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식과 류승범, 선배와 후배
“니가 세상을 살면서 말이다. 어떤 놈이 너한테 누굴 막 씹으면서 뭐 온갖 얘기를 꺼내면서 너를 꼬시는 놈이 있을 거야. 너 그런 놈들 말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그런 놈은 꼭 니 뒤통수를 친다고.”- 태식
류승범 |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올드보이>에서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상대역 말고, 나는 꼬봉 같은 거 하고 싶다. (웃음) 막 정서적으로 엉기는 역할 말이다. <파이란>에서 공형진 선배를 보면서 너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최민식 | 니가 하나 만들면 되지 임마. (웃음) 또래끼리 출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후배가 어우러져서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후배들은 그저 ‘선배에게 배울 게 많아요’라지만,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교류라는 것은 나이와 짬밥에 관계가 없다. 내가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후배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승범이 연기를 보면 굉장한 자극이 된다. 경쟁의 의미가 아니라 표현력의 문제라는 거다. 아. 젊은 녀석은 저걸 저렇게 표현하는 구나! 그럴 땐 나도 배우는 거다.
류승범 | … (묵묵부답으로 얼굴 붉어지고)
최민식 | 작품의 전체적인 끈을 놓치지 않는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요즘은 그렇게 하는 젊은 친구들이 없지 않나. 승범이는 감독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를 제대로 그려낸다. 배우가 표현력이 없으면 끝나는 건데 이 친구는 그런 것들을 동물적으로 하니까.
류승범 | (얼굴 더 붉어져서 기자들을 향해) 아. 정말. 제발 이런 이야기 좀 안 나오게 해달라. 부담스럽다. (웃음)
최민식 | (웃음) 부담감 가지라고 하는 이야기다. 뭐 어쨌든. 지금의 이런 것들을 승범이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류승범 | 아직 멀었다. 여전히 많이 듣는 지적인데. 몰입해야 한다는 함정 때문에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경우가 많다. 장면장면에는 충실해도 그건 그저 내 연기에만 충실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더 풍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링에서 오열하는 장면. 그건 내 감정에 솔직하게 연기한 거였다. 근데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내 연기와 감정에 솔직했기 때문에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더 풍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최민식 선배는 연기에서 나무 말고 숲까지 두루 보시는 것 같다.
최민식 | 승범이처럼 자기 몰입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몰입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걸 해봐야 나중에 숲을 볼 수 있게 된다.
류승범 | 선배를 딱 쳐다보면 링에서도 고개를 푸욱 숙이고. 바닥보고 그러더라. (웃음)
최민식 | 흔히 잘못 사용되는 개념 중 하나가 이런 거다. 무조건 내지르고 에너지를 분출하면 그건 쉬운 연기. 안으로 머금으면 내면 연기이고 어려운 연기. 그건 오해다. <대부3>에서 알 파치노의 딸이 저격당하는 장면 있지 않나. 그때 알 파치노가 딸을 안고 사자처럼 포효한다. 그 배우가 내면으로 머금는 연기를 모를까. 그가 생각한 구도와 음계는 눈이 하얗게 돌아가면서 소리쳐 울부짖는 거다. 거기서 오버를 했느냐. 아니다. 코플라도 거기에 동의를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이 사람이 포효를 하는 게 옳다고 여긴 거다. 몰입과 과함이란 그저 내지르고 머금는 걸로 구분되는 차원이 아니다. 진짜 몰입이란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서 이성적인 통제가 안 되는 순간이 있다는 거다. 무아지경의 상황. 마치 블랙홀 처럼 빠져드는 것. 젊을 때는 그걸 맛봐야 한다. 내가 좀 전에 뭘 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순간 말이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말이지. 멋있게만 보이려고. 촬영할 때도 ‘이쪽 얼굴을 많이 찍어주세요, 거기가 더 잘 나오거든요’. 이건 연기를 해도 내 눈을 보고 교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쪽을 보면서 한다니까. 그게 뭐야! 상대역의 눈을 봐야 할 거 아니야. 다른 데를 왜 보냐고!
류승범 | ….
최민식 | 승범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 연기하는 줄 안다. 테크니컬한 면에서 세련되지 못한 게 결코 약점이 아니다. 대체 세련된 게 뭐가 필요한가, 캐릭터에 맞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지. 일자무식 깡패가 세련되면 뭐할 거야. 잘못된 개념이 ‘멋있는 양아치’라는 건데. 미친. 양아치가 뭐가 멋있냐.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헛지랄들을 하는 거지.
류승범 | (웃음) <품행제로> 때 조근식 감독님이 어느 대학교 시사회를 했다더라. 영화 끝날 무렵에 화장실 가서 일을 보는데 한 대학생이 “야. 류승범 진짜 강북 양아치 제대로 안다!” 그러자 다른 대학생이 “강남 양아치는 뭐야?”라고 물어봤다더라고. 그러자 대답이 “강남? 강남은 싸이지!” (웃음) 그래도 계속 같은 양아치만 연기한 건 아니다. 상황이 달라지고 주변 인물이 달라지면 다른 양아치 아닌가. 상환도 내가 연기해온 다른 양아치들과 똑같은 인물일 수 있다. 다만 가지고 있는 상처가 다른 거다. 그러니까 굳이 이 영화에서 변신을 했네 아니네 이런 이야기도 과연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영화가 다르고 상대하는 사람이 달라지고 연출 스타일이 변한 것이고, 그러다보니 연기자로서의 고민의 지점이 달라지는 거 아니겠나.
최민식 | 승범이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방끈이 길다고 좋은 배우는 아니다. 감각적인 면이나 천부적으로 많은 걸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 승범이가 그런 애다. 대가리로만 많은 걸 안다고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몸으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 최민식과 류승범, 배우의 길
“우리 같은 놈들한테 사람같이 살 방법이 뭐가 남았겠냐.”- 태식
최민식 | 배우는 작품을 통해 업그레이드되는 게 중요하다. 그게 보람이다. 돈 벌자고만 하는 짓은 아니니까. 작품을 통해서 뭔가를 극복하려는 거다. 이전엔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와 환희 말이다. 배우들은 새로운 가상의 세상을 통해서 삶에 대해 업그레이드된 사고방식을 갖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많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런 게 보람이다. 우리는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업그레이드는 끊임없어야 한다. 배우는 이렇게 더러운 직업이다. 그런 걸 생각하다보면 이 직업이 점점 더 싫어진다. 영화제 간 거 생색내고 개런티 올라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제대로 하려면 이렇게 힘든 일이 없다. 아주 X 같은 직업이라니까. 옛날에는 남이 나를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았다. ‘짜식들이 이제야 나를 알아보네’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젠 내가 하는 연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내가 진짜를 연기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진짜는 과연 뭔가. 진짜는 과연 존재하는가. 진짜를 추구한다면 그건 뭐냐. 이렇게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다가보면 무지하게 허탈해지는 거다.
류승범 | 이제야 내가 배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 같다. 그러자 정말로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머리로 알았다면 이제는 뼛속 깊숙이 느낀다. 어! 하고 코앞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물론 선배처럼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아직은 현실에 맞춰가는 게 급하다. 일단은 빨리 나를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아주 쉬운 질문 하나만 던져줘도 나에게는 소주 몇병을 마셔야 하는 엄청난 숙제가 된다. 이전에도 고민은 있었지만 그 지점은 달랐다. 고민하다가도 힘들어서 포기해왔다. 출연 중인 작품에만 솔직하면 되니까, 하면서 혼자 위안하기도 하고. 물론 그것도 방법이지만, 이제는 나도 내 자신을 더 알고 싶다. 이젠 정말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만만치 않은 일이 남은 듯하다.
최민식 | 이 직업을 하면 할수록 얻어지는 행복과 만족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비참한 심정에서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 단계를 잘 넘어가야 한다. 근데 매번 넘길 때마다 죽을 맛이니까 그게 문제다.
류승범 | 이건 참 안타까운 현실인데. 뭐 나도 그닥 잘난 놈은 아니지만, 동료들과 진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건 정말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물론 동시대에 같이 호흡하는 배우들 모두 생각의 지점이 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가끔식 ‘어? 이렇게나 고민의 지점과 깊이가 다르구나!’ 하고 느끼게 될 때면 ‘이제는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아니냐, 함께 한번 두들겨 맞아보자’고도 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 우리(젊은 배우들)가 스스로 풀어가야 하는 지점들이 있는 건데 그게 보이질 않으니까. 미래에 대한 설계가 없으니까, 나도 정말 답답하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늪으로 더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최민식과 류승범, 에필로그
류승범 | 이런 영화 당분간 안 할 거다. 못한다.
최민식 | 주먹질? 다음 영화엔 이런 거 절대로 없어. 피도 안 나와. 그냥 서서 말로만 할 거야. ‘저 놈 죽여라’ 하고.
류승범 | 그런 거 좋겠다. 조용히 다가가서 소리 안 나는 총으로 암살하는 킬러. 죽인 뒤에는 ‘얘 죽었냐?’ 하고 물어보고.
최민식 | 이젠 짜~~증난다! <친절한 금자씨> 촬영하면서도 피칠갑하고 3박4일 동안 묶여서 이영애한테 완전 아작났는데 말이야. 완전 능지처참을 당한다니까.
최민식 | 마지막 장면 찍고나서는 빨리 씻고 들어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더라.
류승범 | (웃음) 이제 끝이구나!
최민식 | 쫑파티는 언제 하나. (웃음)
류승범 | 이제 뭐하나. 후시녹음은 좀더 있어야 할 텐데. 이젠 뭔가에 빠지고 그럴 만한 여지도 없다. 많이 쏟아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냥 막 헉헉대는 거다.
최민식 | 소진했다. 완전히 엥꼬났다! (웃음) 친절한 금자씨한테는 이미 능지처참당했고. 분량이 많이 남진 않았으니까 얼른 잘 마쳐주고. 그리곤. 놀 거다! 아무 계획도 없다. 아무 계획도 갖고 싶지 않다. 그냥 놀 거다. <올드보이> 이후부터는 너무 정신이 없이 달려와서 지칠 대로 지쳤다. 좀 추스르고, 다시 점검해보고,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류승범 | 뭐가 됐든지 차기작에서는 여자를 좀 만나고 싶다. 껴안고. 만지고. 부비고. (웃음) 농담이고. 이젠 뭔가를 좀 덜어내고 싶다. 편안하게 하고 싶다. 말은 이렇게 해도 편안하게 못하는 거 알지만, 그래. 멜로! 정말 멜로 하고 싶다. 기회를 좀 달라! 나한테는 정말 굉장한 멜로적 성향이 있는데 세상이 그걸 잘 몰라준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멜로영화도 없다. 그런 멜로영화 시나리오가 나온적이 있는데 투자가 안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