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한국영화사 다시 쓴다, 영상자료원 <특별 발굴 상영>
2005-03-02
글 : 오정연
지난해 중국·일본에서 인수한 1930∼40년대 작품 9편 첫 공개
<군용열차>

한국영상자료원이 오는 3월2일부터 4일까지, 지난해 발굴한 9편의 영화를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상영한다. 최초로 공개되는 이들 작품은 30년대 말부터 4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극영화 4편(<군용열차> <어화> <집없는 천사> <지원병>)과 기록영화 5편(<조선> <해방뉴-쓰 특보> <해방뉴-쓰 특2호> <해방뉴-쓰 특3호> <해방뉴-쓰>)으로, 중국과 일본의 아카이브에서 인수한 것이다. 이중 1938년작 <군용열차>는 현존하는 한국 극영화 완본 중 최고(最古) 작품. 일반 상영회에 앞서 2월28일, 국회에서는 영화 8편의 하이라이트 모음을 상영하고 영화평론가 김종원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작품을 해설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영상자료원에서 3월2∼4일 상영전

영상자료원의 이번 상영전은 한국 영화사 아카이브가 10년 정도 앞당겨졌음을 확인하는 자리. 직전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완본 한국영화는 1948년작 <독립전야>였다. 이와 함께 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중에는 일제시대 조선인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영화 다섯편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인수한 <심청>과 <어화>는 완본이 아니며, 일본 도호영화사가 전달한 <젊은 모습> 등 세편의 영화는 모두 일본어로 제작되어 한국영화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됐던 작품. 그러므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물론,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투>(1919)를 비롯한 초창기 한국영화들은 책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 일제시대 한국영화를 발굴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아카이브를 직접 방문하여 창고를 뒤지다시피했다는 한국영상자료원 이효인 원장은 “<한국영화역사강의1>(1992)을 저술할 때만 해도, 해방전후 영화는 한편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말로만 듣던 <군용열차>를 직접 봤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적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영화사가 당당해졌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관계자들은 이번의 극적인 발굴을, 지난 10여년간 한국영상자료원이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을 통해 각국의 아카이브와 접촉하며 기울였던 노고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장광헌 자료수집팀장은, 지난해 11월 초 <군용열차>를 비롯한 네편의 극영화 완본이 존재함을 확인한 중국전영자료관이 다음달 초(정확히 언제??) 네편 모두를 한국쪽에 전달한 것은 국제아카이브의 관행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라고 설명한다. 그는 “딱 한벌밖에 없는 프린트를, 소장 정보 확인 이후 한달 안에 인수 완료했다는 것은 실무자들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하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증거”라고 덧붙인다. 이효인 원장 역시 “한·중 영상자료 교류의 적극적인 협력관계가 구축됐음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어마어마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중국을 통해, 더 많은 영화들을 발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고 전한다. 한편 기록영화의 프린트들은 일본 오사카에 자리한 비영리 사설 아카이브로부터 전달받은 것으로, 그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극영화 4편을 인수한 것과 비슷하다.

이젠 <군용열차>가 가장 오래된 작품

희귀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감동 이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들 영화의 친일성 여부. 결론부터 말하자면 1930년대 말부터 해방까지의 기간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영화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네편의 프린트는 일본 수출용으로 제작된 듯 일어자막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영화가 조선총독부 혹은 일본 문부성의 추천작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영화제작 관련 상황을 살펴보면 1940년 가혹한 검열과 통제를 기조로 하는 조선영화령이 반포되고, 1년 뒤 총독부의 지휘 아래 모든 영화사가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합되는 등 민족주의적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팀의 조준형씨는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 등에 비해 대규모의 자본과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영화를 하면서, 친일을 하지 않은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한일합방 이후 출생하여, 일본에서 영화를 배운 그 시기의 영화인들에게서 민족적 자의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던 것.

김종원 영화평론가는, 이 시기 한국영화가 취한 태도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일본의 우월성을 본받아 조선의 열악함을 타파해야 한다는 계몽의식 고취(<집없는 천사>), 내선일체를 앞세워 황국민의 의무를 강조(<군용열차>),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징용을 조장하면서 일제 식민정책을 동조(<지원병>), 마지막으로 아무런 정치적 입장도 내세우지 않은 채 통속적인 내용을 고수(<어화>)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번에 상영되는 네편의 극영화가 이러한 각각의 태도를 대변할 만한 작품이라는 점. 실제 영화를 통해 각각의 미묘한 입장차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 발굴 상영
광복60주년기념 해방영화와 친일영화 발굴공개: 해방의 기쁨과 억압의 흔적

일자: 3월2일(수)~4일(금)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시사실 <봄>
문의: 02-521-3147(내선1), www.koreafilm.or.kr
관람료: 2,000원 (경로우대증 지참시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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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극영화

<군용열차> 서광제 | 1938년 | 35mm | 흑백 | 66분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출신 평론가였던 서광제 감독의 데뷔작이자, 일본의 군국주의를 옹호한 첫 번째 한국영화이기도 하다. <임자없는 나룻배>를 연출했던 대표적 민족주의자 이규환이 원작자로 참여했다. 군용열차를 몰고 싶어하는 점용(왕평)의 룸메이트 원진(독은기)은 연인 영심(문예봉)을 기방에서 구해내기 위해 중국 스파이에게 군용열차 기밀을 누설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원진은 점용에게 자신의 배반을 고백하고, “혼으로나마 철도를 지켜 황군의 무원을 기도하겠다”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열차를 촬영한 역동적인 화면, 철도 바퀴에서 재봉틀로 이어지는 등 유연한 장면 전환, 실내에서의 춤을 실외로 연결하는 기발한 발상 등 촬영과 편집의 묘가 돋보인다. 인물간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방식도 눈여겨볼 지점이며, 이후 <집없는 천사> <지원병> 등에 출연한 문예봉을 마치 서구영화의 여배우들처럼 아름답게 촬영한 기교가 흥미롭다.

<어화> | 안철영 | 1939년 | 35mm | 흑백 | 52분

엄격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속적인 멜로영화. 가난한 어촌에서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상경한 인순(박노경)은 동향 출신 철수(나웅)의 계략으로 기생이 된다. 그의 연인 진석(박학)은 갖은 고생으로 몸져 누운 인순을 찾아오고, 인순은 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화’(漁火)는 고기잡이배에 켜놓은 등불을 일컫는 것으로, 고된 세상살이에 흔들리는 주인공을 의미한다. 영화는 무기력한 인간에 대비되는 바다의 무한한 힘,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인순을 맞이하는 고향마을의 푸근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순진한 여주인공이 몸과 마음을 더럽히고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남자한테 짓밟혔다고 무너지면 안 된다. 경제적인 독립이라도 이뤄야지”라는 극중 인물의 대사는 사뭇 현대적이다.

<집없는 천사> | 최인규 | 1941년 | 35mm | 흑백 | 73분

<독립전야> <자유만세> 등 이른바 광복영화를 연출했던 최인규 감독이 만든 계몽주의적 영화.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화했으며 <심청>에서 주연을 맡았던 최인규 감독의 부인 김신재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의붓아버지(윤봉춘)의 구박으로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전전하는 부랑아 남매 용길(이상화)과 명자(김신재)는 선도사 방 목사(김일해)의 도움으로 향린원에 머물게 된다. 결국 의붓아버지는 이들을 찾아오지만 아이들의 모습에 감화를 받아 마음을 고쳐먹는다. 일장기를 게양하면서 일본어로 황국신민의 의무를 맹세하는 장면이 줄거리와 관계없이 뜬금없이 삽입돼 있다. <레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내러티브는 짜임새가 있으며 특히 세트를 비롯한 미술의 완성도가 뛰어나다.

<지원병> | 안석영 | 1941년 | 35mm | 흑백 | 56분

백조 동인 출신으로 각본을 쓰면서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심청>으로 연출 데뷔한 안석영 감독의 노골적인 친일영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지주의 횡포로 생계를 걱정하던 춘호(최운봉)가 기꺼이 일본군에 지원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내용은, 영화가 명백하게 징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춘호의 가난, 사랑은 그가 얼마나 전쟁에 지원하고 싶은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촬영과 조명, 연기 등은 안정돼 있으며 복원상태 또한 양호하다. 주인공이 지원병들의 사열장면을 상상하는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인물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기록영화

<조선> | 1938년 | 35mm | 흑백 | 12분
<해방뉴-쓰>(4편) | 1946년 | 35mm | 흑백 | 총30분

영어 내레이션이 녹음된 <조선>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관광지로 홍보하기 위해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국사, 석굴암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와 한반도의 각종 풍습과 생활상을 소개하고 있다. 4편의 <해방뉴-쓰>는 그간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단체, 민중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관변다큐멘터리. “여러분 불을 조심합시다. 자주독립을 좀먹는 불!” 등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서울소방서 훈련식, 김구, 이승만, 하지 준장 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을 접할 수 있는 8·15 1주년 기념식 행사, 무려 5만명의 군중들이 모인 김구 총리의 지방순찰, 조미(朝美) 대항 야구대회 관중석에서 지루해하는 아낙의 표정 등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영상이 담겨 있다. 이는 그간 KBS 등 방송사가 입수한 자료화면에도 없던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이 영상자료원쪽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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