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5] - 감독 인터뷰
2005-03-22
글 : 문석
사진 : 정진환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비주얼 전략

“강렬하되 우아하게, 원색적 빛과 어둠”

-왜 누아르를 선택했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뭘 더 잘할 수 있는지, 뭐가 나에게 잘 맞는 것인지 몰라서 장르를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누아르라는 장르를 통해 어두운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 그리고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어떤 부조리함과 아이러니 같은 것을 영화적인 형식과 느낌으로 옮겨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장르적으로 내가 누아르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1940∼5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보다는 어렸을 때 봤던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나 자크 드레이의 아류 프렌치 누아르의 느낌들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영웅은 알랭 들롱과 스티브 매퀸이었는데, 매퀸이 잡초 같고 터프한 느낌이었다면 알랭 들롱은 굉장히 감성적이고 댄디하고 냉정한 느낌이다. 그런 남자가 나오는, 아주 정서적이면서 드라이하고 쿨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 또 일종의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인물들이 총을 쏘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서부극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그건 불가능하니까 누아르의 형태로 표현하려 했다.

-비주얼을 설계할 때 기본적인 구상은.

=우선, 주인공 선우의 주된 공간인 호텔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 했다. 영화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시작되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선우는 지하의 룸살롱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러면서 여러 통로를 거치는데 화려한 데서 점점 좁고 어둡고 음습한 공간으로 바뀐다. 이 오프닝에서 뒤에 보여질 주인공의 행로를 압축해 보여주는 느낌을 주려 했다. 호텔이라는 곳이 최상류의 느낌에서부터 아주 어두운 느낌이 공식적으로 공존하는 세계 아닌가. 한순간에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위에서 밑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이라면, 호텔은 그 상징이고, 스카이라운지에서 지하까지 내려가는 여정은 그 은유인 셈이다.

-스카이라운지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선우가 일하는 공간인 스카이라운지는 좀 유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짜 세계로, 화려하고 색감이 강렬하다. 거기서 지하로 내려가면서 색깔이 다 없어지면서 어둡고 모노톤의 세계로 간다. 또 스카이라운지에선 광택을 강조했다. 광택은 반사를 일으키는데, 스카이라운지는 선우가 자기를 반영하고 비추면서 스스로를 가꾸거나 자족스럽게 꾸미는 공간이다.

-누아르 스타일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빛과 어둠을 디자인하는 데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다. 누아르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게 콘트라스트이고, 색감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감정이 격렬해짐에 따라 콘트라스트가 강해지고 색감도 도드라지게 해달라고 촬영기사에게 주문했다. 또 대부분의 사건이 밤에 일어나는데, 광질을 좋게 하려고 야외장면에서도 평면적인 HMI 대신 설정등을 많이 달았다.

-빛과 어둠 외에 색감을 강조한 이유는.

=사람의 감정이 변화하면서 오감이 열리듯, 색감도 도드라지고 원색적으로 된다는 생각을 했다.

-표현주의 느낌의 극단적인 구도도 많이 시도했는지.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하면 직접적인 느낌을 줄까봐 촬영기사에게 조명을 은근하고 섬세하게 해달라고도 했다. 현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적당히 영화적 형식과 구성을 살리면서 밸런스를 맞추려 했다. 극단적인 표현은 되도록 피하면서. 그래서 우리끼리는 누아르가 아니라 ‘우아르’라 했다. (웃음)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른 영화에 비해 매우 어둡다는 인상이다.

=아무래도 밤에만 찍으니까. (웃음) 강 사장이 차 안에서 전화 받는 장면이 있다. 차 안에 조명을 넣고 그 장면을 찍으려는데, 손만 빛을 받고 얼굴은 시커멓더라. 조명기사에게 물어봤더니 아직 조명을 다 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나는 그게 멋있었다. 얼굴을 읽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어떤 느낌이 있어서 그대로 찍었다. 복도를 걷는 선우의 모습도 등을 드문드문 달아서 얼굴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한다. 그의 감정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객이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장치다. 누아르는 빛을 만드는 게 짜릿한 즐거움이자 묘미더라. 인생이 그렇듯 빛과 어둠 그 자체가 주제가 되니까.

-유난히 복도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

=무의식 같은 건데, 그런 길, 통로, 인생의 여로, 이런 것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면의 로드무비라고도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고 그것을 찾아가는 로드무비라고도 할 수 있고, 오디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아르는 도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도시의 익명성, 도시적 감성을 반영하기 위해 밤거리를 많이 넣고 싶었는데, 촬영 당시가 최고 불경기였다. (웃음) 식당이며 건물이며 모두 불을 꺼놓아서 너무 어두웠다. 심지어 ‘불경기 누아르’라고까지 했다니까. (웃음) 촬영 끝날 무렵 <콜래트럴>을 봤는데, LA가 부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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