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는 남자 영화다. 종종 주인공들의 주먹은 화면을 뚫고 관객을 가격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객석으로는 남자들의 짭짤한 눈물 방울이 튈 것만 같다. 쿨함이 통하는 시대에 류승완은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을 고수한다. 테크닉은 세련되어졌으나 고색창연한 수컷들의 격돌은 여전하다. 혹은 더 구식이 되어간다. 지난 3월15일 저녁에 있었던 <주먹이 운다>의 시사회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몰려드는 기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영화사는 배급 시사실까지 개방해야 했고, 아수라장을 잠재우며 시작한 <주먹이 운다>는 베일을 젖히고 맨살을 드러냈다. 류승완의 세 번째 장편영화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프리뷰와 류승완 감독의 솔직한 인터뷰를 통해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인 <주먹이 운다>의 전모를 짚어보고, 힘들었던 제작과정의 고뇌를 토로하는 최민식과 류승범의 긴 대담을 싣는다.
멋지거나 혹은 진부하거나
지난해 <주먹이 운다> 촬영장을 방문했을 때였다. 크랭크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날,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야길 꺼냈다. “현장 분위기가 그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주먹이 운다>는 테크닉을 앞세우기보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야 하는 영화다. 전작들의 경우 테크닉을 먼저 생각하고 그 안에 감정을 채우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 이번엔 장르 바깥에서 인물들에게 접근해보려고 한다. 나 혼자 다 하려 들지 않을 거다. 시나리오도 콘티도. 현장에서 배우와 함께 만들어갈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죽거나…>와 비슷한 느낌의 영화가 나올 것 같다.”
능숙한 핸드헬드로 포문을 여는 류승완 감독의 5번째 영화 <주먹이 운다>는 젊은 시절 각광받던 권투선수였으나 이제는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갚기 위해 거리에 나와 매를 맞아 돈을 버는 일본인 하레루야 아키라와 소년 교도소에서 권투를 배운 뒤 전국체전에서 2년 연속 은메달을 거머쥔 한국인 서철의 실화에서 비롯됐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특정한 상황을 바탕으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인물들이 그 안에서 뒤섞이는 광경을 연출했던 것에 비해 실제 모델이 존재하는 두 인물의 삶을 교차 방식으로 진행하는 <주먹이 운다>에서 캐릭터가 갖는 비중은 크다.
먼저, 홍코너. 아내에게 손찌검을 일삼는 강태식(최민식)은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직 복서 독불이가 겹쳐 떠오르는 인물이다. 마흔 넘어 집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된 막장인생 태식에게 유일한 재산은 10여년 전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복서였다는 자존심. “전두환, 노태우보다 (김)광선이 금메달이 우리나라 더 알린 거 아냐? 우리 국민들이, 에이 X발, 정말 우리한테 이러면 안 돼.” 날이 새면 그러나 자존심은 가슴에 구겨넣어야 한다. 만원 받고 인간 샌드백이 되어야 하는 강태식은 그렇게 매맞아 번 푼돈으로 빚을 갚지만, 그나마 모아놓은 푼돈마저 들고 튄 후배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다.
나머지 청코너엔 상환(류승범)이 있다. 폭행으로 인한 합의금을 마련하겠다고 동네 영감의 일수 가방을 훔치려다 스물도 못 채우고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종친인생이다. 면회 온 아버지에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거 입 하나 덜었으니까 그냥 좋게좋게 생각합시다”라고 내뱉는 그에게 남은 거라곤 깡밖에 없다. 자신을 괴롭히는 감방 동료 권록의 귀를 씹어 삼킬 정도로 독종이지만, 그는 정작 링 위에선 권투로 단련된 권록에게 묵사발이 된다. “아우 쪽팔려. 어우 X발놈.” 분을 삭이지 못해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환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폼나게 죽거나 혹은 끈질기게 살아남거나. 류승완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세상은 어차피 힘있는 자의 것. 먹히지 않으려면 결국엔 맞서야 하고, 맞서려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고, 싸움에 나선 대가가 피를 토하는 파국이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류승완의 인물들은 생득적으로 알고 있다. 자신이 상대파 조직의 칼받이가 된다는 운명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환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수고가 허탕이 될 것이라는 결말을 <피도 눈물도 없이>의 수진과 경선은 몰랐을까.
<주먹이 운다> 또한 사각의 링 위에 지지리도 못난 철딱서니 하류인생들을 올려보내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폼생폼사 개싸움과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돈가방 쟁탈전과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무림고수 대전이 장르에 의해 유도되어 캐릭터에 의해 발화됐다면, <주먹이 운다>의 싸움은 철저하게 혈육에 기댄다.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에선 희미하게 어른거리거나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가족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만취하면 아내와 아들이 머무는 처갓집 앞을 서성이던 태식은 아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뒤에야 링에 오르기로 마음먹고,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뒤 상환은 손자의 얼굴이 나온 스포츠 신문을 오려 간직하는 병상의 할머니를 보고서 신인왕전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더라도 상관없다고 영화는 일찌감치 예고한다. 링 위에 오르면 윈-윈 게임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링 위에 오르기 전, 영화는 익숙하고 간편한 신파에 손을 내민다. 다소간 유지되던 긴장의 맥이 탁, 하고 풀리는 지점도 바로 그때부터다. 가족은 두 사람이 치르는 신인왕전을 위해 끊임없이 환기되는 대상이 된다. “6라운드까지 버텼으면 좋겠다”는 태식과 “죽어도 상관없습니다”라는 상환의 간절한 의지를 뒷받침할 만한 설정들을 굴곡없고 평이한 내러티브는 충분하게 품고 있지 못하다. 새 남편 될 사람과 같이 살게 될 집을 보고 있다가 아이가 없어졌다고 태식의 부인이 체육관에 당도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선 두 남자의 130여분 사투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6개월 전. 촬영현장에서 들었던 류승완 감독의 말에는 전작들에 대한 자기비판과 함께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데뷔작 <죽거나…>를 다시 언급하며 <주먹이 운다>를 ‘거리의 영화’라고 명명한 것이 기대를 곱절로 만들었을 것이다. <죽거나…>가 어떤 영화인가. 거칠고 투박하지만 어디에서도 건져올릴 수 없는 생생한 대사들이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요즘 애들 싸우는 게 우리랑 다른 게, 명분이 없다는 겁니다”는 당구장 주인이나 “복지부동이야말로 공무원의 진정한 자세”라고 설파하는 경찰관은 어느 시나리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었다. 매끈하지 않았지만 장르를 서슴없이 인용하는 영화의 잡식성 취향이 빛을 발했던 것도 바로 이 팔딱거리는 인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류승완 감독에게 거는 기대는 그런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이 <주먹이 운다>에서 새로움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준 것은 거의 없다. 전체적인 구조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닮았으나 태식과 상환에겐 단숨에 관객의 마음을 훔칠 만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반항의 정신, 자유인의 태도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먹이 운다>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때깔나는 영화이지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낡은 감성의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