 정도는 실험적이어서, 다섯 번째 영화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연극 <박수칠 때 떠나라>를 각색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모던하고 쇼킹했고, 처음부터 영화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연극은 메커닉이 뛰어났지만, 영화는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보충했다.” 장진 감독은 지나친 실험에 몰두하다보면 위험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는 <박수칠 때 떠나라>가 어쩌면 자신이 만든 인권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계약직 노동자로 일하는 고문기술자와 시국사범으로 잡혀온 대학생이 대화를 나누다가 계약직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에 이르러 공감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 코미디라기보다는 연민이 강한 영화라고 한다.
키워드
취조, 반전
장진 감독은 <박수칠 때 떠나라>를 “살인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수사(修辭)”라고 정의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도식적이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사이렌이 울리면서 용의자가 붙잡히지만, 그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므로 문제는 검사가 어떤 스타일로 취조할 것인가가 된다.” 그러나 그 스타일은 검사와 용의자가 부딪치는 겉태만은 아니다. 몇명의 검사가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누군가는 죽은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누군가는 물적 증거를 앞에 두고서 결코 오지 못할 사자(死者)의 미래를 짐작하고, 누군가는 그녀가 마지막 품은 말을 궁금해한다. 그들은 한때 이 영화의 가제였던 <끝을 보다>처럼 끝을 만나야만 한 여자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스타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아직 뚜렷한 그림으로 떠오르지 않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 구체적인 심상을 보태기 위해, 장진 감독은 <프라이멀 피어>와 <식스 센스>를 거론했다. 용의자가 고백하는 그 이면을 짐작해야 하는 취조는 <프라이멀 피어>와 섣부른 가정을 뒤집는 반전은 <식스 센스>와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가 믿었던 진실의 얄팍한 외피를 벗겨내는 칼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 <박수칠 때 떠나라>는 그 선택 혹은 의지를 묻는 영화다.
스토리
미모의 여사장 살인범 찾기
<박수칠 때 떠나라>는 장진 감독이 2000년 LG아트센터 개관기념 공연으로 선보였던 연극이 원작이다. 최연기 검사(차승원)는 호텔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광고회사 대표 정유정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그는 석유통을 든 채 호텔 로비에서 체포된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을 취조하지만, 김영훈은 살의는 인정하되 살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정유정이 먼저 죽어 있어서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해 화가 난다고 말하는 영훈.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유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은 여럿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연기는 사고로 죽은 불륜 상대의 회사를 물려받은 유정의 과거와 같은 층에 묵었던 투숙객의 행적, 호텔 CCTV에 기록된 화면을 분석해 점차 진실의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정이 수첩에 남긴 묘한 문장 “박수칠 때 떠나라”는 범인을 체포한 뒤에도 연기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누가 살인범인지 추적하는 고전적인 플롯을 지닌 <박수칠 때 떠나라>는 상식과 조금씩 어긋나는 장진 감독의 영화답게 실험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방송사 카메라는 참혹한 살인사건 수사과정을 생중계하고, 판타지가 현실에 발을 들이고, 끝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묻혀진 시간의 뒷모습이 드러난다. 아홉 군데 칼자국에서 흘러나온 핏물과 어이없는 유머가 공존하는 이 영화를 미스터리라고만 불러도 괜찮은 걸까. “나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고 장르 안에서 무언가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이번에도 미스터리 안에서 몇 단계를 뛰어넘어본 적 없는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독기가 생기고 집요해진다.”
장진 감독은 이처럼 스타일을 중시하면서도 스스로 구식이라 칭하는 감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나에게 디지털이란 0과 1로 이루어진 기호에 불과하다. 아직도 나를 덮고 있는 건 아날로그다”라고 말하는 장진 감독은 유정이 홀로 있었을 시간을 헤아리는 연기에게 누구도 보지 못한 진실을 목격할 자격을 부여했다. 연기는 “심장이 움직여서, 스스로 뛰어다니며 진실을 찾는” 인물이고, 누가 죽였을까가 아닌, 왜 죽였을까를 묻는 인물이다. “매우 처연한 5분.” 반전에 해당하면서도 충격보다는 슬픔으로 가라앉을 마지막 5분은 개개의 에피소드가 강했던 연극에 굵은 기둥을 보강한 이 영화의 뚜렷한 마침표일 것이다.
프로덕션 포인트
미술
시나리오를 썼던 <화성으로 간 사나이>로 한고비 뚝 떨어지는 실패를 겪은 장진 감독은 점차 영화의 시간적인 무게를 줄이고 있다. <아는 여자>는 한 시간 반이 채 안 되었고, “로맨틱코미디라 그릇이 작았던 <아는 여자>보다는 헤비한 느낌으로 다가가는” <박수칠 때 떠나라> 또한 상영시간만은 가벼운 영화다. 대신 무게를 더하는 건 미술을 포함한 스타일이다. “동시대 감각보다 약간 모던한” 스타일을 설계하고 있는 장진 감독은 60년 전 필름누아르 시대를 20세기에 재현한 영화 <LA 컨피덴셜>을 윤곽으로 제시했다. “<LA 컨피덴셜>은 1940·50년대를 꼼꼼하게 고증했지만 복고풍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트렌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많은 캐릭터가 묻히지 않고 살아 있는 건 너무 멋진 스타일의 힘이다.” 공간도 인물도 스타일리시한 미술의 손길에 힘을 얻어야 하는 영화. 그러나 장진 감독은 현실과의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한국의 수사본부는 그리 멋진 곳이 아니다. 나는 리얼리즘이 리얼리티에서만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있을 법한 공간이 아니라면, 이 영화는 궤변이나 컬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 접점을 찾아야 한다.” 장진 감독은 아직도 무수히 많은 컨셉을 검토 중이다.
한마디로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살인사건을 생중계하는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을 의식해서 수사과정에 끼어들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일까 ARS 전화를 받고, 무속인을 데려와 굿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장진 감독은 실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을 끌어들여 미스터리 구조 위에 또 다른 형식을 덧입힌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영훈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지 ARS 전화를 받는 장면이 <박수칠 때 떠나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과연 무얼 쫓고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대중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들은 진실에 관해서는 눈을 뜨지 않고 미디어가 포장한 것만을 맹목적으로 쫓아간다. 나는 그 아래 진실을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