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1]
2005-03-22
글 : 문석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이 보여주는 누아르 공간 미리 보기

어둡고 차가운 도시를 배경으로 야수적 내면을 드러내는 남성들의 영화를, 우리는 필름누아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필름누아르는 음습한 범죄의 세계나 심리적으로 뒤틀린 인물의 내면 등을 통해 비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진실을 설파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아르에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실체를 결정하고 분위기가 플롯을 압도하며 내러티브성(narrativity)이 내러티브로 등장하고 초점이 ‘무엇’에서 ‘어떻게’로 옮아가며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는 영화학자 토마스 샤츠의 말처럼, 누아르에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주인공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고, 건물 벽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는 공포의 깊이를 보여주며, 극단적인 로키 조명은 이 세계의 치명적 그늘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누아르영화에서 양식화된 비주얼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하는 것을 넘어, 때때로 내러티브 그 자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본격 누아르’ 또는 ‘누아르 액션’을 표방하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또한 많은 대목을 비주얼로 설명하는 영화다. 인생의 화려한 정점에 섰다가 급작스레 끝없는 나락으로 수직추락하는 한 남자, 선우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필름누아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양식화된 스타일의 향연이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1950년대에 수명을 다한 필름누아르를 무덤에서 벌떡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로만 폴란스키가 <차이나타운>에서, 데이비드 린치가 <블루 벨벳>에서, 코언 형제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그랬듯, 자신만의 누아르를 창조하려 했다.

<달콤한 인생>이 가장 중점을 둔 요소는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다. 따지고보면, 필름누아르라는 이 소장르의 이름이 유난히 어두운 로키 조명과 극단적인 콘트라스트에서 기인한 것이니 당연한 일. 하지만 화면은 흑과 백의 충돌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경우, 어두운 분위기에 강렬한 흰색이 뿜어져 나오지만 커튼, 테이블, 바에 강렬한 붉은색을 심어놓았고 내벽을 녹색 톤으로 만들어 화려한 느낌마저 준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뿐 아니라 컬러의 콘트라스트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삶, 빛, 색채의 콘트라스트

이 영화에서 콘트라스트는 주인공 선우의 삶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명암의 콘트라스트는 강해지고 색채의 콘트라스트, 그러니까 채도 또한 높아진다. 선우의 감정이 격앙됨에 따라 배경 또한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다. 결국 초반부의 세련되고 건조하던 스카이라운지의 분위기는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후반부에 가서 축축하고 격렬한 공간으로 표정을 바꾼다. 영화 중반부, 선우가 돌연 끌려가 고초를 겪는 공간은 “연옥의 이미지”를 위해 모노톤으로 바뀌고, 여기서 탈출해 총기를 구입하기 전 들르는 폐항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사막의 분위기로 연출되며, 총기를 구입하는 밀매 사무실은 총이라는 다소 판타스틱한 요소 탓에 비현실적인 색채가 강한 콘트라스트 아래 배치되는 등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은 운명에 사로잡힌 선우의 내면과 상황을 드러낸다.

이처럼 빛과 색채, 그리고 공간적 질감의 콘트라스트를 통해 구축된 김지운 감독의 누아르 스타일은 거칠지 않다. 모든 것을 건 남자들이 서로 총을 쏴대며 흥건한 피를 흘린다 해도 잔인하거나 험악한 느낌은 아니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말마따나 “워낙에 곱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감독의 성향” 탓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달콤한 인생>에서 추구한 것은 정서적인 누아르이기 때문이다. 멜빌의 관조적인 누아르와 <와호장룡>의 정서, 사건의 결말 자체가 아니라 결말로 치닫는 순간과 운명적 순간에 놓인 자의 표정에 대한 관심 등을 품고 있는 이 김지운식 누아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어쩌면 스탭들끼리 명명했다는 ‘우아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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