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의 두 배우, 최민식과 류승범이 말하는 연기와 삶
최민식이 늙은 사자라면, 류승범은 상처입은 표범이다. 지친 야수 두 마리는 서로를 물어뜯음으로써 부둥켜안는다. <주먹이 운다>는 정글의 법칙과 그것을 거스르는 화해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최민식과 류승범은 두 갈래로 달리다가 마지막에서야 한 갈래로 모이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숨으로 호흡하듯이 연기를 했다. 화면의 입자와 편집이 굵직굵직한 류승완의 세 번째 장편영화에 세심한 진심을 불어넣는 것은 그들의 힘이다. 사실, 여기까지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달랠 길이 없다.
최민식과 류승범을 만난 것은 지난 3월8일의 어느 오후, <주먹이 운다>의 시사회가 열리기 정확하게 일주일 전이었다. 예전에 그래피티로 가득 차 있었다는 한강변의 어느 굴다리는 결벽증에 걸린 공무원들의 배려에 힘입어 번들번들한 회색 페인트만이 광채를 발산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최민식과 류승범은 다듬어지지 않은 편집본만을 본 상태였고, 그들을 만난 두명의 기자는 <주먹이 운다>의 시놉시스 외에는 온통 흘려들은 정보만을 간직한 채였다. 다만 두 사람은 태식과 상환의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큰 미소를 지었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멋쩍게 열렬했다. 이 인터뷰는 20살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동료애와 불안한 직업예술가의 처지에 대한 솔직한 담화의 재구성이다.
# 최민식과 류승범, 태식과 상환, 그리고 <주먹이 운다>
“중년의 나이에 사업은 실패했지만, 결코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집념으로 매맞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시 복싱세계로 돌아온 전 은메달 리스트죠. 아마추어.”- 아나운서
“노장입니다.”- 해설자
“네, 강태식 선수. 또 그런가 하면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기고, 교도소에서 권투를 배우기 시작해 그야말로 링 위에서 참회록을 쓰겠다는 그러한 집념으로 경기에 임하는 청년복서. 유상환 선수.”- 아나운서
“신인이죠. 그렇습니다. 아주 대조적인 컬러입니다.”- 해설자
최민식 | 류승완 감독은 내가 <올드보이> 찍으면서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입버릇처럼 ‘열신 이상 나와야 하는 영화는 절대로 안 한다’라고 했더니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절반만 나오시면 됩니다’라기에 출연하기로 했다.
류승범 | 두말할 여지가 있나.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최민식 선배 상대역이라는 것 때문에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런 기회가 왔는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 여지가 있나.
최민식 | 마지막에 치고 받는 것만 함께 찍어서 아쉽기는 하다. 다음에는 서로 대사를 주고받고 호흡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작품을 해보고 싶다.
류승범 | 그래도 트레이닝을 한 체육관에서 했으니까 마지막 대결장면에 대비해 호흡을 맞출 시간은 있었다.
최민식 | 구조적으로 다른 이야기니까 각자 충실하게 가면 되는 거였다. 각자 열심히 살다가 만나서 싸울 때는 곪을 대로 곪은 상태다. 더이상 고름을 짜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다. 링 위에서 맞닥뜨렸을 때는 두려움과 투지를 동시에 가지고 나오는 거다. 태식이는 수십년 만에 젊고 패기만만했던 시절로 돌아온다. 나름의 악다구니로 나오긴 했지만 겁은 엄청 날 거다. 그런가 하면 상환이는 난생처음으로 복싱을 배운 놈이다. 이 놈은 제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 나온 거다. 그러니 동병상련의 정도 느껴지고. 주고받는 펀치 속에서 ‘이 새끼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싶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서로가 유혈이 낭자하게 뒤덮인 채로 수고했다고 부둥켜안는다. 그 동질감이 관객에게 잘 전달될 거라고 확신한다.
류승범 | 그런데, 상환이라는 캐릭터의 목적이 한풀이는 아닌 것 같다. 참회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역할에 접근했다. 상환이가 맞을 매는 어차피 맞았어야 하는 매다. 그걸 알고 링으로 올라가는 거다. 지난날의 실수에 대해서 얼마나 뼈저리게 아프겠냐. 그것에 대한 자기질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악에 받쳤을 수도 있고. 왜냐하면 얘한테 전국체전은 악(깡다구)이거든. 진짜 그냥 악이다. 그런데 나는 가을뿐 아니라 4계절을 다 타기 때문에. (웃음) 신인왕전을 찍기 직전에 약간 방황을 했다.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몸도 만들어야 하는 동시에 상환이라는 인물과 깊이 교감해야 하는 시기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가을 탄다는 핑계로 후자를 선택했다. 당시에는 감정적인 연기에 더 치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은 몸 만들어서 잘 보여주면 좋겠지. 그것도 대단한 극중 효과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술배가 나올지언정 소주 한잔 하면서 역할에 몰입하는 게 더 필요했던 거다. 사실 두 가지를 다 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최민식 | 가을? 야. 그거 타줘야 돼. 가을이 왔는데 탈 줄을 모르는 건 배우의 감성이 아니야. 가을 오면 바로바로 타줘야 한다. (웃음) 나? 아이고. 난 가을 타려고 일부러 많이 노력한다. (웃음) 그런데 주먹질만 해야 하니 인간적으로 그게 안 되는 거지.
# 류승범과 최민식이 말하는 류승완
“최민식은 전체를 계산하고 디테일을 살리는 치밀한 배우다. 승범이는 배우로서의 본능이 뛰어나다. 한 장면이 잘 풀리지 않으면 전체 맥을 짚어서 감정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잠이 많긴 하지만.”- 류승완
최민식 | 솔직하게 말할까? 처음엔 걱정도 되더라. 난 가급적이면 특정 감독과 작업할 때 선입견을 버리려고 한다. 다만 류승완 감독은 스타일과 고집이 확실하지 않나. 그 고집 때문에 현장 장악력 같은 부분들이 약하지 않을지 걱정이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다 기우였다. 나름대로 열려 있고, 탄력적으로 현장을 운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더라. 그 사수에 그 조순가? 박찬욱 감독 연출부를 하면서 장점을 많이 취했구나 싶었다. 단 한 차례도 인상 붉히거나 그런 거 없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오케이인 것도 아니었고 입장이 아주 다를 때도 꽤 있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자기 걸 고집하면서도 배우를 배려해주는 마음이 있다.
류승범 | 사실은 이런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감독과 그다지 친하지는 않다. 형제면 서로 다 알 것 같지? 내가 모르는 면도 많다. 마찬가지로 류승완 감독도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들이 많을 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다른 감독들과 작품을 하면서 성장을 했으니까. 류승완 감독도 마찬가지로 다른 배우들 만나 작품해가면서 성장했을 것이고. 그러니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출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주먹이 운다> 현장을 되돌아보자면 ‘이 사람이 더 넓어졌구나. 더 깊이있게 들어가려고 하는구나’ 싶더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형이니까 가능한 거겠지만, 감독으로서 참 많이 좋아지고 있는건 사실이다. 신뢰도 더 쌓여간다. 참. 이것도 형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걱정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 사람이 드라마를 원활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었다. (웃음)
# 최민식과 류승범, 그리고 권투
“붙여만 주십쇼. 이기고 지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상환
“뽁싱은 나의 삶. 뽁싱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런 말 들어봤어요? 삶의 축소판. 인생이 참 괴롭고 고달픈 거거든요. 뽁싱도 마찬가지예요.”- 태식
최민식 | 생존경쟁에 대한 관점으로 이야기하자면,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다. 의지는 곧 죽음이다. 제발 여기서 그만두게 해달라. 그러면 수건 던지고 기권하는 거다.
류승범 | 억하심정만 남았다. (웃음) 복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자기극복이 끝이 없는 스포츠다. 계체량 조절하는 것 좀 봐라. 어지간한 의지없이는 못한다. 계체량 조절 때는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데. 미치지. 여자도 못 만난다는데. (웃음) 그리고 일단은 헝그리하지 않나? 맨주먹 딱 두개뿐이지 않나. 나는 절대 직업복서는 못한다. 절대로.
최민식 | (웃음) 그걸로 밥벌어 먹는 건 못하지. 굉장히 외롭다고. 누가 시합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레슬링처럼 테크매치도 못하고. (웃음) 우리 사는 것도 그렇지 않나. 세상은 어차피 나 혼자다. 관계는 위안일 뿐이고. 형제도 부모도, 친구도 마찬가지로 남이다. 친구? 의리? 외로운 건 마찬가지라고. 그런 관계의 진실을 알았을 때 또 얼마나 더 외로워지냐. 복싱이 그런 거다. 내가 살기 위해서 링 위에 서야 하는 것. 그런 게 참 드라마틱한 거다.
류승범 | 최민식 선배는 인간 같지 않을 때가 있다. 매일 체육관에 나오는 선배를 보면서 대체 뭐가 저사람을 저렇게 움직이게 할까? 그 원천이 궁금했던 적도 있다. 인간이라면 지쳐야 하는데 나이든 사람이 지치지를 않는 거다. 그게 내 자아를 팍 건드리더라. 참 많이 느꼈다. 선배님이 의도했건 아니면 몸에 밴 것이건 간에, 선배 배우들에게서 주워먹을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거구나 싶었다.
최민식 | 의도적은 무슨. 다 먹고살려고 그랬던 거야. (웃음) 그저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직업배우’라는 말이다. 나라고 매일같이 체육관에 나가고 싶었겠나. 이제 내 나이도 43살이다. 꾸준히 건강관리 해본 적도 없이 담배 피우고 술 퍼마시던 인간이 땀복 입고 400m 열 바퀴 뛰려면 덜컥 겁도 난다. 몸에 무리도 오고. 사명감 좋아하네. 직업의식이 아무리 있어도 인간은 인간 아닌가. 몸이 당장 죽겠는데 어쩌나. 그래서 빼먹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말이지. 빼먹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 이건 내 직업이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다! 이러다보면 이게 좋고 싫고가 없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고 어떻게든 해야지. 개런티 두둑히 받았으니까 되돌려줘야 한다는 거다. 그러다보면 정신이 차려지고, 그 정신 붙들고 비죽비죽 기어나가는 거다.