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6] - 박진표 감독
2005-02-28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

박진표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많이 놀았다. 이렇게 놀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영화인이 됐다는 것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2002년 여름,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며 시작된 <죽어도 좋아>의 ‘심의 전쟁’은 겨울에야 일단락됐다. 그 사이 세 차례나 심의를 집어넣으면서 혹독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삭제가 아닌 색보정으로 개봉을 했으니 감독으로선 의도를 관철시킨 셈이다. 그래서 푹 놀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쑥 나타난 그를 영화계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영화감독으로, 영화인으로 인정해줘서 좋았다. 꿈을 이룬 거다.” 더욱 ‘다행’인 건 “그 뒤에 좋은 영화를 만드는 많은 제작자들이 (차기작을 함께 해보자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고민은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던 상황에서 저예산으로 만든 <죽어도 좋아>처럼 다음 작품을 하긴 곤란했다.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을 나누느냐가 고민이었다. 감독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나. 그렇다면 상업영화 시스템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심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작가영화를 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도 했다.”

그 사이 “기라성 같은 감독들과 함께 단편을 만들어보는” <여섯개의 시선>에 참여했고, 그즈음 <너는 내 운명>의 소재를 취재하고 구상에 들어갔다. 에이즈, 매춘, 농촌총각 등 언뜻 화사한 멜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아이템을 놓고 영화사 봄과 의기투합했다. ‘청담동의 럭셔리 무비’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영화사 봄과 박진표 감독의 만남은 의외처럼 비쳐졌다. 감독은 이를 “외피적” 시선이라며 반박한다. “봄의 영화들을 쭉 보면 절대로 럭셔리하지 않고 굉장히 모험적인 제작행태를 보인다. <반칙왕>도 그랬고 <눈물>도 그랬으며 <4인용 식탁>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 하나하나가 유행을 타거나 안일하게 제작된 작품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존중해주고, 최대한 매끄럽게 깎아주면서 도우려고 한다. 나에게 특별히 요구한 것도 없다.”

박진표 감독은 이렇게 해서 <죽어도 좋아> 이후 30대의 진지한 사랑 이야기에 대해 쓰던 시나리오를 잠시 미뤄두고 2003년 10월 <너는 내 운명>의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고, 지난해 봄 초고를 완성했다.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촬영하고 9월에 개봉한다.

키워드

축복, 순백색, 투명함

10년 동안 TV다큐멘터리를 찍던 감독의 ‘습성’이 또 한번 작동했다. 신문 한 모퉁이에 “윤락녀, 에이즈 등의 단어로 아주 선정적으로 쓰여진 기사를 보고” 현지로 내려가 그 여인을 만났다. 거기서 “세상 끝에서 사람들이 밀어내서 벼랑 끝에 둘만 남은 사랑”을 만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인데 호응받지 못하는, 이런 사랑을 세상이 축복해주면 좋겠다. 나라도 축복해주자. 나라도 축복해주면 사람들이 보고 공감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나리오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양희은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오늘같이 세상이 하얘진 날, 무지개를 따라가서 천국을 만났다는 전은하씨의 보석같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론은 공포와 저주의 낙인을 찍었으나 박진표 감독은 그 속살에서 화사한 멜로를 뽑아낸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은 ‘하얀색 영화’다. 흰 눈, 매화꽃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하얀색이 주된 이미지 컨셉이다. 깨끗하고 투명한, 축복의 이미지로서의 하얀색이다.

스토리

에이즈 걸린 여자와 사랑에 빠진 노총각

<너는 내 운명>은 실화에 근거하나 영화화에는 그 골격만 가져왔다. 윤락가의 여자가 하루에 몇명씩 몇년에 걸쳐 몇 천명의 남자를 만났고, 이런 그를 기다리는 남편 등의 이야기만 실제에서 가져오고 나머지는 감독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죽어도 좋아>나 <여섯개의 시선>의 <신비한 영어나라>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도 소재가 자못 충격적이고 또 중요하다. “소재 없는 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재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그런 소재들이 합쳐서 주제를 만드니까. 때문에 소재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박관념은 없다.”

목장 경영이 꿈인 노총각 석중(황정민)에게 통장 5개에 부어온 적금과, 젖소 ‘목장이’는 그의 모든 것이다. 단 한번의 연애 경험도 없는 순진한 그가 첫눈에 반한 사람은 하필이면 다방 종업원 은하(전도연)다. 사람들이 놀리건 말건, 그는 매일 ‘순정’다방 문 앞에 목장이의 우유와 꽃 한 송이를 놓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촌스러운 구애에 눈도 주지 않던 은하지만, 남들과 달리 자신을 공주님 대하듯 하는 순진한 그에게 조금씩 마음이 끌린다. 다방 출입을 일삼는 아들이 불안한 석중의 엄마는 맞선을 보자며 순정다방으로 아들을 끌고 나온다. 맞선 현장을 목격한 은하는 홧김에 여관 차 배달을 자청하고, 손님에게 반항하다 구타당한 끝에 병원으로 실려온다. 의식을 찾은 그녀의 눈앞에 울다 지쳐 잠든 석중의 모습이 들어오고 마침내 은하가 마음을 연다.

신혼의 두 사람, “이젠, 죽어도 좋아”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존재가 마냥 고맙기만 하다. 그런 어느 날, 은하에게 잊고 싶었던 과거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 과거로부터 아내를 지키려 몰래, 목장이와 통장 5개를 처분하는 석중. 그 사이, 보건소 직원이 찾아와 은하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두 사람에게 엄청난 운명이 닥쳐온다.

프로덕션 포인트

황정민

배우 황정민, 이라는 게 감독의 확신이다. “전도연은 시나리오 쓰면서부터 생각했던 배우였다. 그런 당대의 최고 여배우와 하게 돼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참 운이 좋구나, 운만 좋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당연히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잘해주리라 믿지만 비장의 무기라면 황정민이다. 감수성이 정말 풍부한 배우다.” 배우 황정민은 경력이나 작품에 비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그가 자기를 불태우고 올인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영화라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가 괜찮게만 빠진다면, 이란 전제를 달고 배우 황정민의 ‘전성시대’가 머지않았음을 예고했다. 황정민은 캐릭터에 맞게 10kg 이상 몸무게를 늘리고 있는 중이다.

크랭크인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면서 안수현 프로듀서는 “동쪽 끝 서쪽 끝 남쪽 끝으로 가야 하고, 젖소가 새끼도 낳아야 하고, 눈도 와야 하고, 꽃도 예쁘게 피어야 하는 여러모로 어렵게 찍힐 영화”라며 그 모든 게 잘됐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세트촬영이 10%에 불과하니 빈말이 아니다. 남녘 땅끝마을에 갔다가 서쪽에서 해가 뜨는 외목마을에도 가고 동쪽 항구도 가야 한다. “농촌이라면 지저분하고 냄새난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실제 가보면 그렇지 않다. 살고 싶어지게 찍고 싶다.” 그렇다고 화려한 촬영기법이나 조명, 미술 등을 과다하게 쓸 계획은 아니다. “스타일이 뭐라고 미리 규정하고 과잉되게 가져가지 않을 거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감정에 충실해서 가다보면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영화를 사람들이 봤을 때 스타일이 산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사랑하는 감정으로, 이들의 절박한 심정으로 영화를 찍을 거고, 그게 이 영화의 스타일이 될 거다.”

한마디로

“통속사랑극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건 내가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사랑 이야기를 한다고 공표한 것이고 그렇다면 작가영화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면 기존 멜로와 어떻게 다른 걸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다만 나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밖에 달리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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